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8화 속도보다 중요한 게 뭔지 알아?(9)
AAG 빌딩 66층.
재준은 그동안 결과를 정리하기 위해 모든 팀원을 소집했다.
아, 박민수와 강호석은 참석하지 못했다.
세계 여러 나라와 관세 협상을 위해 북한에 남겨졌다.
아무튼 서형길도 참석해서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워서스틴, 페렐라, 자일링스와 알테라의 인수 진행은 어디까지 진행되었지?”
“거의 끝났습니다.”
“잘했어. 어, 그리고, 혹시 나중에 AMD나 인텔에서 인수 의사를 타진해 오면 우리가 산 가격의 100배에 팔아 버려.”
“네? 누가 FPGA 기업을 100배에 삽니까. 우리가 인수한다고 하니까 다들 비웃었는데.”
“아무튼, 그렇게 알고 있어.”
정말이야?
보스의 말은 틀린 적이 없잖아.
그럼 200배에 팔아 볼까?
워서스틴과 페렐라는 비싸게 팔 수 있다는 말에 어떻게 하면 역대 최고의 비율을 받아낼 수 있을지 고민했다.
“알겠습니다.”
그렇지. 그런 비장한 각오 아주 좋아.
자율주행과 사물인터넷의 시대가 본격화되면 아주 깜짝 놀랄 거다.
“펠그리니, 퀀트 펀드 수익률은 어때?”
“지금은 7~10%로 양호한 편인데 워낙 많은 펀드가 난립하는 바람에 수익률 곡선이 하향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수익률이 바닥인 펀드는 그때그때 알아서 청산해 버려.”
“그럼, 퀀트는요?”
“새로운 알고리즘 만들어야지.”
“아, 네.”
“아니다. 여러 명을 한곳에 모아서 인공지능 연구를 위한 회사를 하나 차려야겠다.”
“그게 낫겠네요. 알겠습니다.”
펠그리니가 뭔가 새로운 아이템을 얻은 표정을 했다.
“박혁, 알고 트레이더들은 어때?”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 회선 공사가 마무리되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데요.”
시카고 놈들 발목을 잡았으니 그놈들과 엮인 힐러리를 잡으면 끝나겠네.
근데 힐러리 뒤에 누가 있으면?
그야 대통령이겠지.
거기가 종착역인가?
“그럼 다 된 건가?”
“보스?”
“왜?”
“좀 재밌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인데?”
“여기.”
박혁은 노트북을 펼쳐서 정치 커뮤니티 사이트에 들어갔다.
“한번 죽 보세요.”
재준은 각 후보들의 공약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댓글들이 보였다.
특히 힐러리에 대해.
-트럼프에 비해 체력이 너무 허약한 거 아냐? 매일 방구석에만 처박혀 있잖아.
-WASP는 악마다. 그들이 대통령에 앉으면 안 된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전쟁광.
-똑같은 정책으로 기득권에 편승하는 안일한 인간.
-역차별의 원흉. 흑인이 죽으면 세상 무너질 듯이 애도하면서 백인 경찰이 죽으니까 입 싹 닦고 말도 없다.
-버니가 진정한 후보다. 힐러리는 후보 경선 조작으로 버니를 밀어냈다.
음, 왜 힐러리 공약에 대한 댓글이 거의 테러 수준이지?
분명 여론 조사는 힐러리가 앞서고 있는데 여기만 이렇다고?
“박혁, 민주당 우호 사이트로 들어가 봐.”
“네.”
박혁은 클릭 몇 번으로 재준이 원하는 사이트로 들어갔다.
어디 보자.
오호, 여기도 마찬가지네.
“누구야? 대놓고 힐러리를 저격하는 게.”
“아이피를 타고 들어가면 거의 애널리티카에서 쏟아져 나온 겁니다.”
“뭐 하는 놈들이야? 들어본 적이 없는데.”
“영국 케임브리지에 있는 여론 조작 단체입니다. 저격 대상의 과거, 현재 행적을 딥러닝을 이용해 파악하면 인공지능이 댓글을 달면서 공격하는 거로 돈을 버는 놈들이죠.”
“와, 아주 최신 기술로 나쁜 짓만 하는 놈들이네.”
“아마 러시아가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러시아가?”
“가스프롬 영국 지사에서 돈이 흘러 들어갔으니까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
“보스도 참. 제 국적이 어딥니까? 가스프롬은 항상 감시하는 대상 중의 하나입니다. 가스프롬 시스템에 아직 제가 심어 놓은 백도어가 있습니다.”
