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8화 거 내 흉내 내니까 그렇게 되잖아(10)
AAG 빌딩 66층.
재준이 팀원들과 앞으로 할 일을 점검하는데.
삐.
“네.”
-대통령 비서실장님이 오셨습니다.
“올라오라고 하세요.”
팀원들은 ‘올 것이 왔구나’하는 표정으로 아래층으로 이동했다.
잠시 후.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제이콥이 씩씩대며 재준에게 다가왔다.
재준은 ‘앉아’라는 손짓을 하고 소파에 앉았다.
“아니, 이 먼 곳까지 어쩐 일이에요.”
“임재준, 도대체 왜 그런 짓을 한 겁니까? 월가 전체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걸 모르는 겁니까? 어떻게 할 겁니까?”
아, 네가 아니라 월가!
“이야, 월가를 다 걱정해주는 거예요? 그러게 거, 코안 회장은 쓸데없이 법정에서 왜 그런 소리를 해서. 쯧쯧. 이렇게 월가를 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코안 회장처럼 자기 잇속만 챙기는 사람이 있는 게 참. 고생이 많죠. 제가 술이라도 한잔 드릴까?”
“임재준. 남 핑계 대지 말아요. 왜 내부자 거래를 전부 들춘 겁니까?”
“아니, 정의를 위해서 여기 비서실장님이 동분서주하는데 내가 도와는 드려야죠. 월가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게 난데.”
“뭐요? 도와?”
“그럼요, 도와야죠.”
“도와주는 게 이겁니까?”
“그거야 서로 대화가 없었으니 내 방식대로 한 건데. 맘에 안 들어요?”
“그걸 말이라고.”
“어째, 이제라도 우리 대화를 해 볼까요?”
“좋습니다. 대화, 어디 한번 해 봅시다.”
“오케이.”
짝.
재준이 손뼉을 쳤다.
“자, 근데 비서실장님 명심하세요. 나는 오늘 비서실장님에게 들어야 할 얘기가 굉장히 많고 원하는 대답이 안 나오면 한 번 더 큰 폭탄을 투하할 거예요. 자꾸 폭탄이 터지면 왜 자꾸 투마로우가 월가에 폭탄을 터뜨리는지 민주당 상하원의원들이 굉장히 궁금해하지 않겠어요? 파고 파고 파고들다 보면 비서실장님이 아주 큰 일을 했다는 걸 알게 될 텐데. 거기다 현재 정황만으로도 당신은 유죄예요.”
허, 협박을.
하긴 임재준의 특기니까.
그런데.
“안타깝군요. 복수하려면 그냥 나한테 하세요. 자꾸 일을 벌이면 죽는 수가 있습니다.”
“우와 이제 내 목숨까지 걱정해야 할 정도예요? 몰랐네. 그러는 비서실장님은 왜 가만있는 사람을 들쑤셔서 영혼까지 탈탈 털릴 위기를 자초하는 거예요? 그것도 자주 하면 죽어요.”
이, 이 인간이 정말.
“당신은 좀 자중해야 해. 당신 때문에 나라가 몇 번이나 고초를 겪었는지 알아? 그리고 우리가 어려울 때 당신은 방관했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나서는 거라고.”
재준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초? 방관? 뭔가 안 어울리는 말인데. 암튼, 왜? 딴 사람 당할 때는 아무렇지 않다가 당신이 당해 보니까 피눈물이 나? 응? 딱 이랬을 거야. 그동안 당신한테 당한 사람들이. 안 그래요?”
“언제까지 이럴 겁니까?”
“우리 비서실장님이 나한테 빌 때까지. 근데 지금이라도 잘못했다고 말하고 싶은데 말은 못 하겠죠. 왜 그럴까요?”
“뭐라고요?”
“그건 아마, 당신이 멍청해서?”
“말이라고 다 뱉진 마세요. 정말 다칩니다.”
할 말이 ‘죽인다’, ‘다친다’밖에 없나.
“근데 그 누굴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힘. 그거 당신이 가지고 있는 거 아니잖아요. 당신 뒤에 있는 분이 힘이 있는 거지. 당신은 그거 믿고 설치는 거고.”
“정말…….”
“당신과 FBI 국장, 그리고 SAK 코안 회장이 짜고 벌인 일. 이거 당신 뒤에 있는 분이 다 알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사람 없습니다.”
“정말? 우리가 아는 그분이 없다고요?”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대통령이 모르고 있나?”
제이콥의 눈에 힘이 팍 들어갔다.
“임재준, 헛소리는 그쯤 해 둬.”
재준이 눈살을 찌푸렸다.
