제275화 이 석유로 국 끓여 먹을 거야?(2)
얼반 금융 그룹.
음.
회장 얼반 프리먼은 신문을 보며 묵직한 침음을 흘렸다.
“왜요? 뭐가 또 맘에 안 드십니까?”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존 스톰 부행장이 슬쩍 불편한 행장의 맘을 떠봤다.
“존, 우리가 자그마치 20년에 걸쳐 세운 명성을 투마로우가 10년도 안 돼서 가로채 갔어. 그래, 그거야 뭐 실력이 있으니 그러려니 하겠는데. 이 신문 기사를 보라고. 이제 대통령까지 손을 뻗쳤어. 이게 뭘 뜻하는지 알지?”
“하하, 왜 모르겠습니까? 앞으로 4년은 투마로우 세상이겠죠.”
“그 막돼먹은 임재준이 또 얼마나 해 먹을지 걱정도 안 되나?”
“투마로우와 저희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까. 저희는 안정을 최우선으로 하지만 투마로우는 성장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럼 국민이 인식하기에 우리가 더 나은 은행 아닌가?”
“그럴 겁니다.”
“근데 투마로우에 더 많은 돈이 몰리잖아.”
“그건 투마로우가 더 많은 이익을 만들어 주니까요.”
흥, 이익이 다는 아닌데.
“이걸 뒤집을 방법이 없을까?”
“어려울 겁니다. 인간은 돈에 약하니까요.”
“그게 문제라는 거야. 그게.”
똑똑.
“들어와.”
비서가 급한 듯 쪼르르 달려 들어왔다.
“무슨 일 있어?”
“블룸버그에서 실시간 뉴스가 하나 떴습니다. 보셔야 할 것 같아서요.”
“뭔데?”
“임재준이 베네수엘라에 입국했다고 합니다.”
“베네수엘라? 거긴 미국의 적대국이잖아. FBI와 면담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뭐야?”
“확실한 건 아니지만 베네수엘라라면 석유 외에 없지 않을까요?”
“석유?”
프리먼 행장은 뭔가 생각난 듯 부행장에게 이야기를 꺼내려다 비서를 봤다.
“그만 나가봐.”
“네.”
비서가 나가자 다시 입을 열었다.
“석유는 아니겠지?”
“당연히 아닙니다. 베네수엘라 석유 시설은 전부 노후화돼서 투자 금액이 100억 달러를 넘습니다. 지금같이 유가가 하락하고 있는데 그건 너무 바보 같은 짓입니다.”
“그럼, 왜 베네수엘라에 갔을까?”
“마두로가 미국의 행정 제재를 무마해 달라고 임재준에게 부탁하려는 게 아닐까요?”
“그 사회주의도 못 되는 놈들의 부탁을 들어줄까?”
“마두로가 뭘 주느냐에 따라 달라지겠죠.”
“거 참, 중국이나 러시아를 들락거리더니 이제 베네수엘라 같은…….”
프리먼 행장이 말을 하다가 멈췄다.
“왜 그러십니까?”
“존, 존, 그거 생각나나?”
“뭐 말입니까?”
“1983년인가 유에스 뉴스에서 만든 미국 내 대학 평가 시스템.”
“그거야 지금도 그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으니까 당연히 기억하죠. 대학들은 그 15가지 항목의 실적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그래, 그거야. 은행도 그런 평가 시스템을 만드는 게 어떨까?”
“은행 평가 시스템이요?”
“그래. 대학 평가는 학생들이 대학을 진학하는 데 도움이 되잖아. 그러면 은행 평가는 국민들이 돈을 맡기는 척도로 이용할 수 있을 거 아냐?”
“그건 지금도 있습니다. 건전성 지수도 있고 수익률 순위고 있고. 근데 또 다른 평가를 만들면 사람들이 인정할까요?”
“미국 국민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게 이념이잖아.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이번 은행 평가에 이 이념을 평가하는 항목을 추가하는 거야.”
“음, 이념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 기울면 확실히 불리하긴 하겠군요. 전부는 아닐지라도 보수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투마로우에서 얼반으로 갈아탈 확률도 꽤 될 것 같습니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럼 이 평가를 어디다 맡기는 게 좋을까?”
“유에스 뉴스처럼 적자가 심한 기업을 하나 찾아서 투자 좀 하고 평가 항목을 만들라고 하면 될 것 같은데요.”
