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8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12)
일본 총리대신 관저.
코베 총리와 각 부서 장관들과 주요직책 인사들이 모두 모였다.
“아니, 보유 주식을 다 넘기면 어떡합니까?”
코베는 일본연기금 회장에게 잡아먹을 듯이 고함을 질렀다.
“그럼 주식은 계속 떨어지는데 그냥 보고 있으라고요? 지금 손실이 얼마인지 아십니까? 그나마 10% 프리미엄을 준다는데 되도록 손실 폭을 줄여야 하지 않냐고요.”
일본연기금 회장도 지지 않고 목청을 높였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이제 일본 주요 기업 대부분이 투마로우에 넘어갔는데 어쩔 겁니까?”
“그걸 왜 저한테 따지는 겁니까? 애초에 총리가 무능해서 생긴 일인데. 그러게 왜 북한을, 아니, 임재준을 자극해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까? 임재준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럼 북한의 만행을 보고만 있으란 말입니까?”
흥.
일본연금기금 회장이 콧방귀를 끼었다.
“웃기고 있군요. 무슨 북한의 만행입니까? 지금 전 세계가 투마로우에 붙지 못해서 안달이 났는데 누가 누굴 단죄한다고 설친단 말입니까?”
“뭐 설쳐? 이 사람이 말이면 다 해도 되는 줄 알아?”
“이보세요, 총리. 지금 국민이 자민당을 단죄하겠다고 난리입니다. 도대체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는 겁니까? 지금 당신은 끝났어요. 아니 당신 때문에 우리 자민당이 다시 집권하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하는지 모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책임을 져야 할 겁니다.”
놈, 저놈이 저 자리에 앉혀 달라고 살살 길 때는 언제고 지금 나한테 큰소리를 치는 거야.
뭐, 책임!
“내가 이 사태를 해결하면 당신을 제일 먼저 그 자리에서 끌어 내릴 줄 알아.”
흥.
“사태를 해결한다고요? 하하하, 하하하, 정말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어, 아직도. 어디 맘대로 하세요. 난 오늘부로 회장 자리에서 내려오겠습니다.”
“뭐요? 당신 정말…….”
웃긴다. 웃겨.
다시 맡아 달라고 해도 내가 싫다고 할 거다.
일본연금기금 회장은 코베의 말을 더 듣지도 않고 뒤를 돌아 나갔다.
코베는 부들부들 입술을 떨며 ‘쾅’ 하고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빌어먹을 놈들.
“진정하시지요.”
히로키가 코베 옆으로 왔다.
“히로키, 지금 상황이 어때?”
“많이 안 좋은 건 사실입니다. 투마로우가 소부장 기업 대부분을 인수하거나 대주주 자리에 올랐습니다. 조만간 임시주총을 열어 정부에 협조하던 사장들을 물갈이할 겁니다.”
“그런다고 뭐 달라질 줄 아나.”
“아직 임시주총은 열리지 않았지만, 일본 밖으로, 아마 북한이나 한국으로 공장 자체를 옮긴다는 게 중요합니다.”
“뭐? 우리 기업을 일본 밖으로 옮긴다는 게 말이 되나?”
“문제는 찬성하는 기업이 대다수라는 겁니다.”
“그놈들이 미쳤나?”
“소부장 사업은 일본 젊은이들이 기피하는 직종입니다. 다들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정부 눈치를 보고 있었습니다. 인재를 찾아서 해외로 이전 계획을 세우고 있는 기업도 상당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투마로우라는 든든한 자금줄이 있는데 일본에 남아 있을 기업은 없을 겁니다.”
“임재준, 북한을 버리면서까지 일본을 공격하다니. 미쳐도 단단히 미친놈이야.”
“북한을 버린 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더 단단히 손아귀에 쥐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은 투마로우 시티에 있던 기업은 언제든 북한을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소재를 쥐고 있으니 이제 더욱 투마로우에 매달릴 겁니다.”
이런 제기랄.
“히로키, 우린 얼마나 버틸 수 있나?”
“지금까지 버틴 건 양적 완화 덕인데, 주가가 하락하면서 전부 날아갔습니다. 외국인이 돈을 가지고 떠나고 있습니다. 달러가 급격하게 소진되는 중입니다. 조만간 신용등급 하락도 각오해야 할 겁니다.”
