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5화 하늘이 스스로 돕는 것 같지, 전혀(7)
켁켁.
“그게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이유는 무슨 이유. 감옥에 가서 콩밥 좀 먹으면 그 이유가 싹 사라질 거다. 이 유아 납치범아.”
켁켁.
“정말입니다. 이 목 좀. 우리도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협박?”
“네.”
“네. 정말입니다.”
셀레나가 재준의 팔을 붙잡으며 사정하는 눈빛으로 말했다.
그래?
재준은 레이의 멱살을 놓으며 괜스레 미안한지 주름을 잘 펴주었다.
“누가 협박을 했단 말이죠?”
“임모탈입니다.”
“임모탈? 불로장생 기업이잖아요. 거기서 아기를 달라고 하던가요?”
“그게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지만 아기는 감금되고 실험체가 될 가능성이 컸죠. 임모탈과 저희는 실험 목적이 달랐어요. 우리가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킨다면 임모탈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거니까요. 임모탈은 아기의 성장에는 관심이 없었어요. 오직 유전자 배열과 후유증에 관한 관심뿐이었어요.”
“거절하면 되잖아요.”
“그랬어요. 그런데 어느 날 뱅가모 사장이 임모탈과 연구를 합동으로 진행한다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의 비밀도 알고 있더라고요. 바보같이, CCTV로 전부 찍힌 걸 우리만 몰랐던 거죠.”
“음. 그래서 자료를 넘기고 해외로 도망간 거예요?”
“저흰 독일로 가서 아기를 키우려고 했어요. 그쪽에 아기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도움을 줄 지인들이 많거든요. 사실 아직 아기 상태를 몰라요. 혹시 부작용이 있을지도 모르고. 정말 완벽한 인간으로 자란다면…….”
셀레나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그리고 입술을 꽉 깨물며 자신이 상상하는 것이 무엇인지 표정으로 보여주었다.
재준은 결심한 듯 말했다.
“그래도 독일은 안 돼요.”
“왜죠?”
“셀레나 당신이 생각하는 게 뭔지 알아요. 만약 완벽한 인간이 태어났다면 육체적으로 완벽하고 머리도 똑똑하겠죠.”
“네. 그럴 겁니다. 하지만.”
“이 아기, 감정도 통제 가능하죠. 맞나요?”
“아……. 네?”
“그게 가장 무서운 일이죠. 사이코패스도 될 수 있고 친근한 옆집 아이도 될 수 있으니까요. 울고 싶을 때 웃고, 웃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인간. 너무 감성적인가. 그럼 죽이고 싶을 때 죽이는 데 거리낌이 없는 거. 맞죠?”
후.
레이와 셀레나는 재준의 말을 인정한다는 듯 길게 숨을 내뱉었다.
“그래서 이 아이는 내가 항상 볼 수 있는 곳에 있어야 해요. 투마로우 시티로 갑시다.”
“거긴 임모탈이 있어요.”
“그게 뭐. 이제 모두 다 아는 사실이 되었는데. 감히 임모탈이 이 아기에게 접근할 수 있다고요? 그런 일이 벌어지면 임모탈은 연구 자료 다 빼앗기고 투마로우 시티에서 쫓겨나게 될 거예요. 뱅가모의 연구가 임모탈에 꼭 필요한 연구도 아닌데, 임모탈이 그런 모험을 할 정도로 무모하지 않아요.”
“그렇다면 안심이네요.”
“그리고 이 아이를 어디서 교육시킬 건데요? 일반 학교? 아님 영재 스쿨? 전 세계 0.1% 천재들이 모인 그런 곳? 어떤 곳에서 이 아이를 가르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리고 이 아이가 어떻게 태어났는지 알게 되면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자연스럽지 않아요. 그래서 이 아이는 투마로우 시티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모든 걸 자유롭게 익히는 게 좋아요.”
“아, 미처 그건 생각 못 했습니다.”
“그럼, 떠날 준비를 해야죠?”
저, 근데.
레이가 우물쭈물 입에서 맴도는 말을 되씹고 있었다.
“왜요? 뭐 할 말 있으면 하세요. 편하게.”
“저, 그러니까. 이 아이의 부모는 임재준과 엘리자베스잖아요. 그래서 말인데 두 분이 혼인 신고를 해야…….”
이 사람이.
이번에 레이의 멱살을 잡은 건 엘리자베스였다.
“죽고 싶어요?”
“켁켁,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럼 실험을 말았어야지. 어디다 슬쩍 책임을 떠넘기려고.”
“켁켁, 책임을 떠넘기는 게 아니라, 출생신고를 하려면 부모가 있어야 하니까.”
그러네.
엘리자베스는 멱살을 놓고 재준을 바라봤다.
“아저씨. 꼭 결혼을 하지 않아도 부모란에 이름은 적을 수 있지 않나요?”
