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1화 하늘이 스스로 돕는 것 같지, 전혀(3)
“맞아요. 그리고 Sales & Trading의 아시아 부분을 인수하고.”
“아시아 부분이라면 현재증권이 매입하면 되겠군요.”
“그렇죠. 중국과 한국을 중심으로 아시아 DCM(부채자본시장) 시장 강화도 되고. 코베르방크는 원하는 가격에 자산을 팔아 위기에서 벗어나는 거죠.”
“원하는 가격보다 비싸게 사 준다면 독일 정부에 원하는 것이 있습니까?”
“그야 뭐, 레이와 셀레나의 안전이죠.”
윌켄은 이해는 하면서도 재준의 태도가 뭔가 불안했다.
저런 식으로 과연 둘의 안전이 보장될까?
미국이 알고 있는 걸 러시아나 일본은 모를까?
여기서 전화 몇 통화로 해결하기에는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은 것 같은데.
그리고 슈퍼 아기가 안전하다는 게 어떤 수준의 안전을 말하는 것일까?
아니야 직접적인 보호막이 필요해.
“보스,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할 것 같은데요.”
“아니야, 나머진 여기 남아 있어요. 조만간 중국 위안화 절하로 시장이 시끌시끌할 테니까.”
나머진?
그럼 누군가는 가는 거고?
“보스가 직접 갈 겁니까?”
“당연히 가야죠. 내 아기라는데.”
“혼자요?”
“아니. 블랙워터 몇 명이랑 가려고요.”
“그게 혼자 가는 거죠.”
“안 됩니다. 내가 같이 가야겠어요.”
벌떡.
“나도 가야겠어요. 도무지 보스 혼자서는 못 보내요. 또 전쟁을 일으킬 게 뻔해요.”
워서스틴이 나섰다.
“맞아. 저번에 혼자 보냈더니 러시아하고 중국 부채질해서 전쟁 일으켰어. 자칫 핵이라도 쐈으면 어쩔 뻔했어요?”
페렐라가 워서스틴 옆으로 가서 어깨에 손을 얹으며 재준은 노려봤다.
“그거면 다행이죠. 보스는 죽을 뻔했다니까요. 누군가 옆에서 최소한 몸이라도 던져 줘야 해요.”
퀴니코가 페렐라 옆에 섰다.
“퀴니코, 너 그럴 용기 없잖아.”
블록이 퀴니코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나섰다.
“난 보스를 위해선……. 흡.”
“뭐야 방금 웃은 거 아냐?”
“아니거든.”
“근데 왜 웃고 있어.”
펠그리니가 은근슬쩍 동행했다.
윌켄이 머리를 쥐고 흔들었다.
아이고 이 머리 아픈 인간들.
하긴 여기서 가슴 졸이느니 옆에서 잔소리라도 하는 게 속은 편하지.
그래도.
“은행 두 개 합병하는 데 뭐 대단한 일이라고 다들 우르르 몰려가려는 거야.”
그럼 윌켄이 안 가면 되잖아요.
대단한 일이거든요.
보스를 위하는 사람 맞아요.
저마다 자신의 의지를 깎아내리는 윌켄을 향해 한마디씩 했다.
조용.
재준이 손을 들어 모두를 주목시켰다.
“알았어. 같이 갑시다. 근데 이렇게 우르르 독일로 몰려가면 언론의 이목이 집중될 텐데. 그러면 자칫 레이와 셀레나, 엘리자베스와 마가리따가 위험할 수 있습니다.”
갑자기 진지하게 말하는 재준의 톤에 모두 ‘아’ 하고 놀라면서도 ‘음’ 하고 인정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행선지를 유럽으로 잡고 각 나라의 투마로우 은행에 들렀다가 독일에서 모이는 거로 합시다.”
음.
역시.
뻔하지만 연막을 쳐놓는 게 좋지.
이렇게 모두 독일을 향했다.
***
리히텐슈타인 어느 작은 도시의 작은 병원.
으앙, 으앙.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수고했어.”
레이는 셀레나의 손을 꼭 잡았다.
아기가 울음을 뚝 그치고 잘 보이지 않는 눈으로 레이와 셀레나를 보려고 애를 썼다.
“어머, 애가 울지를 않아요.”
***
독일 분데스칸츨러암트.
독일 총리 앙겔라 넬레는 누군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지 총리실을 왔다 갔다 했다.
