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4화 하늘이 스스로 돕는 것 같지, 전혀(6)
재준의 말에 뭐라 대꾸를 하지 못한 뭘러 행장은 할 말이 입에서 맴돌았다.
“그건.”
“됐어요, 각설하고. 벌금 언제까지 낼 겁니까? 대충 봐도 200억 달러는 될 거 같은데. 빨리빨리 해결해야죠. 그게 다 리스크가 되어서 월가가 뻗어 나가지 못하고 있잖아요. 기본으로 돌아가세요. 기본으로.”
“그건 투마로우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또 남의 일처럼 이야기하시네. 그럼 이번에 당신들이 발행한 우발전화사채 이자는 제때 줄 수 있어요?”
“그건.”
“뭔 할 말이 없으면 그건, 그건, 하면서 얼버무리는 겁니까?”
우발전환사채(Contingent Convertible Bond).
일명 CoCo본드라고 한다.
전환사채와 아주 비슷한 개념으로 원금 상환이 어려울 경우 채권을 주식을 전환할 수 있다.
전환사채와 차이는 주식 전환 시기를 은행이 결정할 수 있다는 것과 회계상 부채가 아니라 자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 정도.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은행 건전성을 위해 만들어졌다.
보통 회사채보다는 위험성이 있어 이자가 높다.
도이츠방크는 벌금 부과를 위해서 CoCo본드를 대량으로 발행했고 투마로우도 일정 부분 투자했다.
“본질을 망각하면 순식간에 사기 집단이 되는 거예요. 그 대표적인 예가 여기 있네. 도이츠방크. 지금도 이자 상환 날짜가 다가오니까 무슨 핑계를 대고 빠져나갈까? 하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하잖아요.”
“이번엔 이자를 지불할 수 있을 겁니다.”
“뭐야, ‘있을 겁니다’라니. 확신이 없잖아요. 또 채권 발행해서? 그럼 내가 채권 발행을 방해하면 어쩔 겁니까?”
“뭐라고요? 그러면.”
“할 게 없죠? 그럼, CoCo본드를 주식으로 전환해 주세요. 나도 이 기회에 도이츠방크 주주가 되어 보지 뭐. 첫 번째 할 일은 알죠. 우리 뮐러 행장님 여생을 아주 편안하게 해 드리는 건데.”
여생을 편안하게라니.
내가 일궈 놓은 게 얼만데.
뮐러는 만약 추가 채권 발행이 막히면 어떻게 할까 생각해 봤다.
자산을 매각하면 되지.
“혹시 월가에 있는 자산 매각을 생각하는 건 아니죠?”
뭐야? 이놈.
그걸 어떻게 알고.
“그 쓰레기 살 사람 아무도 없어요. 월가가 무슨 재활용 센터도 아니고 뻑 하면 부실 은행 처리해 달라고 징징거리는데. 이번엔 매각이 아니라 공중 분해해 버릴 거예요. 그래야 여러 군데서 주워서 쓸 정도는 되니까.”
“뭐라고요? 말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심해? 이봐요. 행장님. 다른 은행들과 도이츠방크가 다른 점이 뭔지 아세요? 왜 리보사태가 일어날 때 도이츠방크만 벌금이 다른 곳보다 다섯 배나 많은지 아냐고요.”
“그건.”
“모르나 보네. 당신들은 죄를 지어 놓고 그게 죄인지 모르는 거예요. 지금도 모르죠? 자기가 뭘 잘못했는지. 다른 곳도 다 하는데 왜 우리만 뭐라 하는지. 그러니까 총리님한테도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따지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쓰레기는 어디 재활용도 힘들어요. 왜? 또 지랄 맞은 짓을 벌일 거거든. 또 다른 피해를 만들 거거든. 그럼 또 살려줄 거 알고 버틸 거거든. 도이츠방크가 파산하면 이 많은 사람들이 직장을 잃는다. 그러니 살려라. 뭐 이런 마인드잖아요.”
뭘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여기서 한마디 잘못하면 은행이 통째로 날아갈지도 몰랐다.
“하여튼 은행이 돈을 만지는데도 돈에 대한 책임이 없어요. 책임이. 그러게 상업은행 하면서 이자 놀이나 할 것이지, 할 줄도 모르는 투자은행은 왜 한다고 나서서 이 사달을 만든 거예요.”
이건 도이츠방크 문제만이 아니었다.
2000년부터 시작된 월가 투자은행의 횡보에 세계은행들은 너도나도 투자은행을 세웠다.