신용등급 하락까지?
“그래서 방법이 있나?”
히로키가 코베를 안쓰럽게 쳐다봤다.
“중의원 해산을 명하시죠.”
“뭐? 너까지.”
세계가 일본 후진적 아날로그 문화에 대한 의문을 표하고 일본 수출을 책임지는 기업들 대부분이 일본을 등졌다.
“일본 총리 운명 아닙니까. 일단 책임 있는 자세라도 보여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을 겁니다.”
중의원 해산.
이러면 중의원 선거를 다시 치러야 하고 다시 선출된 국회의원 과반수로 다음 총리를 선출해야 한다.
“아니, 그럴 수 없어.”
쯧쯧.
히로키가 혀를 차자 코베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이 녀석이 건방지게.
“아직도 임재준에게 맞서려고 하는군요. 저도 여기까지 하고 내려놓겠습니다.”
“히로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히로키가 고개를 까닥이고 나가려 하자 다른 장관들이 히로키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그냥 가면 어쩌라는 겁니까?”
히로키가 피식 웃으며 주변 장관들을 보았다.
“전 기자회견을 하러 가는 겁니다.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저도 가겠습니다.”
저도.
저도.
히로키를 따라 모두 나가 버렸다.
코베 총리 혼자 남아 멍하니 문을 바라보았다.
이놈들이 정말.
***
백악관.
“일본 총리가 어리석은 결정을 했군요.”
미국 대통령은 비서실장 제이콥의 보고에 어처구니가 없는 표정을 지었다.
일본 행정부가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하자 일본 총리는 중의원 해산을 발표했다.
히로키의 말처럼 총리 자리를 내려놓으려고 중의원 해산을 명한 것이 아닌 국민의 심판을 받겠다고 중의원 의원 총선거를 다시 한다는 명목이었다.
언론은 그러잖아도 나라가 힘든 와중에 또 돈을 들여 선거를 치른다고 코베 총리를 난도질했다.
우파 성향의 신문인 요미우리조차 총리의 만행을 낱낱이 파고들었다.
“아직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겁니다.”
쯧쯧.
“그러게 내가 그렇게 임재준에게 맞서지 말라고 당부했는데도. 말을 안 듣더니.”
“저희는 어떻게 대할까요?”
“적절히 위로만 하고 입장 표명은 하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꿀꺽.
제이콥은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려다 마른침을 삼켰다.
“왜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음. 투마로우 말입니다.”
“네.”
“아니, 월가에 손을 대야 하지 않을까 해서요. 규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마침 법안도 유효하고요.”
“도드프랭크법 말입니까?”
“네, 아직 법안이 살아 있으니 이 기회에 법안에 몇 가지 안을 추가하면 될 것 같습니다. 다시 투자은행들이 커 버려서 자칫 예전의 위기를 자초할지도 모릅니다.”
“월가가 아니라 투마로우를 말하는 거겠지요. 하긴 커도 너무 커 버려서 미국도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긴 했어요.”
“저러다 투마로우에 위기라도 닥치면 정말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질 겁니다.”
“어느 정도 선이 좋겠습니까?”
“최소한 상업은행과 투자은행 분리만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긴 해야 할 것 같은데.”
음.
대통령은 고민에 빠졌다.
투마로우를 분리해서 위험 요소를 미리 차단하긴 해야 하는데 임재준이 거부한다면 자칫 또 싸움으로 번질 수 있었다.
안 돼.
차라리 러시아에 폭탄을 투하하지.
임재준을 상대하는 건 절대 안 돼.
아닌데, 뭐라도 대비책은 만들어야 하는데.
“제이콥, 일단 투마로우 약점을 찾아봐요.”
“알겠습니다.”
제이콥이 나가자 대통령은 불안감이 엄습했다.
괜한 짓 하는 거 아냐.
일단 제이콥이 들고 오는 걸 보면 알겠지.
***
AAG 빌딩 66층.
“도련님.”
오우, 행색이 왜 저렇게 변한 거야?
그 카우보이 모자는 좀 아니지 않나?
“아니, 이사장님. 오랜만에 보니 아주 새로워지셨는데요?”