“헛소리 아닌데, 음, 이건 알아요? 대통령이라면 국가의 최상위에 속하는 사람이잖아요. 그런데 이번 대통령에게는 약점이란 게 있어요. 바로 사람이 없다는 거. 조금 더러워도 자신이 시키는 일이면 눈 감고 귀 막고 도와야지 하던 당신 같은 사람을 곁에 뒀더니. 이게 주인만 안 물었지 동네방네 돌아다니며 아무나 물어뜯고 있잖아. 근데 시간이 지나니까. 이 개의 행실이 주인 발목을 잡는 거예요.”
제이콥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재준이 그렇게 숨을 계속 쉬라는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근데 이상한 게 있어요. 비서질장이 이런 더러운 짓거리를 했는데 대통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잖아요. 혹시 이런 생각해 봤어요? 당신이 그러기를 바랬기 때문이란 생각.”
“뭐요?”
“안 해 봤구나. 앞뒤 안 가리고 날뛰는 투마로우를 제지하지 않은 이유도 비슷한데. 우리 치밀한 대통령이라면 처음에 당신이 FBI와 손을 잡고 투마로우를 치는 걸 알았을 때 말렸어야 했는데. 전혀 말릴 생각을 안 하잖아요. 그리고 이번에 코안을 만난 걸 과연 대통령이 몰랐을까요?”
내가 코안을 만난 걸 알고 있다?
“임재준, 지금 이걸 협박이라고 하는 건가? 대통령이 나를 치려고 투마로우를 이용했다는 말이야?”
큭큭큭.
“그건 당신 맘대로 생각해도 돼요. 난 있을 법한 추론을 말한 거니까. 비서실장이란 사람이 20년 넘게 대통령 신발 끈 묶어 준 놈이면 조심해야겠죠. 아마 대통령 자신이 모르는 것도 알 텐데. 대통령은 언제든 엿 먹일 준비를 끝냈을 거예요. 어떠세요. 아직도 대통령을 내 사람이다 믿고 계세요? 그 알량한 충성 몇 번 한 거 가지고?”
하하하하.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제이콥은 웃어 제꼈다.
“그래서 뭘 어쩌자고?”
“당신이 여기서 살아 나갈 방법은 딱 두 가집니다.”
비서실장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재준은 그를 보며 양쪽 입꼬리를 한껏 올렸다.
“살려 달라고 빌든가, 아니면 아직 남은 대통령의 패를 까든가.”
이때.
띠리리링.
“대통령이네요.”
재준이 제이콥에게 말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임재준입니다.”
-주위에 누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혼자입니다. 말씀하십시오.”
그렇게 말하곤 재준은 스피커폰으로 전환해서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제이콥을 향해 빙글 웃었다.
자, 똑바로 들어 봐.
-어려운 일 있으면 도와 주려고 전화했습니다. 이번에 일이 꽤 크게 번지는 것 같던데.
“지금은 너무 잘 돼서 걱정입니다. 말만이라도 감사합니다.”
-임재준이 원래 과격해서 걱정했는데 오늘 영상을 보니 처리가 매끄럽더군요. 놀랐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대통령님, 왜 화내지 않으세요. 뭐 제 의도는 아니었지만, 비서실이 꽤 시끄럽게 된 것도 사실인데요.”
-음, 그건 그냥. 임재준의 반작용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그렇지 않습니까. 칼을 들고 덤비는데 순순히 맞을 사람은 없으니까요.
“그렇죠. 하지만 대통령의 사람인데 괜찮으세요?”
-그러잖아도 자책하고 있습니다.
“이런, 근데 너무 자책 마세요. 무능한 사람의 몫을 이고 가는 것도 못 할 짓이에요.”
-하하하, 당신은 무능한 팀원이 없어 부럽습니다.
“하하하, 이거 부끄럽네요. 대통령님의 부러움을 받게 되다니.”
-부러운 건 부러운 거니까요. 그보다 정말 필요한 일이 있으면 말해 주세요.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힘을 보태겠습니다. 사실 월가가 흔들리면 미국이 흔들리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뚝.
재준은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제이콥에게 미소를 지었다.
“봐요. 당신이 생각하는 거랑 완전 틀리잖아. 비서실장이란 자리는 대체할 사람이 많아요. 하지만 대통령은 대체할 사람이……. 아니구나. 대체할 상황이 만들어져야 가능하네. 어떻게, 그런 상황을 만들어 볼 생각 있어요?”
“미친.”
재준은 일어났다.
“술 한잔 필요할 것 같은데.”
술이 진열되어있는 바로 발걸음을 옮겼다.
쫄쫄쫄.
고요한 66층에 술 따르는 소리만 울렸다.
재준이 위스키 두 잔을 가져왔다.
“자, 한잔하세요. 이제부터 할 이야기가 많은데.”
“난 더는 할 말이 없습니다.”