일본도 그래서 말아먹었지만, 투자은행을 상업은행 정도로 생각하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상업은행이 동네 고스톱판이라면 투자은행은 카지노 블랙잭과 같다.
돈의 단위가 다르며 돈을 다 잃으면 불쌍하다고 잃은 돈 돌려주는 그런 곳이 아니다.
항상 돈을 일부라도 돌려받았던 상업은행은 동네만 생각하고 카지노에 들어서서 ‘내가 말이야. 우리 동네에서 좀 하거든?’ 하면서 어깨에 힘 좀 주었다.
하지만 은행 경영에 실패했다면 사지가 뜯겨서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걸 인지했어야 했다.
거기다 도이츠방크는 동네 생각하고 밑장 빼기도 좀 하고 탄도 만들어 사용하다 정말 된통 걸렸다.
“이제 자신이 무얼 잘못했는지 인지가 좀 돼요? 설마 아직도 모르는 건 아니죠? 머리가 스펀지로 이루어진 게 아닌 다음에야 설마.”
“…….”
꿀꺽.
이 마른침 넘기는 소리는 앙겔라 총리가 낸 소리였다.
와, 내가 다 속이 시원하네.
어떻게 욕인 듯 아닌 듯 상대를 바보 병신으로 만들 수 있을까.
나도 저것 좀 배우고 싶다.
재준이 빙글 웃으며 총리를 바라보는데.
띠링.
재준의 핸드폰에 문자 하나가 도착했다.
[목표 인원 모두 무사히 구출. 독일로 가는 중]
뭐야? 독일의 도움을 받으려고 했는데, 벌써 끝난 거야?
그럼 독일은 도대체 왜 온 거야? 참나.
안 돼. 그냥 이대로 갈 수는 없어. 뭐라도 건져 가야지.
재준이 슐레만 행장을 향해 고개를 휙 돌렸다.
딸꾹.
재준의 매서운 눈매에 슐레만 행장이 자신도 모르게 단발성 딸꾹질을 했다.
“그리고 코베르방크 슐레만 행장님.”
“얘기 들었습니다. 우리 본사 빌딩 매각할 겁니다. 그리고 아시아 판매 부분도 가져가세요. 저희는 전혀 미련이 없습니다.”
옆에서 욕을 들어먹는 뮐러 행장을 보고는 재준에게 재빠르게 항복을 선언했다.
“거, 행장님은 뭘 좀 아시네.”
“그럼요. 방만하게 운영하다 보니 부실 채권을 너무 매입했습니다. 빨리 자산을 매각해서 건실한 은행으로 거듭나고 싶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뮐러 행장님은 좀 보고 배우세요. 할 줄 아는 거라곤 남 속이고 버티는 거밖에 없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후, 그만하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세요.”
“음, 이제야 합병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할 자세가 되셨네요.”
합병?
뮐러 행장이 놀란 눈으로 재준을 바라봤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아니, 합병이라니요. 그건 이미 확인했지만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거, 서로 욕심을 부리고 논의를 하니까 합병이 무산된 거 아닙니까? 확실하게 분야를 나눠야지요.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고. 도이츠방크는 상업은행으로 코베르방크는 투자은행으로 방향을 딱 잡고. 투마로우처럼 말이에요. 그리고 이름은 뭐 도이츠코베르방크로 할거죠?”
“네?”
“그리고 각자 은행의 행장 자리에서 열심히 하면 되겠네.”
각자 은행을 맡아서 열심히 한다고?
“그래도 통합 회장은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래야 하나로 통합된 의미가 있을 거니까. 앞으로 1년간 회장이 될 만한 분을 모시기 전까지 내가 임시회장으로 있을 겁니다.”
“네? 임시회장?”
“뭘 그렇게 놀라세요. 월가에 버피 헤서웨이도 급하게 합병하면 버피가 직접 임시회장으로 정리를 하던데. 혹시 저 말고 더 좋은 분을 추천하시면 바로 넘겨드리고요. 총리님 어떠세요?”
앙겔라는 이게 지금 왜 이렇게 진행이 됐는지 모르겠단 표정이었다.
하지만 임재준이 1년간 임시회장으로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두 행장이 꼼짝 못 하고 일만 하게 될 테니까.
상황을 봐서 통합 회장은 둘이 번갈아 하면 되는 것이고.
“나쁘지 않네요.”
“그렇죠. 아유. 이러면 정리가 깔끔하게 되었네요.”
“그러네요. 역시.”
‘투마로우 임재준이네’라는 말은 잇지 않았다.
아무리 자신의 속을 썩여도 두 행장의 체면은 자신이 챙겨줘야 하니까.
