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3화 속도보다 중요한 게 뭔지 알아?(4)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보게 되는군요.”
“그래도 얼마나 다행입니까. 살만 국왕님의 젊은 모습을 제가 기억할 수 있게 되었네요.”
하하하하.
“직접 만나서 이야기하고 싶지만, 내가 맘이 급해서 말이죠.”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걸까요?”
“투마로우 시티에 투자를 하고 싶은데 내가 자리가 있습니까?”
“그럼요. 자리는 만들면 되는걸요. 어디 보자. 이번에 투마로우 시티에 종합 대학을 하나 지으려고 하는데. 여기에 투자하시죠. 앞으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면 국왕님은 더 오래 그리고 더 젊은 몸을 유지하실 수 있지 않을까요?”
“오, 좋은 일입니다. 내가 반드시 대학에 들어가는 모든 자금을 대겠습니다. 내가 살아 있다면 돈 걱정은 하지 마세요. 하하하.”
“정말 훌륭하신 결정입니다. 하하하.”
공짜로 대학을 세우게 생겼네.
내 이럴 줄 알고 깨어나자마자 연락을 하라고 한 거지만.
“자, 이제 언론에 건장한 모습을 드러내실 시간입니다. 부디 사람들을 너무 놀라게 하진 마세요.”
“하하하, 이거 너무 긴장되는군요.”
“그럼, 다음엔 사우디에 가면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살만 국왕은 자신의 모습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치우라고 손짓했다.
촤르륵.
의사 둘이 양쪽으로 커튼을 치우자,
팟팟팟팟팟팟팟.
우와아아아아아.
플래시가 터지며 유리 너머에 있는 기자들의 함성이 들렸다.
***
AAG 빌딩 66층.
우와.
TV로 생중계되는 살만 국왕의 모습을 지켜보던 엘리자베스가 탄성을 지르고 멈칫거린 후 재준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쏘아보았다.
“일부러 그런 거죠?”
“뭘?”
“시술 후에 바로 통화한 거요. 그것도 일부러 화상통화로. 언제 그런 걸 준비했어요?”
“당연하지. 그래야 뭐라도 뜯어낼 거 아냐. 저 사람 돈 많아. 그 덕에 대학을 공짜로 짓게 생겼잖아.”
“와, 진짜 돈 뜯어내는 데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거 같아요.”
“걱정 마. 네 돈은 안 받으니까.”
“줄 생각도 없거든요.”
엘리자베스가 흥칫뿡을 재준에게 날릴 때.
벌컥.
펠그리니와 박혁이 들어왔다.
“도날드가 해야 할 최우선 과제가 나왔습니다.”
“러스트 벨트지?”
“어떻게 아셨어요?”
“신문 보고.”
“또, 또.”
인제 그만 써먹어야 하나.
근데 마땅한 핑계가 없는데.
러스트 벨트의 러스트는 녹슬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녹이 슨 벨트, 오대호 인근 제조업 공업지대로 지금은 폭망한 지역을 가리킨다.
펜실베이니아, 오하이오, 미시간, 위스콘신, 일리노이, 인디애나, 웨스트버지니아, 업스테이트 뉴욕이 이 지역이다.
“보스, 근데 머신러닝의 강화학습 결과가 이상해요. 저로서는 이해하기 힘든데. 왜 러스트 벨트죠? 여긴 백인 중산층이 기득권 세력이라 민주당 텃밭인데.”
“그렇지. 그래서 공화당이란 이미지보단 도날드란 이미지가 먹힌다고 생각하는데. 아냐?”
“그런가요?”
“디트로이트 자동차 산업이 연비 문제로 독일과 일본 자동차에 넘어갔잖아. 러스트 벨트에 실업자가 넘쳐나고 생활고에 시달리기 시작했지. 그리고 2008년 모기지 사태로 거의 핵폭탄이 떨어진 정도의 경제 위기가 닥쳤는데 지금 대통령이 한국과 FTA를 덜컥 체결하네. 금융위기로 ‘타도 월가’를 외쳐서 지금의 대통령을 만들어 줬더니, 제조업 강국인 한국과 FTA? 민주당이라면 이를 박박 가는 사람들이 넘쳐날 거야.”
“그건 좀 의외인데요.”
“왜?”
