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4화 속도보다 중요한 게 뭔지 알아?(5)
그리스.
유럽은행연합 대표로 독일에서는 앙겔라 총리와 재준이 아테네에 모습을 드러냈다.
와아아아아아아!
우우우우우우우!
한쪽에서는 구제금융 찬성의 세력이, 한쪽에서는 반대의 세력이 독일 대표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갈라져 대치하는 상황.
-구제금융 필요 없다. 유럽 연합은 꺼져라.
-그리스는 유럽 연합을 탈퇴하라.
-차르라스는 당장 나와서 국민의 심판을 받아라.
-진실을 외면하는 좌파들은 당장 그리스를 떠나라.
재준은 아주 흐뭇한 표정으로 그리스 국민들을 바라보았다.
열심히 싸워라.
이 이기적인 놈들아.
아주 뼛속까지 후회하게 만들어 줄게.
그런데 신기하네.
이때쯤이면 찬성 여론이 전국을 뒤덮고 차르라스의 지시를 받은 좌파 세력들이 자신들의 열세를 만회하려고 전국을 돌며 반대 여론을 독려해야 맞는 건데.
지금 이것만 보면 찬성과 반대가 반반으로 나뉘어 싸우는 듯한 분위기잖아.
그리고.
경호원들이 앞서가자 시위대는 순순히 길을 열어 주었다.
이건 또 뭐야?
무슨 시위대가 이렇게 신사적이야?
독일 대표단은 시위대를 지나 대기하고 있던 차를 타고 그리스 대통령 관저를 향해 출발했다.
가는 동안 창밖으로 보인 광경은 처음과 다르지 않았다.
찬반으로 나누어진 시위대가 평화적으로 대치하는 상황.
거참, 시위를 하는 건지 동네 싸움을 하는 건지.
그리스 정도 되면 과격해도 한참을 과격해도 되는 나라에서 갑자기 비폭력 시위가 유행인 것도 아니고.
재준은 뭔가 자신이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다른 양상을 띠니 의아함을 넘어 걱정까지 되었다.
일단 차르라스를 만나보면 알겠지.
잠시 후 대통령 관저에 도착했다.
다른 유럽 국가 대표단이 이미 도착해서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게 보였다.
아마 아직 차르라스가 도착을 안 해서 독일과 프랑스 대표단을 기다리는 듯했다.
역시나 차가 멈추고 앙겔라 총리가 내리자 나라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이쪽으로 모여들었다.
맨 앞으로 걸어오던 스페인 산체스 총리가 앙겔라를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네. 하하.”
가벼운 웃음과 가벼운 인사, 그러나 무거운 마음이 말과 행동에서 흘러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이후에 몰려드는 대표들과 일일이 악수로 인사를 대신하는 앙겔라 총리.
그리고 그들의 시선이 앙겔라 총리 뒤에 있는 재준에게로 향했다.
놀라움보다는 당혹스러운 표정들.
임재준이 왜 여기에?
아니, 왜 독일 대표단에 끼어 있는 거지?
앙겔라 총리가 뭔가 특단의 조치를 취하려고 그러나?
어떤 이는 그리스 사태 해결에 대한 희망을,
어떤 이는 더 깊은 수렁으로 떨어지는 절망을 가졌다.
어쩌면 그렉시트(Grexit:Greek Exit)가 실제로 일어나는 거 아냐?
그리고 이어 프랑스 대표단이 도착했다.
차량에서 올랑도 대통령이 내리고 임재준을 발견하자 바로 다가왔다.
“무슈, 어쩐 일입니까? 아, 앙겔라 총리.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그래도 독일 총리에게 먼저 인사 대신 질문을 하며 손을 내밀었다.
“임재준 오너는 도이츠코베르방크 회장입니다. 이번 그리스 문제에 가장 발언권이 높다고 할 수 있죠.”
앙겔라는 올랑도와 악수를 나누며 재준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를 설명했다.
“아, 그렇군요.”
올랑도는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앙겔라에게 미소를 지었다.
프랑스 사라크방크나 네쇼날파리은행의 경우도 같은데 독일이라고 해서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으니까.
“들어가시죠.”
“네. 그럽시다.”
독일과 프랑스가 앞장서서 대통령 관저 안으로 향하자 모두 그 뒤를 따랐다.
***
대회의실.
