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7화 거 내 흉내 내니까 그렇게 되잖아(9)
뉴욕주 법원.
여러 대의 카메라가 재판 과정을 중계하고 있었다.
미국은 재판 중계를 허용하는 대표적인 나라이다.
무려 1976년부터 TV 중계를 허가했다.
한국 같으면 ‘어, 저러다 판사 테러당하는 거 아냐?’라고 할 테지만.
민사, 형사 사건 모두 일반 시민으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판결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배심재판제를 채택하고 있어 중계를 해도 판사의 부담이 적었다.
카메라가 비어있는 판사석을 비추고 방청객을 한 번 훑었다.
방청객에는 재준과 팀원들, 그리고 재준의 법무팀이 자리했다.
그리고 오른쪽 방청객 앞자리에 의외로 제이콥이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고 왼쪽 방청객 앞에는 루이스가 옆 사람과 뭐라고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앞 좌석이지만 멀찍이 떨어진 곳에 코안과 마틴도 있었다.
아주 밝은 표정으로 보아 이번 재판에 자신이 있어 보였다.
피고석에는 SAK 직원인 피고와 변호사 세 명이 보였고 반대편 검사측에는 검사 셋이 서로 무언가 속닥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준은 윌켄에게 SAK와 FBI의 형사 재판에 자신이 증인으로 출석한다고 대대적으로 언론에 홍보했다.
그저 그렇게 지나갈 재판에 월가와 투마로우를 알고 있는 이들이 TV 앞에 모였다.
재판 시작 전 워서스틴과 퀴니코가 재준에게 다가왔다.
이 과격 주의자와 의심쟁이의 두 눈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보스, 왜 증인으로 채택되신 겁니까?”
“얼마 전 끝난 내부자 거래에서 내가 승소했잖아. 그러니까 증인을 서 달라고 하더라고.”
거짓말이다.
재준은 루이스를 협박해서 자신이 꼭 검사 측 증인석으로 나가겠다고 우겼다.
검사 측은 전부 반대했지만, 루이스가 반대를 무산시켰다.
“근데 왜 검사 측 증인을 섭니까? 피고 측에 서야 맞는 거 아닙니까?”
“피고 측이 나한테 감정이 안 좋으니까. 검사 측에 선 거잖아.”
“검사 측은 좋고요? 안 좋아할 텐데.”
“그렇겠지. 둘 다 싫어하긴 해.”
“그런데 왜 자발적으로 증인으로 나선 겁니까?”
“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거거든.”
결정적인 역할?
검사 측에 유리하면 보스가 불리해지는 거 아냐?
이러다 대법원까지 갈 수도 있는데.
“정말, 오늘 들었던 말 중에 가장 믿음이 안 가는 말입니다.”
“퀴니코, 너 요즘 무조건 내 말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어.”
“평범하게 진행된 사건이 없으니까 그렇죠. 또 무슨 대형사고를 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아니, 사건인데 어떻게 평범하게 진행돼. 되려 그게 이상한 거 아냐?”
“사건은 평범하지 않죠. 보스가 끼어들면 핵폭탄급으로 변해서 주변이 초토화되니까 그런 거죠.”
“아니야, 오늘은 조용히 대답만 하고 내려올 거야. 근데 카메라가 왜 이렇게 없어? 내가 나온다는데.”
“이거 봐, 이거 봐. 또 방송을 걱정하는 거 보니 뭔가 꿍꿍이가 있어.”
“아니라니까. 나도 정치나 해 볼까 하고 카메라를 찾은 거라고.”
풉.
결국, 워서스틴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아, 비웃은 거 절대 아닙니다.”
“비웃었잖아. 정치라니까 비웃었지.”
“아닙니다. 절대 상상한 거 아닙니다.”
상상했다.
국회 단상에 올라 메가폰을 잡는 보스의 모습을.
재준은 아직 웃고 있는 워서스틴을 보았다.
빠직.
워서스틴, 너 정말.
“재판이 시작됩니다.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 주십시오.”
재판이 시작되었다.
이런저런 절차 뒤에 개정 진술이 시작되었다.
역시 SAK측 변호사가 압도적인 말빨로 개정 진술을 시작하더니 삽시간에 배심원을 휘어잡았다.
검사도 만만치 않았지만, 워낙 변호사가 셌다.
판세는 점점 SAK로 흘러가는 듯했다.
드디어 재준의 이름이 호명되었다.
“임재준 증인, 증인석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선서, 어쩌고저쩌고.
재준이 증인석에 앉자 검사가 먼저 나와 질문을 했다.
“임재준 씨, 얼마 전 재판에서 승소하셨죠.”
“네.”
“어떤 재판이었습니까?”
