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0화 거 내 흉내 내니까 그렇게 되잖아(2)
AAG 빌딩 66층.
“어서 와요. 제이크.”
SEC 회장 제이크가 오랜만에 재준을 찾아왔다.
“내일부터 못 만날 것 같아서 왔습니다.”
“큭큭, 드디어 SEC가 투마로우를 겨냥하는 겁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신고가 들어왔으니 조사하는 척은 하는 겁니다.”
“꽤나 윗선인 것 같은데.”
“비서실장이 FBI 국장과 손을 잡고 진행한다고 들었습니다.”
“오우, 이거 꽤 센데요?”
“조심하세요. 장난 아닐 겁니다. 없는 죄도 만들어 내는 게 FBI예요.”
“오랜만에 술이라도 한잔할까요?”
“그러죠.”
“밖으로 나갑시다.”
“괜찮겠어요?”
“그건 내가 아니라 제이크가 걱정해야 할 문제예요. 지금 범죄자와 대동하는 거라고요.”
“아, 그런가요?”
“지하에서 자동차로 이동합시다.”
“그러시죠.”
제이크와 동행하는 사진이라도 찍혀라.
재준은 일부러 제이크와 함께 아지트로 향했다.
***
재준의 아지트.
삐걱.
아지트의 문이 열리고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재준과 제이크에게 쏠렸다.
깜짝 놀란 미키가 뛰어나왔다.
“보스, 예고도 없이.”
“괜찮아. 잠시 SEC 회장과 할 얘기가 있어서.”
재준이 일부러 크게 말하자 SEC 회장이란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반짝였다.
여긴 월가다.
월가의 뱅커들이 SEC를 모르는 건 뉴욕 갱단이 NYPD를 모르는 것과 같았다.
“이쪽으로 오세요.”
미키는 평소답지 않게 많이 안절부절했다.
“아, 미키, 서형길 이사장에게 전화 걸어서 도날드와 같이 있으면 오라고 해줘.”
“네? 아, 네.”
미키가 먼저 문으로 달려가 간판을 Closed로 바꾸고 홀 안의 손님들에게 영업 끝났다고 양해를 구하기 시작했다.
“미키, 괜찮아. 편하게 마시다 가시라 그래. 나 투마로우 임재준이 그렇게 쫀쫀한 인물은 아니야.”
원래 ‘바’란 조명이 어두워서 마주 앉아 있는 사람 외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 SEC 회장이란 말도 놀라운데 투마로우란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까지 생겼다.
임재준이라고?
제이크는 왠지 일부러 자꾸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재준에게 무언가 계획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왜 그러세요? 일부러 자꾸.”
“그래야 빠르게 대통령 귀에 들어갈 거 아닙니까?”
“들어가서 좋을 게 하나도 없잖아요.”
“아니에요. 들어가야 제이크가 삽니다.”
“그래요?”
도통 무슨 말인지 감을 잡지 못하는 제이크였다.
“그나저나, SAK 헤지펀드 아시죠?”
“코안 회장. 잘 알죠. 투마로우 다음으로 가장 투자를 잘하는 투자은행 아닙니까?”
“GPR이라고 전문가 네트워크 기업은 아십니까?”
“네, 압니다.”
“그럼, SAK가 작년 GPR에게 53억 달러를 지불한 것도 알아요?”
헤지펀드가 인맥 관리 기업에 53억 달러나 돈을 지불했다면.
“하하하,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습니다.”
“내가 알기론 여기를 타깃으로 삼아야 할 FBI의 총구가 투마로우를 향했다는 거예요.”
월가의 내부자 거래를 제이크가 모를 리 없었다.
단지 결정적인 증거를 찾지 못해서 지켜만 볼 뿐이었다.
제이크는 재준에게 경고를 해 주려고 왔는데 오히려 정보를 얻어가게 생겼다.
“이미 다 알고 있었군요.”
“전문가 네트워크 기업이라는 게 웃기는 놈들이라 언젠가 이놈들이 헤지펀트와 손을 잡는다면 일이 커질 것 같았어요.”
“그게 SAK 헤지펀드라는 거군요.”
“네.”
“우리가 따로 둘의 관계를 조사해 보겠습니다.”
전문가 네트워크 기업은 미로와 같은 세계를 구축하고 있었다.
투자은행의 스왑 상품과 비슷한 경우가 발생했다.