아직 차르라스 수상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모두 자신들의 이름이 적힌 자리에 앉았다.
독일과 프랑스의 자리는 나란히 배치되었다.
앙겔라와 올랑도 사이에 재준이 앉아 양쪽의 시선을 받았다.
“무슈, 그리스에 경제개혁의 의지가 있다고 판단되는데 본인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개혁 의지가 있다고요?”
“그렇게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한 달 전에는요?”
“한 달 전이요?”
“이놈들 전부 가면을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럼 전부 거짓이란 말이에요? 왜 이런 한심한 짓을…….”
올랑도가 맘에 안 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앙겔라가 피식 웃으며 입을 뗐다.
“그렇군요. 그거였어요. 임재준 오너는 처음부터 의심을 했군요. 한 달 전에는 국민의 80% 이상이 구제금융을 반대했는데. 어쩐지 오늘 보니 찬성 쪽으로 많이 돌아선 느낌이 들었다고 생각했어요. 근데 이게 다 거짓이었다니.”
“그럼, 일부러? 우릴 속이기 위해서 거짓으로 찬성하는 척한다는 겁니까?”
“그야 모르죠. 차르라스에게 물어봐야 알 것 같은데요. 하지만 그리스는 구제금융을 일단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추가 채권 발행은 고사하고 정부 내 공무원에 대한 임금, 실업급여, 의료보험, 노령연금 등이 전부 지급 정지된 상태예요. 더는 버티기 힘들어 보이는데.”
갑자기 반대 여론이 늘어났다?
국민투표를 실시하면 구제금융 찬성으로 마무리될 게 뻔했다.
구제금융을 받고 경제개혁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차르라스, 네가 총리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게 싫은 거야.
이런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정치에 대한 욕심이 남아 있다니 대단한 놈이네.
나 같으면 제일 꼴 보기 싫은 놈에게 엿 먹어 보라는 의미로 총리를 물려주고 이 나라를 뜰 텐데.
그래도 수장이란 말이지?
이때.
저벅저벅.
저벅저벅.
수십 명의 여유로운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벌컥.
회의실 문이 열리자 각국 대표단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만한 걸음으로 한 사람씩 악수하는 차르라스.
그리고 중앙의 상석에 앉아 두루 사람들을 살피고는.
“도와주십시오. 그리스는 이제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얼굴 표정에서 간절한 의사가 전달되었다.
대단한 놈이네.
행동과 말이 확확 바뀌잖아.
진짜 철면피가 다 되었구나.
자신이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지 알고 있어.
차르라스의 야망은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부터다.
그리고 8년의 격전을 벌여 2015년 차르라스가 총리에 앉았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건이 있었는지 책으로 엮으면 100권짜리 대하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고난과 역경을 헤쳐왔으니 도와달라는 말이 입에서 술술 나오겠지.
지금 빚쟁이가 돈을 더 빌려달라는 상황이다.
정말 얼굴에 철판을 깔고 강심장이 아닌 이상엔 저런 말과 행동이 나올 수가 없다.
모두 의아해하는데 그리스 구제금융에 호의적인 나라 대표들이 좌중을 진정시켰다.
-자, 자, 모두 착석해서 구제금융의 내용을 점검합시다.
-그럽시다. 결정은 아직 이릅니다.
모두 일단은 자리에 앉았다.
이 회의장에는 그리스 사태가 남의 일 같지 않은 나라도 있고 경제개혁 없는 구제금융은 절대 안 된다는 나라도 있다.
전 세계가 슬슬 금융위기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경제가 회복되고 활황을 이어가는 나라들이 속출하는데 유독 유럽만 그리스 때문에 발목이 잡혀 경제가 수렁으로 빠지고 있는 상황.
어떻게든 결론을 내려야 했다.
먼저 차르라스가 입을 열었다.
“먼저 경제개혁에 앞서 그리스 부채를 탕감해 주셨으면 합니다. 빚을 안고 경제개혁을 한다고 하면 국민의 절대다수가 반대하는 상황입니다.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은 국민이 늘어나고 있는 건 그나마 다행이고요.”
“솔직히 놀랐습니다. 밖에서 들은 이야기와 많이 다르더군요. 그리스의 경제개혁 의지를 저희도 봤습니다.”
“그렇습니다. 부채를 탕감해 주면 그리스는 유럽 연합에 잔류하여 열심히 나라를 일으켜 세우겠습니다.”