“내부 제보자에 대한 재판이었습니다.”
“그 재판에서 임재준 씨는 내부 거래는 했지만, 금전적인 보답을 보내지 않아 무죄 승소를 받으셨죠.”
“네.”
“만약 금전적인 보답을 했다면 승소할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돈과 정보를 주고받으면 범죄라고 하더군요.”
“감사합니다. 이상입니다.”
변호사 증인 심문하세요.
변호사가 재준 앞으로 나와 손바닥을 탁탁 두드렸다.
“임재준 씨. 투자은행을 운영하고 계신 거 맞죠?”
“네.”
“그럼 정보에 대한 중요성이 크겠군요? 맞습니까?”
“네.”
“주로 공시를 통해 정보를 입수하십니까?”
“지금 유도신문 하는 겁니까? 누가 공시를 통해 정보를 얻습니까? 개미도 아니고 투자은행이.”
“그럼 아니란 말씀입니까? 그럼 어디서 정보를 얻습니까?”
“신문이요.”
풉! 쿡쿡쿡.
욱! 억억억.
잘 웃지 않던 윌켄이 웃음을 참자 다른 팀원들도 입을 주먹으로 틀어막았다.
거기 방청객 조용히 해 주세요.
변호사 계속하세요.
“방금 신문이라고 말씀해 주셨는데 주로 어떤 신문에서 정보를 얻는 편입니까?”
“신문이 신문이지 어떤 신문이 어딨습니까?”
“아, 네. 그럼 다양한 신문을 읽고 계시는군요.”
“네.”
“그 외 정보를 얻는 수단으로 뭐가 있습니까? 사람을 통해 얻지는 않습니까?”
“당연히 사람을 통해 얻죠.”
“그럼, 당연히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하시는 편인가요?”
“네.”
“임재준 씨와 같은 방법으로 정보를 얻어 투자하는 것이 월가에 관습처럼 번져 있습니까?”
“네.”
“그런데 정보를 사람에게서 얻을 때 기업이 발표하기 전에 얻는 수도 있습니까?”
“아니, 그걸 말이라고. 당연히 발표 전에 얻어야 매도를 할지 매수를 할지 결정을 하죠. 거, GPR라고 전문가 네트워크 기업도 있잖아요. 그런 기업이 왜 50억 달러를 벌었겠어요. 모두 다 그런 데서 기업 발표 전에 정보를 얻으려니까 그렇죠. 그쪽이 꽤 신빙성도 있고.”
“그러니까, 월가 모두가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한단 말이죠.”
“그렇다니까 그러네요.”
“그럼 임재준 씨도 그렇게 정보를 얻어서 어제 무죄가 되신 거고요.”
“아니요. 난 주식거래를 안 해요. 그래서 무죄가 된 것 같은데.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잠깐만요, 이게 지난 임재준 씨 재판 판결문입니다. 이 판결문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변호사는 판사에게 판결문을 제시했다.
인정합니다.
“분명 내부자 거래로 인한 판결로 보이지 않습니까?”
“그렇게 보이네요.”
“그럼 임재준 씨는 내부자 거래를 했습니까?”
“안 했는데요.”
“그럼, 이 판결문은 무엇입니까?”
“전문가의 조언을 받아 투자했는데 내부자라고 보기가 모호해서.”
“혹시 조언을 받은 사람을 밝혀 주실 수 있겠습니까?”
“뭐, 말 못 할 것도 없지만, 실명을 밝히기가 뭐한데.”
“그럼 직책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뭐 그 정도야. 대통령이요. 각 나라의 대통령.”
네?
대통령?
대통령이 전문가냐?
풉, 웁웁웁.
켁, 컥컥컥.
드디어 윌켄은 웃음을 참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는데 옆을 보니 나머진 입을 막는 게 아닌 목을 조르며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고 있었다.
후, 후.
변호사는 자꾸 이야기가 산으로 가는 듯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자.
“일반 기업의 전문가는 없었습니까?”
“거 말 돌리는 것 같은데. 혹시 GPR 같은 전문가 네트워크 기업을 말하는 거 아네요?”
“아, 네 맞습니다. 이들의 정보가 월가에 관습처럼 굳어진 것 아닙니까?”
“네. 난 아니지만, 그 사기꾼들의 말을 듣는다고 하더군요.”
사기꾼?
빨리 끝내야겠다.
말려들고 있다.
하지만 재준은 끝낼 맘이 없었다.
“아닌가? 변호사 표정을 보니 굉장히 당황한 것 같은데 혹시 코안 회장이 GPR이 사기꾼이 아니라 전문가를 연결해 준다고 하던가요?”