“그게 말이 되니. 불가능하지.”
“그럼 결혼하잔 말이에요?”
“그게 말이 되니. 불가능하지.”
“그럼 아기를 방치하잔 말이에요?”
“그게 말이 되니. 불가능하지.”
“그럼 아무 생각이 없는 거예요?”
“그게 말이 되니. 불가능하지.”
“뭐야? 지금 녹음기 틀어 놓은 거예요?”
“그게 말이 되니. 불가능하지.”
“어쩌잔 말이에요?”
에이, 정말, 말하고 싶지 않은데.
“애초에 레이와 셀레나는 계획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사실 동물 실험처럼은 아니더라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 우리 아기. 실험대상자야. 어떻게 커 가는지 지켜봐야 한다고. 그건 나와 너로서는 부족해. 그리고 아이가 머리가 엄청 좋다며. 그럼 커 가면서 질문도 할 거야. 뭐, 내가 아는 가장 어려운 질문 중 하나인, 가상의 인플라톤 급팽창이 어느 지점에서 일어났다면, 양자역학적 변동으로 인한 팽창으로 자발적으로 발생했으며, 매우 먼 장소에서는 지금도 계속 진행하고 있는가? 너라면 뭐라고 답을 해 줄래?”
“뭐, 가상 뭐요?”
“뭐야 너 천재라며?”
“저 문학 전공인데요. 그것도 고전 소설.”
근데 왜 투자은행 일을 배우고 싶어 하는데?
“암튼 아이의 부모는 우리가 아니라 레이와 셀레나가 되어야 해.”
“뭔가 아쉬운 것 같은데.”
“아쉽긴 뭐가 아쉬워. 네 배 아파서 낳은 아기도 아닌데.”
“그렇긴 한데.”
“우린 저 아이를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어.”
맞다. 뭘 했다고 아이의 부모를 자처할 수 있을까?
난 앞으로 저 아이의 앞에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저 미국에 있는 삼촌 정도가 어울리겠지.
잘 자라다오.
뭘 하든 뒤에서 밀어 주마.
***
재준과 엘리자베스, 마가리따는 레이와 셀레나를 위해 밖으로 나왔다.
밖에 천 실장이 말끔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테론이 뭔가 한 아름(거의 컨테이너 수준인데) 필요한 물품을 가져다 놓았다.
재준이 테론을 보며 말했다.
“맥주 있어?”
“그럼요.”
말이 끝나자 어디선가 끙 소리를 내며 오크통 하나를 들고 와 야외 탁자에 올려놓았다.
“이게 뭐야?”
“맥주요.”
“이게 맥주야?”
“독일은 베럴 숙성 맥주를 팔더라고요. 그래서 오크통 통째로 사 왔어요. 어디 보자.”
테론은 어디서 잘도 준비했는데 오크통 마개를 뽑고 수도꼭지를 달았다.
“이렇게 먹으라고 주더라고요.”
“아, 그래. 어디 맛이나 볼까?”
오랜만에 야외에서 맥주를 마시게 되었다.
건배.
꿀꺽, 꿀꺽, 꿀꺽.
오우, 이거 맛이……. 죽인다.
바닐라와 초콜릿, 참나무의 강렬한 향, 한입 넘겼을 때 입안을 가득 채우는 풍성한 묵직함, 알코올 도수 10도의 알싸함까지.
“와, 이거 장난 아니다.”
엘리자베스도 맛에 깜짝 놀랐다.
테론까지 술을 마시고 있지만 유일하게 술을 입에 안 대는 사람은 천 실장뿐이었다.
테론이 맥주 한잔을 따라 천 실장에게 건넸다.
역시 천 실장은 단호히 거절했다.
“거, 사람. 정말 융통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다니까.”
“근데 천 실장님, 진짜 유람선 위에서 17대 1로 싸우셨어요?”
엘리자베스가 궁금한 듯 물었다.
피식.
천 실장은 입꼬리를 올릴 뿐 말을 아꼈다.
“아유, 말도 마세요.”
결국, 테론이 헬기에서 본 장면에 몸서리를 쳤다.
“제이콥은 한쪽 눈에 총구가 박혀 있었고, 러시아 놈 하나는 앞니가 다 털린 데다 울대도 나갔는지 목을 부여잡은 채로 피를 토하고 있더라고요.”
뭐?
재준이 천 실장을 ‘왜 그랬어?’라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총을 겨눴습니다.”
“그래서 총구를 눈에 박아 넣었다고?”
“…….”
천 실장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또 테론이 나섰다.
“아마 죽진 않겠지만 한쪽 눈은 잃었다고 봐야죠. 러시아 놈은 이제부터 말을 못하지 싶고요. 그밖에 자잘한 놈들은 바닥에 수도 없이 널브러져 있던데.”
“저와 직원이 같이 한 일입니다.”