“FTA로 직장을 잃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취업에 도움이 되는 TAA(Trade Adjustment Assistance)도 민주당이 통과시켰고, 자동차 산업의 260만 명 일자리도 지켰잖아요. 그럼 현 정부를 지지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래, 맞는 말인데. 지금 몇 년도야?”
“2015년이요?”
“모기지론 사태는?”
“2008년이요.”
“햇수로 8년이네. 8년. 8년 동안 굶주리며 산 사람이 저런 거 한다고 기분이 풀렸을까? 아마 그 전부터 악감정을 가졌는데 금융위기로 잠시 민주당을 지지한 것뿐이야.”
“도날드도 월가 사람 아닌가요? 월가에 도날드 빌딩도 있는데.”
“그게 재밌는 거지. 공화당은 원래 FTA, 자유 무역을 지지하잖아. 근데 도날드 혼자 FTA 반대하고 보호 무역한다고 떠들고 다녀. 그뿐이야? 보호 무역 문제로 민주당 버니와 손도 잡았어. 이러니 도날드는 공화당도 아니고 민주당도 아닌 아웃사이더로 취급받는 거지.”
“그렇군요.”
“근데 재밌는 건 인공지능이 이걸 알아차렸다는 거잖아.”
“그러네요. 강화학습이 생각보다 괜찮은데요.”
“지금 인공지능이 알아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있는 거지?”
“네, 성향이 반대인 신문 두 개와 전 세계 주요 신문 기사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가장 궁금한 것을 해야겠네.
“펠그리니는 도날드를 맡고.”
“네.”
“박혁, 네가 알고 트레이더를 맡아 봐.”
“인공지능에게 알고 트레이더의 해결책을 맡기라고요?”
“그렇지. 우리에게 가장 이득이 되는 조치는 무엇일까 강화학습의 내용이 굉장히 궁금하거든.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같은지 알고 싶어.”
“알겠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니 곧 해결책을 알아내겠습니다.”
이거 좋은 무기를 얻었는데.
인공지능이 인간이 생각지도 못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건 맞다.
하지만 모든 일이 가능한 건 아니다.
충분한 데이터가 없으면 불가능하다.
최소한 신문 기사 정도는 있어야 한다.
정보가 전혀 없는 김정은의 다음 행보 같은 걸 알아내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CIA가 북한의 자료를 다 제공하면 모를까.
어쨌든 도날드 선거와 알고 트레이더 공략을 인공지능이 해결한다면 투자에 써먹어도 될 잠재력은 충분하다.
단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정보를 처리해야 하니 비용이 어마어마하게 들겠지만.
그리고 지금 월가는 인공지능을 초단타매매에 국한시켜서 사용하는데 장기투자에도 가능하다면 인덱스 펀드에 이어 히트 상품이 될 것이다.
으라차차.
재준이 기지개를 쫙 켜는데 엘리자베스가 다가왔다.
“전화 왔어요.”
“누구?”
“받아보면 알잖아요.”
재준이 핸드폰을 받아보고 인상을 팍 썼다.
앙겔라 총리다.
제길, 그리스, 날짜가 잡힌 건가?
“네, 임재준입니다.”
-네, 앙겔라입니다.
“설마 그리스 회담 날짜가 잡힌 건가요?”
-네. 맞습니다. 일주일 뒤입니다.
가만, 지금쯤이면 그리스 구제금융을 받느냐 안 받느냐를 놓고 국민 투표를 해야 하는데.
왜 언론에서 가만히 있는 거지?
혹시 구제금융 투표 안 하는 거야?
***
러시아.
푸챠르는 새로운 비서실장 세르게이에게 보고를 받고 있었다.
“북한과 자율주행 문제는 순조롭게 되고 있나?”
“네, 일단 블라디보스톡까지 1차 지역으로 선정했습니다. 그 지역 주민들을 전부 이주시키고 있습니다.”
“사할린 석유와 가스는 북으로 이동 중이고.”
“이번 자율주행이 시작하면 블라디보스톡에서 투마로우 시티까지 운송 차량을 시범 운행한다고 합니다.”
“이제 화물운송도 자율주행으로 해 보겠다는 거네.”
“네, 데이터가 꽤 정밀한 부분까지 쌓이게 될 겁니다.”