“아니야, 그건 너무 고리타분한 방법이야. 지금은 시대가 바뀌었어. 그래, 블룸버그, 블룸버그를 이용하자고.”
“블룸버그요?”
“그래, 내가 블룸버그 회장을 만나 보겠어. 이번 민주당 참패 이후 투마로우에 안 좋은 감정도 있을 것 같고.”
“알겠습니다. 약속을 잡아 보겠습니다.”
마이클 블룸버그, 블룸버그 통신 설립자이자 미국 부자 서열 8위이며 이쪽도 민주당과 공화당을 탈당하다 복당하다 하면서 뉴욕 시장을 3선이나 해 먹었다.
버니가 대통령 후보로 나오면 무소속으로 대통령에 출마할 생각이었지만 힐러리가 나오자 힐러리를 적극 지지하며 출마를 포기했다.
왜 버니는 안 되고 힐러리는 되냐고?
버니는 사회주의자고 블룸버그는 부자니까.
프리먼 행장은 자신이 생각해도 아주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은행 평가에서 투마로우를 아래로 떨어뜨리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조작이야 어디든 널려 있는 거니까.
그리고 임재준의 이념 성향을 물고 늘어지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여겼다.
***
베네수엘라 챠베스 집무실.
재준과 일행은 대통령 집무실을 가는 루트에 있는 차베스 집무실을 걸어갔다.
전 대통령 챠베스는 우주의 운을 타고난 사람으로 그가 대통령이 되는 시기에는 꼭 유가가 폭등하는 반전이 일어났다.
국민은 챠베스를 신처럼 떠받들었다.
재준과 일행은 그 국민의 신인 챠베스의 집무실을 지나쳤다.
“아저씨, 여긴 꼭 박물관 같은데요.”
엘리자베스 질문에 재준이 조용히 속삭였다.
“같은데요가 아니라 박물관이야. 전 대통령 챠베스를 우상화하기 위해 집무실을 박물관으로 바꿨어.”
“그래요?”
“현 대통령 마두로가 버스 기사 출신이거든. 기존 정치인들과 대결에서 승산이 없었어. 그래서 전 대통령 챠베스를 내세우고 자신은 그 뒤에 숨었지.”
“그래서 선거에서 이긴 거예요?”
“아주 큰 차이로 이겼지. 아마 당분간 챠베스의 신격화는 계속될 거야.”
“근데 국민들 몰골이 많이 안 좋은 것 같네요. 전에 할아버지와 왔을 때는 안 그런 거 같은데. 너무 어려서 몰랐나?”
엘리자베스는 공항에서 대통령 집무실로 오는 동안 본 베네수엘라 전체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안 좋은 거 맞아. 유가는 폭락했지, 미국 제재는 실행됐지. 물가가 자그마치 500%나 올랐어.”
“네? 그게 나라예요?”
놀라긴, 도날드가 경제 제재를 가하면 2,600%가 오르고 그다음 해엔 1,700,000%, 전 국민의 96%가 극빈층으로 변하게 되는데.
그야말로 천당과 지옥을 다 겪는 나라가 베네수엘라였다.
2014년까지 남미에서 잘사는 나라 4위에 해당했다.
석유 판 돈이 넘쳐나서 미국으로 쇼핑을 다니는 국민이 대다수였다.
미국한테 까불다가 한 방에 훅 가는데 진짜 안드로메다로 날아갔다.
현 미국 대통령이 행정 제재를 가하면서 물가가 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로 쭉쭉 올랐다.
그냥 간단하게 매월 물가가 50% 오른다고 생각하면 된다.
한화로 생각하면 1,000원짜리 빵이 한 달 지나면 1,500원이 되고 한 달 지나면 2,250원이 되고 한 달 지나면 3375원이 된다.
멈추지 않고 계속 올랐다.
물가가 무슨 불법 사채도 아니고 대단한 나라다.
리디노미네이션, 화폐 개혁도 총 세 번 단행했다.
1천 볼리바르를 1볼리바르로 한 번 하고, 10년이 지나서 10만 볼리바르를 1볼리바르로, 그리고 3년 후에 100만 볼리바르를 1볼리바르로.
볼리바르가 베네수엘라의 화폐 단위다.
100만 원이 하루아침에 1원이 되면 기분이 어떨까?
뭐 베네수엘라는 100만 볼리바르로 딱지를 접어 노는 정도의 돈이겠지만.