천 실장은 직원을 챙겼다.
재준은 제이콥을 생각하자 대통령의 얼굴이 겹쳐 떠올랐다.
어차피 버리는 카드였겠지.
그때 테론이 궁금한 표정으로 마가리따를 바라봤다.
“근데, 마가리따, 프랑스에선 왜 그렇게 난리를 치고 돌아다니신 거예요?”
“난리?”
호호호호.
엘리자베스도 민망한 듯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게, 은밀히 움직이면 꼭 무슨 일을 하려고 온 사람 같잖아요. 그래서 요란 좀 떨었어요. 그리고 그래야 저를 아는 분들이 찾아오니까. 거기서 정보를 좀 얻을 목적도 있고.”
까르르르르.
엘리자베스가 프랑스 일을 떠올리며 환하게 웃었다.
“저희 돈 엄청 썼어요.”
“그래서 비용 처리 해 달라는 거야?”
“당연하죠. 우리가 거의 다 한 건데.”
“그래, 비용 올리면 처리해 줄게.”
까르르르르르. 뚝.
“근데 아저씨, 우리 핑계 대고 독일에서 무슨 일 벌였죠? 아무리 생각해도…….”
주변을 죽 둘러봤다.
평범한 가옥은 아니었다.
“정부가 운영하는 곳 같은데.”
“와, 귀신이네. 독일 정부 도움을 좀 받았지.”
흥.
“그냥 도와줄 리는 없고. 또 누굴 괴롭힌 겁니까. 앙겔라 총리? 아니면 비서실장 레오니?”
“이야, 너도 꽤 아는구나. 앙겔라 총리야 유명하지만 레오니는 잘 모를 법도 한데.”
“말 돌리지 말고 똑바로 말하세요.”
“꼭 취조하듯이 물어보네.”
“‘하듯이’가 아니라 취조하는 거예요. 누굴 괴롭혔죠? 이건 저도 알아야 대비를 할 수 있어요.”
“아니, 네가 꼭 대비를 안 해도 될 것 같은데.”
“빨리요.”
음.
“도이츠방크와 코베르방크 합병을 도와줬어.”
“흥, 그리고요. 그건 너무 약해요.”
“그냥 합병하면 1년간 회장 자리에 앉기로 했고.”
“독일 1, 2위 은행을 합병하고 그 회장 자리에 앉는다고요?”
“원래 합병하면 세력이 생기고 서로 싸우고 골치 아프잖아. 내가 좀 조율도 하고 기틀도 마련해 주고 하는 거지.”
“협박했군요.”
“아니라니까. 민주적인 절차에 의해 순리대로 한 거야.”
“믿을 수 없어.”
아니, 얘는 뭐든 안 믿어.
그나저나 일 다 끝났는데 이 사람들, 아직 독일에 도착도 안 한 거야?
이때.
띠리리링.
“워서스틴, 어디야?”
-이제 독일에 도착했습니다.
“다른 사람은?”
-거의 도착했을 겁니다. 그런데 어디로 갑니까?
“그냥 투마로우 시티로 가.”
-네?
“일 다 끝났어. 그러게 모두 올 필요 없다니까.”
-아, 네. 죄송합니다.
“아, 워서스틴은 독일에 좀 남아. 도이츠방크와 코베르방크 합병시켜야 해.”
-벌써 협상이 끝난 겁니까?
“응, 마지막 조율만 남았으니 윌켄이랑 조율하면 돼.”
-박민수와 강호석이 없어도 할 수 있을까요?
“그러게,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변호사 도움 좀 받지 뭐.”
-네, 알겠습니다.
뚝.
그런데. 미심쩍다.
재준은 핸드폰을 들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전화해야 하는데.
뭐라고 하지?
급한데 빨리 오라고?
너무 많이 써먹은 수법인데.
다 죽어간다고 할까?
아니야, 그냥 죽으라고 할 거야.
이때,
띠리리링.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이게 웬 떡이지?
“네, 박민수 팀장님.”
-네, 지금 강호석 이사님이랑 방금 독일에 도착했습니다. 모두 안전한 겁니까? 아기는 잘 있는 겁니까?
“이런, 큰일 났네. 큰일 났어. 지금 빨리 코베르방크로 오세요. 아, 정말 어떡하지. 안 돼.”
-뭡니까? 누가 다친 겁니까?
“코베르방크 행장실에서 총격전이 나고. 아, 말로 다 할 수 없어요. 빨리 오세요. 코베르방크 행장실입니다. 코베르방크.”
-네. 당장 가겠습니다.
뚝.
온다.
그럼, 난 윌켄에게 떠넘기고 튄다.
“윌켄, 워서스틴이 도착했대요. 지금 당장 코베르방크로 가세요. 지금 당장.”
“아, 네.”
뚝.
난 몰라. 이제 북한으로 튈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