“아, 이해됐다.”
어쨌든, 이런 식으로 러시아가 도날드를 도와주는 거였어?
그래서 힐러리 이메일도 해킹해서 열심히 언론에 퍼다 나른 거구나.
그런데 왜?
도날드가 대통령이 되면 러시아에 도움이 되나?
“윌켄, 지금 힐러리와 도날드 지지율 차이가 얼마나 나지요?”
“거의 박빙인데. 힐러리가 약간 앞서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박빙인데 도날드를 도와준다고?
푸챠르 같은 권위주의로 똘똘 뭉친 인간이 약 먹은 개처럼 날뛰는 도날드를 좋아한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
그렇다면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건데.
도날드가 대통령이 된다면 미국은 혼란에 빠지겠지.
크림반도에 만족하지 못하고 우크라이나를 먹으려나.
역사가 뒤틀려서 러시아의 다음 행보가 확실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도날드가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한다.
그러나 내가 끼어드는 바람에 도날드는 러시아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런데 러시아는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도날드를 도왔다.
불법적인 방법.
푸챠르의 성격상 대선 후에 누가 대통령이 되어도 자신이 도날드를 도왔다고 슬쩍 언론에 흘릴 것이고.
미국은 혼란이 가중될 것이다.
그래, 미국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계획은 알겠는데.
그 사이에 뭘 하려는 거지?
재준이 러시아 문제로 침묵하고 있자 퀴니코가 다가왔다.
“보스, 뭘 그렇게 생각해요?”
“러시아가 ‘왜 도날드를 도울까?’ 의심이 들어서.”
“의심?”
퀴니코의 미간이 서서히 좁혀졌다.
분명 지금까지 러시아의 행적이 머리에 그려지고 있을 것이다.
“러시아의 석유를 싸게 사려고?”
“국제 유가가 있는데 싸게 주겠어? 더 비싸게 주면 줬지.”
“그러네요. 땅을 넓히기 위한 것도 아닐 거고. 러시아가 땅이 얼만데.”
이때 블록이 한마디 했다.
“소문에 의하면 그리스가 관세동맹에 들어간다는데. 이건 아니겠죠?”
“관세동맹?”
동맹? 이런 미친.
내가 저질러 놓은 일을 넙죽 받아먹은 거잖아.
하하하.
재준이 웃자 다들 시선이 집중됐다.
“그거네. 그리스. 미국이 혼란한 틈을 타 그리스로 군대를 움직이겠다는 계산이야.”
“우크라이나와 같은 수법이네요.”
“그렇지.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그리스가 러시아에 구원을 요청해야 명분이 서. 그럼…….”
“막아야 하지 않을까요?”
“아니, 명분을 만들어 주지 뭐.”
“러시아가 그리스에 군대를 파견하게 만들어 준다는 거예요?”
“그렇지. 발을 디디는 순간 아차 싶을 거야.”
“뭐가요?”
“지켜보면 알 거야.”
푸챠르가 아직은 살아 있네.
그렇지. 벌써 죽으면 안 되지.
“러시아에 자율주행 지역 확장은 중단할까요?”
“아니, 그건 북한이 알아서 할 일이지. 우리가 나서면 절대 안 돼. 김정은……. 김여정이 잘할 거야.”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가 있다.
유럽의 일은 유럽이, 아시아의 일은 아시아가 판단할 일.
몇 군데 전화하고 지켜보면 알겠지.
“그리고 도날드 선거는 어떻게 되고 있어?”
“보스가 러스트 벨트를 중심으로 유세를 하라고 해서 주구장창 러스트 벨트에 있습니다.”
“뭐? 아니, 이런 멍충이. 다른 곳은 아직 유세도 안 다닌 거야?”
“네. 다음 조언이 있을 때까지 자리를 지킨다고 하던데요.”
후.
도날드 나름 똑똑한 사람인데.
너무 나한테 기대는 거 아닌가?
“힐러리는?”
“매일 셀럽들과 파티를 열 거나 유명 인사와 만나고 있습니다.”
너무 비교되네.
셀럽?
그렇지. 힐러리를 지지하는 연예인, 운동선수, 언론인이 유독 많았어.
오, 그러면 도날드를 위해 이벤트를 하나 해도 될 것 같은데.
도날드도 도와주고 투마로우 홍보도 하고.