“지금 몇 분이야?”
“거의 다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몇 분 남았는지 정확히 이야기해봐.”
까탈스러운 앙겔라 총리의 말에 비서실장 레오니가 시계를 다시 쳐다봤다.
“1분 남았습니다. 정문을 통과했다고 했으니 거의 다다를 시간입니다.”
“그래. 알았어.”
재무부에서 임재준이 독일로 온다는 연락을 전했다.
평소라면 재무부에서 알아서 처리하라고 하겠지만 지금은 그리스가 또 국민투표를 하네 마네 하면서 전 유럽은 거의 전시 상황과 다르지 않을 정도로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똑똑.
비서실장의 말이 끝나자마자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재준과 윌켄이 들어섰다.
“어서 오세요.”
앙겔라 총리는 자신이 총리라는 신분도 잊은 채 급하게 달려가 재준에게 악수를 청했다.
“오시느라 고생했습니다.”
“편하게 왔습니다. 유럽이 워낙 교통이 좋으니까요.”
“다행이군요. 자, 앉으세요.”
자리에 앉자 레오니가 차를 한 잔씩 따라 주었다.
마음이 급한지 엥겔라가 재준에게 먼저 말했다.
“도이츠방크와 코베르방크를 합병하도록 도와주신다고 했는데 맞습니까?”
“네, 독일의 위기를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어서요.”
금융위기 이후 도이츠방크는 투자은행을 무식하게 키웠다.
정확히 외부에서 인재를 끌어와 서로 경쟁을 시켰다.
그러다 보니 온갖 불법적 행위가 난무하고 이게 다 들통이 나면서 천문학적인 벌금을 물면서 휘청거리는데 그리스와 유럽 몇 나라의 유동성 위기로 이제 호흡기만 떼면 염을 해야 할 판이었다.
독일 정부가 겨우 호흡기를 부착해 주고 있는데 합병하라 했더니 말은 또 안 들어 처먹었다.
“어떻게 합병이 진행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합병은 간단합니다. 일단 코베르방크를 건전한 투자은행으로 만들고. 도이츠방크는 건전한 상업은행으로 만들어 둘을 합병하면 건실한 하나의 은행이 탄생합니다.”
“공적 자금 투입이 필요 없습니까?”
“전혀요.”
“그럼 부실한 부분을 전부 매각해야 하는데. 그 부분을 투마로우가 인수하는 겁니까?”
앙겔라의 눈에 안타까움이 남아 있었다.
그래도 독일 자산인데.
하지만 재준은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도이츠방크의 부실한 투자은행 부분을 코베르방크가 인수하는 겁니다. 그 자금은 코베르방크 빌딩과 아시아 투자 부분을 매각해서 마련하면 되고요. 저희는 빌딩과 아시아 부분만 인수하겠습니다. 월가에 있는 도이츠방크는 코베르방크가 여전히 운영하면 됩니다.”
“아, 그런 방법이 있군요.”
“하지만 코베르방크가 매각해야 할 자산으로는 도이츠방크 투자은행 부분을 인수하기에 자금이 모자랄 겁니다.”
앙겔라 총리가 레오니 비서실장에게 시선을 보내자 레오니가 그렇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 모자란 부분은 정부가 보조해야 합니까?”
다소 목소리 톤이 올라갔다.
가뜩이나 그리스 문제로 골머리를 앓다가 이탈리아와 스페인까지 말썽이라 정부 보조 부분이 거슬렸다.
재준은 아니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총리님, 그럴 거면 제가 왜 왔겠습니까? 아무 곳에나 팔아도 되는데.”
“아, 그래요?”
“그럼요. 투마로우는 도이츠방크 투자은행을 코베르방크가 인수하기에 충분한 금액을 드리려고 합니다. 시장 가격보다 웃돈을 얹어 주고요.”
“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안심되는군요.”
후.
앙겔라가 긴 숨을 내쉬었다.
요즘 툭하면 여기저기서 돈을 빌려 달라는 통에 잠을 제대로 이룬 적이 손에 꼽았는데 오늘 하루는 단잠을 잘 수 있겠구나 생각했다.
“총리님. 하나만 약속해 주시면 됩니다.”
“약속? 뭐죠?”
“이제부터 은행장은 독일인으로 세우십시오. 지금 벌어진 일들은 다 월가에서 CEO를 데려와서 생긴 문제입니다.”