“전기차 부분은 어때? 우리도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지금은 너무 늦은 감이 있습니다. 서둘기보다는 좀 더 시간을 두고 완벽하게 준비하는 게 나을 겁니다.”
“그래, 세르게이. 그게 너의 장점이지. 마카르 그놈은 너무 서둘렀어. 좀 더 지켜봤어야 했는데.”
흐음.
푸챠르는 애써 한숨을 삼켰다.
“월가를 점령하는 건 잘 진행되고 있나?”
“걱정 마십시오. 저희 자금이 들어간 이상 둘 다 발을 빼지 못할 겁니다.”
“그렇겠지. 지금 계획을 철회하기에는 정치 생명이 걸린 일이니까. 제이콥은 어때?”
“지금 요양 중이라 합니다. 아마 정계 진출은 당분간 어려울 것 같습니다. 임재준이 설친다면 평생 못할 수도 있고요.”
“그래, 그놈도 마찬가지야. 한심한 놈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일 봐.”
세르게이는 꾸벅 고개를 절도 있게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탕.
문이 닫히고 뒤를 돌아보았다.
세르게이 악노프.
우크라이나 러시아 통합당의 당수이며 크림반도 자치 정부의 수장.
크림반도를 러시아가 차지하고 자신은 그 지역의 수장이 되었다.
좀 과장되게 말한다면 크림반도를 통치하는 대통령이었다.
제기랄, 거기서 나대다 병신이 될 게 뭐야.
멍청한 마카르.
이제 고생 끝 행복 시작인 순간에 푸챠르의 부름을 받았다.
공석인 비서실장 자리를 당분간 맡아 줘야겠다는 것.
비서실장이 되고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월가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었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투마로우와 대척 관계를 만드는 것이다.
빌어먹을 미국 놈들.
돈을 그렇게 처발랐는데도 뭐하나 깔끔하게 끝내지 못하고 뭐 하는 거야?
세르게이는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웬일이야. 이 새벽에.
“거긴 새벽이지만 여긴 아직 저녁이야.”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냐고? 전화할 정도로 급한 일인가?
“나도 보고를 해야 하니까 전화한 거야. 네놈의 목소리가 그리운 게 아니라고.”
-어련히 알아서 잘하려고.
“그래, 잘하는 일은 시작은 했고?”
-이제 공사가 진행될 거야. 걱정 마.
“투마로우의 반응은 어때?”
-그쪽은 요즘 대선에서 도날드를 밀고 있느라 정신이 없지. 우리 일에 신경 쓸 틈은 없을 거야.
“도날드…….”
-또 왜?
“아니야. 그럼 다시 연락할게.”
세르게이는 핸드폰을 끊고 골똘히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도날드, 도날드 트롤링이라…….
이자가 대통령이 되면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가 될 텐데.
확실히 세르게이는 마카르보다는 치밀한 면이 있었다.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띠리리링.
“난데, SVR과 GRU가 힐러리 메일 해킹할 수 있겠어?”
SVR은 해외 첩보들 담당하는 러시아 첩보기관.
GRU는 군사정보기관인 첩보부대.
세르게이는 두 군데에 동시에 지시를 내려 성공 확률을 높이고 첩보기관들의 경쟁을 불러일으킬 속셈이었다.
-두 군데 다 지시하겠습니다.
“그리고 임재준 메일도 해킹하고.”
-실장님. 임재준은 불가능합니다.
“왜?”
-잘못 건드리면 폭탄이 고스란히 저희 쪽으로 전달됩니다. 거긴 펠그리니가 있어서 위험합니다. 그리고 며칠 전 박혁도 AAG 빌딩으로 들어가는 걸 목격했다고 하고요.“
박혁?
이건 또 무슨 일이지?
“알았어. 임재준은 보류하고 힐러리에 집중해. 추가로 캠브릿지 애널리티카에 연락해서 여론을 조작하라고 해.”
-네.
애널리티카는 딥러닝과 인공지능을 사용하여 언론을 조작하는 단체.
세르게이는 자신이 우크라이나에서 크림반도를 자치구로 만들 때 사용했던 모든 방법을 총동원했다.
하지만.
하필 이 시점에 박혁이 임재준 옆에 붙어 있을 건 뭐야?
어째 기분이 싸해지는데.
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그리스 구제금융을 못 받게 하고 러시아 대출을 받게끔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