“자, 모두 모여봐.”
수상하다.
또 무슨 일을 벌이려는 게 확실해.
저 얼굴 봐.
빙글빙글 웃고 있어. 심상치 않아.
모두 의심의 눈초리로 재준을 중심으로 모였다.
한 명 엘리자베스만 빼고.
“넌 왜 거기 있어. 빨리 이리 와.”
“제가 꼭 가야 하나요?”
“당연하지. 네가 제일 중요한 역할인데.”
“정말요?”
“그렇다니까.”
엘리자베스도 마지못해 모였다.
“여기, 도날드 선거를 위해 전국을 돌 거야.”
“우리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요?”
“당연하지. 투마로우를 위한 일이기도 해. 자, 그럼 어떻게 해야 하냐면.”
숙덕숙덕.
네?
“보스, 미쳤어요? 무슨 영화 찍어요?”
“아저씨, 그건 아니야. 그러다 죽어.”
“보스, 무모한 짓입니다. 정말 위험해요.”
“난 못해. 그런 일에 동조할 수 없어.”
어허, 이 사람들이.
“내가 왕년에.”
지금까지 가만히 듣고 있던 서형길이 나섰다.
“그냥 도련님이 하자는 대로 해. 오랜만에 보고 싶네. 예전 도련님의 모습을.”
서형길, 당신 뭔가 알고 있는 거예요?
흐흐흐흐흐흐흐.
서형길의 입꼬리가 올라가며 재준에게 정중하게 인사를 했다.
도련님 보여주시죠.
***
러스트 벨트.
“뭐라고요? 오늘 유세를 같이 돌자고요?”
도날드는 갑작스러운 재준의 제안에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어때요. 막 흥분되고 그러죠.”
“아니요. 그리고 유세는 미리 장소도 정하고 홍보도 해서 유권자를 끌어모아야 하는 겁니다. 이렇게 갑자기 간다고 해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게 아닙니다.”
“그건 우리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마시고. 자, 유세 시작하네. 집중합시다.”
“정말 가능하다 생각합니까?”
“그럼요, 투마로우가 돕는 건데 이 정도는 해 줘야죠. 안 그래요?”
음.
“좋아요. 해 봅시다.”
이때, 도날드의 유세 음악인 롤링스톤즈의 You Can't Always Get What You Want이 흘러나오고 도날드가 군중 앞으로 나갔다.
노래가 서서히 줄어들자 도날드가 마이크를 잡았다.
“오늘은 특별한 손님이 방문하셨습니다.”
와아아아아아.
“투마로우의 창시자, 월가의 제왕, 도날드의 영원한 지지자. 여러분의 친구. 투우마아로오우, 임. 재. 준.”
엥? 임재준이 여기 왔다고.
도날드를 지지한다고 의외인데.
관중들은 무대를 두리번거리며 재준을 찾았다.
저벅저벅.
재준이 무대 뒤에서 담담히 걸어 나왔다.
어?
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도날드가 마이크를 재준에게 건넸다.
“파이팅, 도날드.”
주먹을 힘있게 쥐어 보이며 군중 앞에 선 재준.
“반갑습니다. 러스트 벨트 여러분. 이제 러스트 벨트는 프로스페로스(번영한) 벨트가 될 날이 머지않았습니다. 여기 도날드가 대통령이 되면 투마로우는 이 지역에 투자를 약속합니다. 이제 과거의 영광이 눈앞에 있습니다. 모두 위선에 찌든 정치를 갈아엎읍시다. 힐러리가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여러분의 분노를 보여줘야 합니다.”
재준은 도날드와 함께 주먹을 뻗는 동작을 같이 취했다.
와아아아아아.
다 갈아엎어 버려라.
우리가 살아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도날드, 도날드, 도날드.
재준의 등장으로 뜨거워진 유세 현장.
“힐러리 넌 해고야. 우리는…….”
도날드의 거침없는 연설이 이어지고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자 에어로스미스의 경쾌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와아아아아아.
도날드와 재준은 군중 속으로 들어가 악수를 나누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고 거칠게 흔들며 앞으로 나아갔다.
파이팅.
도날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뒤에 있습니다.
거침없는 응원이 쏟아지고 도날드도 굳은 의지를 담은 표정으로 유권자들과 함께했다.
군중의 끝에 다다르자.
끼이이익.
러스트 벨트의 자존심 수퍼카 포드 GT40 한 대가 급하게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