그럼 독일 은행에 월가 CEO가 말이 돼?
독일은 독일답게 모험보다는 안정을 추구해야지.
월가처럼 도 아니면 모 식의 은행 경영은 적성에 안 맞는다니까.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재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왜 또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한 가지 부탁을 드리려고 합니다.”
“말씀하십시오. 가능하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흠.
재준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차라리 사실을 알리는 게 낫다.
괜히 허튼 수법을 썼다가는 오히려 된통 얻어맞을 수 있다.
그래도 독일인데.
“독일로 제 아기가 들어올지도 모릅니다.”
“네?”
급하게 레오니가 다가와 앙겔라에게 무언가 속닥였다.
임재준의 유전자를 변형해서 만들어진 수정란이 존재합니다.
“아, 알아. 나도 들은 적이 있어.”
앙겔라가 재준을 보며 두 눈을 이글이글 불태웠다.
“그 아이 우리가 지켜 드리겠습니다. 전 출입국 사무소에 연락해서 독일로 들어오는 즉시 안전하게 데려오겠습니다.”
역시 독일은 공사 구분이 빠르네.
“그럼 감사하겠습니다. 그런데.”
“왜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까? 저희는 치사하게 유전자 기술을 탈취하거나 하는 그런 유사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그게 아닙니다. 당연히 독일은 한 번 정한 맘은 바꾸지 않는다는 걸 잘 압니다.”
“네. 맞습니다.”
“그보다는 제 아이를 쫓는 조직이 몇 개가 있다고 합니다. 워낙 악명 높은 놈들이라, 제 아기에게 폭력을 행사할 시에 이를 방어하려다 보면 독일이 국제적인 문제에 휘말릴 수도 있습니다.”
“뭐요? 폭력? 그런 나쁜 놈들. 아직 아기인데.”
역시 냉혈한이라 불리는 앙겔라 총리지만 그래도 엄마였다.
“레오니, 도이체스헤어에 연락해서 출입국 사무소를 경계하도록 하세요.”
도이체스헤어? 육군을?
“저 총리님. 국제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니까요.”
“상관없습니다. 그 어떤 명분을 들이대도 독일 안에서 아기를 탈취하거나 죽이는 행위는 절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아, 네.”
너무 단호해서 무섭기까지 하네.
“그럼, 저도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무슨 부탁?
재준이 골똘히 생각해 봤지만, 앙겔라가 자신한테 부탁할 일이 있나 싶었다.
없는데.
돈을 빌려달라는 건 웃기고.
“네, 말씀하십시오. 저도 가능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도이츠방크와 코베르방크 은행장을 한번 만나 주십시오.”
왜요?
“만나서. 아주 야단을 좀 쳐 주세요.”
“야단? 아이가 잘못하면 엄마가 아이 엉덩이를 때리면서 하는 그 야단이요?”
“맞아요. 그 두 놈의 엉덩이를 흠씬 두들겨 패 주세요.”
“아니 왜요?”
“도무지 말을 들어먹질 않아요.”
아, 이해했다.
왜 나를 이렇게 반갑게 맞이했는지.
두 은행장이 앙겔라 말을 안 들었구나.
“얼마나 강력한 거로 해 드릴까요?”
“몇 단계가 있습니까?”
“간단하게 1단계는 상대가 기분 나쁜 정도, 2단계는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 정도, 3단계는 눈물 콧물을 흘리는 정도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럼 3단계로 해주세요.”
이거 농담도 못 알아먹네.
큰일이다.
지금까지 협박 중 가장 강력한 협박을 하라는 말인데.
“알겠습니다. 그럼, 협상 테이블을 만들어 주십시오.”
“좋아요. 나도 그 자리에 참석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당연히 속이 뻥 뚫리는 경험을 하셔야지요.”
“알겠습니다. 당장 은행장을 소집하겠습니다.”
“네.”
윌켄은 재준의 대화를 들으면서 참담한 심정을 가눌 길이 없었다.
아니, 무슨 총리가 저런 걸 부탁을 다 해.
그리고 보스는 무슨 3단계.
그런 게 어딨습니까.
이거 아무래도 도이츠방크와 코베르방크 행장을 위해 준비할 게 많겠는데.
우선 멀미약부터.
심폐 소생기도 준비할까?
설마 장의사…… 아니, 이건 너무 나갔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