여기저기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예전보다 많이 유해진 건 사실이네.
-그러게 어차피 부채야 받지 못할 돈이 되었으니 어느 정도 탕감해도 되지 않을까.
-탕감해 줘야지. 우리도 언제 그리스 꼴이 날지 모르는데 선례를 남기는 건 우리에게 유리할 수도 있어.
이때.
여기요.
재준이 손을 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재준에게 쏠렸다.
차르라스 비서실장이 ‘임재준입니다’라고 속삭였다.
재준이 일어나서 차르라스를 한심하듯 쳐다봤다.
“그러니까 경제개혁을 어디까지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까지 나온 거 전부를 하겠단 건가? 그게 궁금한데요.”
유럽 연합은 그리스에 수차례에 걸쳐 경제개혁을 주문했다.
그때마다 그리스는 하겠다고 약속하고 하나도 안 지켰다.
“아, 임재준. 미처 알아보지 못해 죄송합니다. 우리가 그렇게 한가한 상황이.”
재준이 말을 잘라먹었다.
“아니, 그런 겉치레 말고 구체적인 경제개혁을 말해주세요. 여기 한가해서 모인 사람 없어요.”
읍, 뭐야 저놈은.
“근데 임재준 당신은 독일 사람이 아닌 거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발언을 해도 되는 겁니까?”
이 인간이 말귀를 못 알아먹네.
“거참, 한가하지 않은 분이라 신문도 안 읽으셨나 보네요. 이번에 내가 그리스 국채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독일 은행 회장으로 취임했는데. 몰랐어요? 신문 좀 읽으세요. 지금 그리스가 내 돈을 가장 많이 떼어먹겠다고 말하고 있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어디 얼마나 거창한 경제개혁을 할 건지 듣고 싶은데. 말씀해보세요. 그 부채를 탕감까지 받아 가면서 한다는 경제개혁.”
흠.
차르라스는 재준을 노려보며 입을 꽉 다물었다.
“말 안 해요?”
“…….”
“하긴 할 말이 없겠지.”
“거 말이 좀 심하군요.”
“심하다고요? 그리스 때문에 유럽 내에서 직장을 잃고 거리에 나앉은 사람이 몇인 줄 알고 그런 말을 하는 겁니까? 당신은 양심이라는 게 있어요? 내가 그리스 정치나 경제에 지적이라도 했나요? 난 그리스 책임 의지를 물어보는 겁니다. 정말 양심이 남아 있는지. 남의 돈 가지고 흥청망청 써놓고는 자존심 조금 긁혔다고 말이 심하네 마네를 입에 올린다고요?”
“여기 공적인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잖아. 경제개혁을 할 의지가 있냐 없냐. 이게 말하기 그렇게 어려운 거예요? 사적인 자리였으면 내가 이렇게 예의를 차리면서 이야기하지도 않아요? 차르라스 총리, 그리스 경제개혁 할 생각은 있나요?”
“…….”
차르라스는 몰아치는 재준에게 눈을 부라릴 뿐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다.
분위기가 냉랭하게 바뀌었지만, 앙겔라와 올랑도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느라 이를 꽉 깨물기까지 했다.
이러니 말을 하고 싶어도 입을 다물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차르라스의 시선이 앙겔라에게 향했다.
앙겔라의 시선은 슬그머니 올랑도를 향했다.
그리고 작게 속삭였다.
“올랑도, 우리가 나서야 합니까?”
“미쳤어요? 임재준이 말을 하기 시작하면 절대 끼어들지 않는 게 룰입니다. 그냥 지켜보세요.”
“저러다 그리스가 유럽 연합을 탈퇴한다고 하면 어쩌려고요? 국채는 고스란히 휴지가 됩니다.”
“지금 방금 임재준이 그리스 국채를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맞습니까?”
“코베르방크가 좀 많이 가지고 있기는 합니다.”
“그럼, 잘됐네요. 임재준이 부채탕감 같은 거 해주는 인간이 아닙니다. 다 받아 낼 거니까 그냥 지켜보세요.”
“그래요?”
앙겔라는 임재준을 한 번 겪어보긴 했지만, 이번엔 상대가 조금 비이성적인 인간인 차르라스라 힘들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차르라스가 입을 다물자 옆에 있는 비서실장이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