“하하하, 미국물을 좀 먹었더니 이런 게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어떻습니까?”
카우보이모자에 선글라스, 머리도 길었다.
그리고 옆에 그 사람은?
“여기 도날드 트롤링입니다.”
“도날드입니다.”
도날드가 재준을 보고 손을 내밀었다.
“아, 네. 임재준입니다.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한번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모두 자리에 앉았는데 서형길과 도날드는 소파에 등을 기대로 다리까지 꼬고 앉아 여유로운 자세를 취했다.
“이사장님, 영어는 좀 늘었어요?”
“그럼요. 이제 마트에서 물건을 살 정도는 됩니다.”
딱 그 정도는 는 것 같긴 하네.
어쨌든 서형길을 도날드에게 붙여 놨더니 이제 의형제가 되었다고 할 정도로 둘이 잘 어울렸다.
내가 보기에도 이사장님과 도날드는 딱이라니까.
“도련님, 도날드가 다음 대통령 선거에 나선다고 합니다.”
“그래요?”
일단 놀라는 척해주고.
“도날드, 어느 당에서 출마할 생각입니까?”
“민주당을 생각하면 힐러리 클리프가 만만치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공화당을 생각하면 버니 핸더슨이 버티고 있고. 지금은 머리가 복잡합니다.”
“힐러리 클리프 만만치 않죠.”
“맞아요. 그 아줌마 세력도 만만치 않습니다.”
“세력 면에서 보면 버니가 좀 약하지 않을까요?”
음.
도날드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화당으로 하시죠. 거기 제가 아는 사람들도 좀 있는데.”
“도와주실 겁니까?”
“그럼요. 우리 이사장님과 친분이 두터우신 분을 제가 외면할 수는 없죠.”
“하하하, 역시 미스터 서가 임재준이 도와줄 거라더니 진짜군요.”
하하하.
“한 가지만 약속해 주시죠.”
“뭐든 말만 하세요.”
재준이 손가락 하나를 펴며 말했다.
“도드프랭크법의 영원한 파기.”
도드프랭크법?
“지금도 있으나 마나 한 법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만.”
재준이 도날드에게 몸을 숙였다.
“지금 누가 그걸 만지작거리고 있습니다.”
“대통령이군요.”
재준은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기업을 운영해 본 적이 없는 대통령은 이래서 안 된다니까. 경기가 좋아지니까, 꼭 딴생각해요.”
“어때요? 약속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건 약속을 안 해도 제가 나서서 폐기할 겁니다.”
“그럼 됐습니다.”
“근데 한 가지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있는데.”
도날드가 재준에게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뭡니까?”
“북한 김정은과 친하십니까?”
“그런 셈이죠.”
“투마로우 시티에 건물 하나 짓는 게 가능할까요?”
“거기에 뭘 지으려고요. 도날드는 부동산 기업을 운영하고 있잖아요.”
“호텔 하나 지으려는데.”
“아, 호텔.”
“도날드 호텔이라고.”
하하하하.
이 사람이 여기다 숟가락을 얹으려 하네.
도날드는 네 번의 사업을 말아먹었다.
그래도 TV 프로그램 진행도 하고 책도 써서 인기는 여전했다.
그래서 도날드가 노린 게 자신의 이름을 브랜드화시키는 것이었다.
도날드 호텔이나 도날드 빌딩같이.
여기서 쏠쏠한 재미를 보자 미국 각지에 도날드란 이름을 가진 호텔이 꽤 많아졌다.
그런데 북한 투마로우 시티에 도날드 호텔이 등장하면?
그야말로 돈 안 들이고 역대급 광고가 되는 셈.
어쨌든 도날드와 김정은이 한 번은 만나서 포옹 정돈 해 줘야지.
“근데 호텔 지을 돈은 있습니까?”
“그러니까 김정은을 만나려는 겁니다.”
“아, 호텔 건설에 대한 허락을 받으려고요?”
“아니요, 호텔은 김정은이 지어야지요. 도날드 호텔이라면 장사가 얼마나 잘되는데. 오히려 이름 빌려주고 사용료 받을 생각입니다.”
엥?
이 사람 뻔뻔하기가 나 못지않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