“아닙니다. 사기꾼 맞습니다.”
오히려 잘 됐다.
전문가가 아니라 사기꾼이라면 의뢰인은 무죄다.
“그래요? 그럼 코안 회장은 GPR에게 거의 60억 달러를 매년 지불했잖아요. 이런, 사기당한 거네. 사기당했어.”
웅성웅성.
뭐라고 이야기가 왜 저렇게 흘러가는 거야?
촤르르르르르.
방청객들 사이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리고 카메라 돌아가는 소리가 거세어졌다.
지금까지 예비용으로 설치된 카메라도 돌아가기 시작했다.
변호사는 뒷머리에서 한줄기 땀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다.
Fuck, 당했다.
일부러 코안 회장의 이름을 거론해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다.
GPR가 사기를 친 게 아니라면 코안 회장은 범죄자가 되는 것이고 GPR가 사기를 친 거라면 코안 회장은 세상에 둘도 없는 멍청이가 되는 것이다.
“GPR는 사기 집단도 아니고 SAK는 월가에서 행해지는 관습을 따른 겁니다.”
“그래요?”
“그렇습니다.”
변호사는 재준의 말에 대답하고 인상을 팍 구겼다.
Get the fuck,
왜 자꾸 대답하는 거야.
정신 차려.
“관습이라면 선처를 바랄 수 있겠네요.”
“그건 임재준 씨가 걱정할 일이 아닙니다.”
“일곱 명이면 너무 적어서 선처가 이루어지는 건가?”
변호사는 대답하지 않고 판사를 향해 돌아섰다.
‘이상입니다’를 외치려는 순간.
재준이 카메라를 향해 섰다.
“거기 GPR에 연결된 사기꾼 아저씨들, 아, 사기꾼이 아니라고 했지. 거기 전문가분들. 관습이라는데. 이 기회에 불안에 떨지 말고 자수하는 게 어때요? 여기 내 전화번호 000-0000-0000인데, 이리로 문자를 보내세요. 내가 잘 전달해 줄 테니.”
재준의 말은 방송을 타고 전국으로 번졌다.
급하게 재준의 전화번호도 화면 하단에 떴다.
전화번호 또 바꾸게 생겼네.
코안 회장은 벌떡 일어났다.
“야, 변호사 뭐 하는 거야? 너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땅땅땅.
판사가 코안에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거기 앉아요. 법정에서 소란을 피우면 퇴장 조치하겠습니다.
변호사가 급하게 판사를 향했다.
“저 이야기는 이번 재판과 상관없는…….”
띠링. 띠링.
간결한 신호음이 재준이 들고 있는 핸드폰에서 울렸다.
변호사의 얼굴이 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늦었다.
재준이 빙글빙글 웃으며 핸드폰을 벨소리가 울릴 때마다 째깍째깍 흔들었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끝도 없이 이어지는 문자 알림 벨이 울렸다.
일순 법정은 고요함 속에 청아한 벨 소리만 가득 찼다.
벌떡.
다시 코안 회장이 일어서서 제이콥을 노려봤다.
“야, 제이콥. 이게 네가 데려온 프로냐?”
코안 회장의 고함이 법정 안에 있는 사람들을 경직되게 했다.
잠시 후 웅성거렸다.
-뭐야? 제이콥이면 대통령 비서실장 아냐?
-어, 맞네. 맞아. 여기 와 있었네.
-근데 SAK랑 짠 거였어?
-어쩐지 요즘 대통령이 삐딱하게 나가더라.
비서실장의 일이 대통령에게까지 번졌다.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띠링.
제이콥의 인상이 심하게 구겨졌다.
저놈의 벨 소리.
그보다 방송을 탔다.
일이 더럽게 됐어.
일단 여길 벗어나자.
제이콥은 코안을 무시하고 뒤를 돌아 법정 밖으로 나갔다.
여기.
재준이 판사를 향해 핸드폰을 흔들었다.
“재판을 연기해야 하지 않을까요? 여기 내부자 거래 증거가 많아도 너무 많은 데. 이건 관습을 벗어난 거 아닌가?”
땅땅땅.
판사가 머리를 잡고 흔들었다.
임재준 증인은 자리로 돌아가세요.
“아, 네.”
재준은 방청객 속으로 돌아가 윌켄 옆에 앉았다.
카메라가 전부 재준에 포커스를 맞춘 방송이 전파를 탔다.
“보스, 나가야 할 것 같은데요.”
“즐겨. 방송에 언제 또 나와 보려고.”
매일 나오거든요.
뉴스만 틀면 나와요.
아주 지겹다고요.
그러거나 말거나 재준은 카메라를 보고 브이를 만들었다.
체통을 좀 지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