“일주일 전이었던가. 그날이었죠. 당신 운명이 엇갈린 게. 대통령 비서실장은 SAK 코안 회장을 설득합니다. 재판에서 이기고 싶으면 내 손을 잡으라고. 그 후 코안과 기타 등등은 움직입니다. 검사들을 하나둘 만나서 돈을 듬뿍 안겨주고 SAK의 변호를 맡아 달라고. 비서실장이 뒷배를 담당하니 이번 재판만 잘 마무리하면 SAK 전담 법무팀을 만들겠다. 평생 놀고먹을 돈은 보장한다. 당연히 혹할 만한 돈을 제시합니다. 근데 문제가 생기네요. 막판에 재판 결과가 뒤바뀔 줄이야.”
끙.
제이콥의 신음소리가 거칠게 튀어나왔다.
재준은 제이콥의 표정이 재밌다는 듯 이야기를 이어갔다.
“계속 궁금했어요. 코안 회장이야 죄를 덮으려고 그런다 쳐도 대통령은 왜 또 이번 싸움에 끼어들었을까? 대통령을 그만둬도 갈 곳이야 널리고 널린 사람이. 뺏기지도 않는 그 자리를 지키겠다고 끝까지 싸운다는 게 급도 안 되는 당신 같은 조무래기들을 위한 것이었을까? 이상하죠? 그딴 건 서로 있어 뵈지도 않는데.”
“수작이나 부릴 생각만 하니까 그딴 질문이나 하는 겁니다. 우린 권력 아니면 돈밖에 없다고 생각하니까.”
“아니라고요? 그럼 또 뭐가 또 있어요?”
“우린 가족입니다.”
큭.
“아, 미안.”
제이콥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수십 년 동안 바치고 이루어 낸 가족. 뒤에서 한눈팔지언정 위에서 죽으라고 하면 죽는 게 우리 조직이라 엿 같아도 따르는 거고, 어떻게든 여길 지키려고 하는 건 우리가 가족이기 때문이다. 당신 같은 사람은 모르겠지.”
“그런가?”
재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그래도 자기 가족 지키겠다고 남의 가족 몰살시킨 건 알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 이유로 투마로우를 떠올린 겁니까? 아, 그런 거구나. FBI까지 동원했고, 근데 아무 실적이 없었고.”
제이콥은 애써 거만한 표정으로 재준을 바라봤다.
“그런데 이를 어째, 대통령에게 무언가는 보여줘야 하는데 자꾸 꼬이네. 거기다 임재준이 FBI를 꼬드겨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미네.”
“그건 내 실수였어. 당신 말을 믿지 말아야 했는데.”
“맞아요. 그리고 큰 실수를 해 버렸어요.”
재준은 핸드폰을 들어 버튼을 눌렀다.
-아니요. FBI 국장을 말하는 겁니다.
-재판에 한 번 졌다고 국장이 어떻게 되지는 않겠지요.
-아무렇지 않다면 제가 회장님에게 제안을 했겠습니까?
-그런 겁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재판을 이길 것이고 FBI 국장은 다른 이로 교체될 겁니다.
-혹시 윗선에서 이야기가 된 것입니까?
-그거야 물론 제가 말하기 나름이죠. 하지만 이길 때도 질 때도 제거될 당사자는 정해져 있습니다.
-그렇군요.
제이콥이 코안과 나눈 대화였다.
제이콥의 호흡이 일순 멈췄다.
도청을?
“들었죠. 윗선이라고 분명히 당신이 말하던데. 이것만 가지고도 대통령이 이번 사건에 개입했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이런 미친놈.
“개소리. 음성이야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어.”
“그래? 그럼 이거 언론에 뿌려도 되죠?”
“정말 당신은 구제불능이야.”
“그러니까 당신 죄는 여기까지만 가져가. 노력하면 덮을 수 있는 수준으로. 왜 남의 죄까지 덮어쓰려고 해.”
“그건.”
“자, 하루 드리겠습니다. 내 앞에 당신이 가지고 있는 대통령의 패를 가져오세요.”
“그런 건 없어.”
“에이, 그렇게 인생을 올바르게 살았다고? 그런 사람이 이런 일을 벌이고 그래요? 대통령이 언제 내 목을 날릴지 모르는데 그걸 대비할 나만의 카드가 없단 말이에요?”
“없어. 그런 거.”
“그럼 혼자 뒈지세요. 이 파일은 내일 아침 언론에 뿌려질 테니. 대통령이 당장 당신의 목을 날려 버리겠네. 댕강.”
제이콥은 재준을 바라보며 이빨을 꽈득 깨물었다.
“대통령은 없어. 하지만 다른 사람 건 있지.”
“이야, 진짜 가족인가 보네. 끝까지 보호하는 거 보니. 좋아요. 그럼 다른 사람 걸로 퉁칩시다.”
“나중에 연락하죠.”
제이콥은 더는 자리를 지킬 수 없었는지 급하게 일어나 나갔다.
재준은 나가는 모습을 안쓰럽게 지켜봤다.
거, 내 흉내 내니까 그렇게 되잖아.
독창성이 없어. 독창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