투자자들은 전문가 네트워크에 돈을 내고 상장회사 직원들을 만나 정보를 들었다.
이러한 전문가 네트워크를 이용하는 것은 헤지펀드 업계에 만연한 행태였다.
일단 한두 펀드가 전문가 네트워크를 활용하면 다른 펀드들도 경쟁사를 따라잡기 위해 똑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전문가 네트워크가 내부정보 거래에 연막을 치고, 트레이더들은 정보를 활용해 다른 투자자들을 희생시켜 막대한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은 월가에서 비밀도 아니었다.
충분한 증거를 수집해야 한다.
SAK는 다른 헤지펀드들에게 강력한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만약 재준의 말이 맞다면 GPR은 가장 질이 나쁜 전문가 네트워크 기업 중 하나였다.
전문가 네트워크 비즈니스는 부패의 온상이며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양질의 정보는 십중팔구 불법 정보였다.
돈에 환장한 헤지펀드 관계자들이 대중에 공개된 정보를 얻으려고 수천 달러씩 내고 컨설턴트를 만나겠는가?
“괜히 나 때문에 고생하는 거 아닌지 모르겠어요.”
“잘 아시네요. 임재준 때문에 SEC 일이 아주 복잡해진 건 맞습니다. 아시죠. 도드프랭크법 때.”
“아, 오랜만에 미안하네요.”
하하하.
1934년 설립 이래 수십 년간 SEC는 월가가 경외하는 공권력으로 SEC 변호사들은 자신의 판단과 정치적 독립성에 자부심을 가졌다.
그러나 최근 수년 사이에 투마로우에 의해 내부 규제가 강화되어 무기력증이 깊이 뿌리내렸다.
이게 다 투마로우가 CFTC를 한 방 먹여 80억 달러의 풋리미티드 하한선을 독자적으로 결정하게 된 결과였다.
이제 SEC 집행국 직원들은 거대사건 조사가 있을 때마다 민주당에게 제지받았고, 소환장 하나 발부하는 데 4단계 승인을 거쳐야 했으며, 그 과정이 수 주일이나 걸리기 일쑤였다.
재준은 미안한 맘에 술을 따라주었다.
이번 일로 자유를 되찾아요.
한창 SAK와 GPR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쾅!
“도련님. 찾으셨습니까?”
재준은 서형길 뒤에 따라 들어오는 도날드를 보며 주위를 향해 크게 소리쳤다.
“아이고, 이게 누구신가? 그 유명한 셀럽 도날드 트롤링 아니신가?”
뭐라고?
사람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갑자기 자신의 이름이 크게 불린 도날드는 어리둥절했고 제이크는 머리를 잡고 절레절레 흔들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빨리 끝냅시다.
이때 뱅커 하나가 도날드에게 다가와서 종이와 펜을 내밀었다.
“팬입니다. 사인 하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그러십니까? 하하하.”
도날드가 기분 좋게 웃으며 사인을 해주었다.
이제 사람들은 이곳에 유명인 셋이 모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문에 나오면 금상첨화겠지만 그럴 리는 없고 소문은 피할 길이 없었다.
셋은 서로 악수를 주고받으며 앉았다.
역시 서형길은 이 이상한 상황을 빠르게 눈치챘다.
“도련님, 지금 이게 무슨 상황입니까?”
“음, 일종의 경고?”
“누구한테요.”
“그야 물론 대통령이죠.”
“아니 왜 대통령에게 경고를 보내는 겁니까?”
재준이 서형길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FBI가 내 뒤를 캐고 있거든요.”
“네? 아니 이놈들이 미쳤나. 감히 도련님 뒤를 캐요?”
“그래서 뭐 나는 이런 놈이라고 선전 중입니다.”
“아, 네.”
서형길은 알 듯 말 듯 하지만 그냥 평상시대로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이해와 행동은 다른 것이니까.
“브라더, 이럴 땐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뭐? 도날드랑 언제 브라더를 먹은 거야?
“음. 강력하게 경고 메시지를 줘야지.”
“어떻게?”
“유아 파이어.”
괜히 불렀나.
이 심각한 상황에서 자신의 유행어를 던지다니.
일단 재준은 제이크와 일차적으로 이야기를 끝냈으니 내부자 거래에 대해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
SEC.
제이크는 자신을 찾아온 FBI 특수수사요원 데이비드와 마주 앉았다.