엘리자베스도 베네수엘라에 대해 어렵다는 정도만 알았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래서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했구나.
우선은 살고 봐야지.
“아저씨, 도와줄 거예요?”
“도와줘야지.”
“정말요?”
“먼저 주고받을 걸 알아보고.”
“그럴 줄 알았어. 돈밖에 모르는 돈 귀신.”
엘리자베스는 재준을 째려보고는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 미국 제재를 받는 나라를 그냥 도와주란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
잠시 후.
베네수엘라 대통령 집무실.
“뭐라고요?”
재준은 마두로 대통령이 한 말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엘리자베스는 두 손으로 입을 감쌌다.
마두로 대통령은 재준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말에 약간 힘을 주었다.
“이제 더는 버틸 힘이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요. 이대로 가다간 국민 대다수가 아사하고 말 겁니다.”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해야 미국이 제재를 풀고 다시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프랑스령으로 해달라는 건. 좀. 뭐랄까.”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기아나가 프랑스령 아닙니까. 우리라고 못 할 것도 없지 않을까요?”
“거긴 대다수의 국민이 독립을 원하지 않아서 그런 결과가 만들어진 것이고 여긴 아직 국민의 의견을 들어봐야 하지 않을까요?”
“저희 국민 96%가 극빈층입니다. 빵을 준다면 모두 베네수엘라 국적을 포기하고도 남을 겁니다.”
허, 정말 막무가내네.
그렇다고 무작정 거절할 수도 없고.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마두로는 바로 대답을 들을 수 없다는 생각에 조용히 비서에게 무언가를 지시하고 자리를 피했다.
재준과 윌켄, 엘리자베스는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윌켄,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글쎄요. 마두로 대통령 입장에서는 아주 좋은 선택입니다. 미국 제재도 피하고 석유 산업도 다시 살려야 하니까요.”
“우리 입장에서는요?”
“아주 안 좋죠. 먼저 베네수엘라 보유 외환은 50억 불 정도이고 부채는 250억 불입니다. 노후화된 석유 산업 장비를 교체하려면 100억 불 정도가 필요하고요. 거기다 민생 안전도 생각하려면 국채라도 발행해야 하겠지요.”
“미국 입장은요?”
“미국 입장이요?”
거기까지 왜 생각을 해야 하지?
“미국이 정말 베네수엘라가 미워서 제재한다고 생각하나요?”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그럼요. 물론 미국을 맹비난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이 많은 인구가 빈곤에 허덕이게 하기에는 명분이 빈약하잖아요.”
“그럼, 미국의 이익을 해칠 만한 뭔가가 있는 겁니까?”
“네, 지금 한창 문제가 되는 셰일 석유.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보이지 않는 전쟁 중이잖아요. 셰일 기업들이 파산 위기에 몰렸습니다. 그래도 서로 생산을 멈출 수가 없어요.”
“그럼 셰일 기업을 살리기 위해 베네수엘라를 쳤다는 말이군요.”
“맞아요. 베네수엘라는 희생양이죠. 베네수엘라의 석유 매장량은 사우디보다 훨씬 많아요. 미국 입장에서는 사우디와 베네수엘라가 손을 잡는 끔찍한 장면은 보고 싶지 않았을 겁니다. 셰일 기업의 파산은 불을 보듯 뻔하니까. 그런데 때마침 마두로 대통령이 챠베스 대통령 흉내 낸다고 미국을 비난해 주니 얼마나 고맙겠어요. 바로 행정 제재부터 시작한 겁니다. 아니면 미국이 죽으니까.”
와.
엘리자베스가 재준과 윌켄의 말을 듣더니 입을 떡 벌렸다.
“그 정도로 심각하게 싸우는 거예요?”
“방법이 없잖아. 베네수엘라마저 한계 생산량까지 석유를 캐면 어떻게 될까? 유가는 20달러까지 떨어질지도 몰라. 그러면 아마 셰일 기업이 먼저 떨어져 나갔을 거야. 국가는 국채라는 걸 마음껏 발행할 수 있으니까. 이자만 지급하면서 버틸 수 있지. 하지만 기업은 아니야. 회사채 발행에는 한계가 있어. 셰일 기업이 다 떨어져 나가면 산유국들은 다시 유가를 끌어올려서 빚을 갚아 버리면 되는 일이거든.”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네요.”
미국을 선택하든 베네수엘라를 선택하든 위험 부담은 어디에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