암튼 우리 친하게 지냅시다.
앞으로 속 썩이는 놈 있으면 임재준에게 부탁해야겠네.
어, 가만 그리스 문제도 좀 풀어 달라고 할까.
대충 은행 합병에 대한 초안은 두 행장이 짜도록 하고 재준과 앙겔라 총리는 밖으로 나왔다.
“저기, 임재준 오너.”
“네, 총리님.”
“문제 하나만 더 해결해 주면 안 될까?”
“뭔데요? 말씀해 보세요.”
“그리스.”
“아, 그리스요?”
“네, 제가 대표로 나서기는 하지만 프랑스도 반대하고 스페인도 나 몰라라 하고 여간 고민이 아닙니다.”
그래, 이제 이거 해결할 때가 되었지.
차르라스, 이 사람도 답답할 거야.
해결은 하고 싶은데 주변을 보니 자기 뜻대로 할 수가 없지.
그리스 경제 위기와 독일을 말해주는 유명한 대사가 있다.
2011년 23:59 독일 총리: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2012년 23:59 독일 총리: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2013년 23:59 독일 총리: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2014년 23:59 독일 총리: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2015년 23:59 독일 총리: 이번이 마지막 기회입니다.
불쌍한 앙겔라 총리.
이번에 내가 이 족쇄를 풀어 줘야지.
큭큭, 하긴 이거 내가 만들긴 했지만.
앙겔라 총리는 회상에 잠겨 웃고 있는 재준에게 조심스럽게 다그쳤다.
“적극적으로 생각해 주실 거죠?”
“그럼요. 이제 총리님도 맘고생 그만하셔야죠. 구제금융 협상 날짜가 언제인지만 알려주십시오. 내 가서 차르라스 그 인간의 면상에 쌍욕을 퍼부어 주겠습니다.”
“아, 그렇게만 된다면.”
벌써 속이 뻥 뚫린 느낌이다.
제발, 그놈의 눈물이 쏙 빠지는 표정을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당장 총리를 그만둬도 한이 없겠다.
“알겠습니다. 협상 날짜가 결정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네.”
재준과 앙겔라 총리가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하하하하하하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은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
독일 안전가옥.
엘리자베스가 새근새근 자는 아기를 보고,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다, 또 아기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데.
“아기 얼굴 닳겠다.”
마가리따가 곰곰하는 엘리자베스를 보며 핀잔을 주었다.
“아줌마, 아니, 언니. 나랑 닮았어요? 아닌데.”
“으이그, 볼살이 빠져야 제 얼굴을 찾지. 지금은 잘 몰라.”
“아, 볼살. 그래도 이 눈은 꼭 아저씨 눈 같지 않아요? 꼭 나를 노려보는 것 같은데.”
“엘리자베스. 아기 자고 있거든.”
“아, 자고 있구나. 그러네.”
엘리자베스는 객쩍게 입맛을 다시며 아기에게서 떨어졌다.
그런 엘리자베스를 레이와 셀레나는 미안한 듯 눈치를 살폈다.
이때,
벌컥.
재준이 들어오더니 두리번거리며 아기를 찾았다.
후다닥.
“음, 하나도 안 닮았는데.”
“으이그, 아저씨도 참, 볼살이 빠져야 제 얼굴을 찾지.”
“볼살? 그래서 안 닮은 건가?”
“당연하죠. 무식하긴.”
절레절레.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마가리따는 둘의 한심함에 고개를 저었다.
재준은 다음으로 레이와 셀레나에게 다가갔다.
“뭐, 태어나면서 엄청난 능력 같은 거 없었나요? 눈에서 레이저가 나간다거나 한 번 울면 집이 통째로 날아간다거나, 뭐, 그런 능력.”
“네? 그런 능력은 유전자로 만들 수 없습니다.”
“아, 아쉽.”
재준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아쉬움을 보였다.
레이가 조심스럽게 재준에게 말했다.
“저, 왜 저희에게 뭐라 안 하십니까?”
재준이 레이를 쳐다보며 미간을 찡그렸다.
음.
“사실, 위험하긴 했어요. 그리고 아기가 죽을 수도 있었고요. 그 점은…….”
재준이 갑자기 뭔가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치는 걸 느껴서 말을 멈췄다.
이어.
“야, 가만히 생각하니 열받네. 내 아기잖아. 나한테 말도 없이 내 아이를 빼돌려? 이 나쁜 유아 납치범 같으니라고.”
재준이 레이의 멱살을 움켜쥐고 눈을 부라렸다.
말려!
엘리자베스와 마가리따, 셀레나가 재준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