“FBI가 어쩐 일입니까?”
“소문을 듣자 하니 임재준과 친분이 상당하시던데.”
“그거 알아보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겁니까?”
하하하.
“아닙니다.”
“그럼 SEC와 FBI 수사가 매칭이 안 돼서 온 겁니까?”
“그것도 아닙니다.”
“그럼 뭡니까?”
제이크는 담당 직원도 아닌 회장을 직접 찾아왔다면 제법 큰 사건이라고 직감했는데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니 더욱 데이비드의 방문이 궁금했다.
여기.
작은 USB 하나가 탁자에 놓였다.
“이게 뭡니까?”
“저희 FBI는 SAK에 대한 자료는 폐기하고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말이죠. 대신 투마로우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래도 FBI에 정신이 똑바로 박힌 사람이 있네요.”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FBI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 조사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음, 그러면 원하는 게 뭡니까?”
“보험 하나 들려고 합니다.”
후후.
제이크가 데이비드를 보며 입꼬리를 올리며 담담히 물었다.
“우리 조사에 이름을 올리고 싶은 겁니까?”
“네. 마지막에 합류할 수 있게 해 주시면 됩니다.”
“어려운 일은 아니군요.”
SEC는 준사법기관이라 범인 검거를 위해 FBI와 자주 협력하는 편이었다.
“조사에서 나온 SAK 정보는 지속적으로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이건 우리 측 변호사가 조사한 거로 발표하고 범인 검거에는 그쪽을 지목하겠습니다.”
“네, 그 정도면 됩니다.”
언제든 SEC으로 도망갈 구멍은 만들어 놓았다.
“근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네, 말씀하십시오.”
“임재준을 개인적으로 압니까?”
“아닙니다. 전혀 모릅니다.”
“그럼 왜 여길 온 겁니까?”
후후.
데이비드가 미소를 지으며 콧바람을 쉬었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투마로우니까요. 진짜 두려운 건 FBI 국장 루이스가 아닙니다. 우리도 정보라면 그 어떤 기관에 뒤지지 않습니다. 투마로우, 아니 임재준이 일본과 중국, 북한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언론에 보도 안 된 사실들을 전부 압니다. 아르헨티나는 어떻고요. 사실 저뿐만 아니라 이번 조사에 투입된 동료들도 다들 약간 겁을 먹었습니다. 다만 제가 용기가 좀 더 있었을 뿐이죠.”
“그 용기, 임재준과 내가 술을 먹었단 소문에서 얻은 겁니까?”
후.
“네, 도날드까지 있다는 소리에.”
재밌네. 재밌어.
임재준 이걸 노린 걸까?
***
백악관.
“이게 뭐 하는 거죠?”
대통령은 FBI가 투마로우가 내부자 거래로 소송을 당했다는 신문 기사를 비서실장에게 내밀었다.
“비서실과는 무관한 것입니다.”
“진짜 무관합니까?”
“네, 이건 FBI 단독 행동입니다. 루이스가 예전부터 임재준과 사이가 안 좋았다고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과연 FBI가 단독으로 이번 일을 진행했다고는 보기 힘듭니다.”
“FBI도 뭔가 확실한 증거가 있으니까 움직였을 겁니다.”
“그래요…….”
대통령은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됐고. 투마로우 약점은 찾았습니까?”
“네, 여기. 저도 방금 받아서 확인은 못 했습니다.”
“그래요?”
두툼한 서류가 대통령 손에 쥐어졌다.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어느 순간 대통령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거 뭡니까?”
탁.
서류가 책상에 놓이고 대통령의 손가락은 서류를 가리켰다.
이게 뭐야?
“이건……. 임재준의 유전자와 엘리자베스의 유전자로 만든 수정란에 총 108번에 걸쳐 유전자 가위로 수선을 해서 만들어진 아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이거 임재준이 알고 있습니까?”
“모른다고 적혀 있습니다.”
“수정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연구원의 자궁에 있는데 사라졌다고.”
“어디로?”
“비행기는 프랑스가 마지막이고 그 뒤로 유럽 어딘가로 사라졌습니다.”
가만.
이런 미친놈들을 봤나.
뭐? 108번의 수선?
뭘 어떻게 수선을 했다는 거야.
“찾으세요. 유럽 아니, 전 세계를 뒤져서라도 찾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