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증권 재벌의 천재 손자가 되었다-236화 (236/477)

제236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10)

홍콩.

히로키는 딩쉐이를 기다리고 있었다.

며칠 전 급하게 비공식 만남을 제안받았다.

‘실무진끼리 만나서 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할 이야기야 뻔했다.

필리핀에 있었던 홍커의 해킹 사건, 아니면 북한 제재에 대한 두 국가의 입장.

하지만 히로키는 딩쉐이의 목소리에서 모든 걸 내려놓은 듯한 자포자기한 마음을 읽었다.

나만 하려고.

“먼저 와 계셨군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딩쉐이는 히로키에게 악수를 청했다.

“어서 오십시오.”

둘은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어째 둘 다 오래된 친구를 만난 듯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걸 동병상련이라 하던가.

둘 다 자신이 섬기는 변덕이 죽 끓는 듯한 주인을 잠시 떠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일단 한잔하시죠.”

히로키가 먼저 딩쉐이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가볍게 잔을 부딪치고 한 모금의 술을 입안에 담았다.

달다.

딩쉐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홍커 사건은 중국과 관계가 없습니다.”

“그럴 거라 생각했습니다. 저라도 주석 계좌에 송금하지는 않았을 거니까요. 누군가 일본과 중국을 이간질하려는 자의 소행이겠지요.”

음.

시작이 좋다.

“누구 소행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누구라고는 제가…….”

“아, 비공식 만남이고 꼭 서로를 설득시킬 필요가 없으니 개인적인 의견으로 생각하겠습니다. 물론 다른 이에게 옮기지도 않을 겁니다. 주석에게도 말입니다.”

“하하, 그럼, 제 생각엔 미국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

“그럴 수도 있겠군요. 연준에서 돈을 인출하는 게 쉽지는 않으니까요.”

“딩쉐이 주임님 생각도 같은 겁니까?”

“저도 미국을 생각했습니다만 임재준이 자꾸 떠오릅니다.”

“아, 임재준. 투마로우 말씀이군요.”

“네.”

임재준, 그래 그쪽이 더 타당할 수 있지.

일본의 양적 완화보다는 북한 성장에 방해가 될 테니까.

“만약 투마로우라면 중국은 어떻게 대처하실 생각입니까?”

“중국은…….”

후.

딩쉐이의 한숨에서 히로키는 답을 들은 듯했다.

하하.

“대처할 생각이 없군요.”

“네, 죄송하게도 주석이 이미 임재준과 손을 잡았습니다.”

“벌써요?”

“자율주행 시범을 위해 지린성을 내줬습니다.”

음.

그렇구나.

그럼, 일본만 고립되게 생겼다.

양적 완화로 미국과 유럽의 눈치를 봐야 한다.

거기다 북한 제재를 위해 여기저기 돈을 처발랐지만, 막상 북한 내에서 유전자 변형에 성공하자 세계가 일본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쳐다봤다.

일본은 유도만능줄기세포로 2012년 노벨 생리학·의학상을 받아 놓고, 북한 내에서 유전자 변형에 성공하니까 비인륜적이라고 떠들어 대는 꼴이 영 보기 아니었다.

이게 내로남불이지.

자기들은 유전자를 다뤄서 노벨상까지 탔으면서 남이 다루는 건 안 된다?

물론 유전자 삽입과 유전자 변형은 많은 차이가 있겠지만 어쨌든 다 같은 유전 공학이니까.

히로키는 중국과 투마로우가 손을 잡았다는 사실에 유일한 동아줄이 끊어진 느낌이었다.

그나마 중국과 손을 잡은 거로 위로하는 처지였는데.

“축하드립니다. 그래도 자율주행을 직접 겪을 기회가 주어졌군요.”

“아니요. 아닙니다.”

딩쉐이는 자신 앞에 놓인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임재준, 그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릅니다. 되도록 엮이지 않는 게 좋은데, 주석은 또 그가 내민 달콤한 제안을 덥석 물었습니다. 좋지 않아요. 좋지 않아.”

후후.

“저도 예전에 겪어 봐서 압니다. 임재준, 그 무자비한 놈.”

“임재준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네, 그때 일본 대부업 전부를 헐값에 가져갔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그때가 진도 9.1의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였습니다. 그리스 사태가 겹쳤고요. 놀라운 일이죠. 임재준은 그 모든 일이 일어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일본 전체에 공매도를 쳤습니다. 그리고 다 가져가 버렸지요.”

아.

저 기분 알지.

내가 아주 잘 알아.

러시아 금으로 중국 광물 기업 주식을 가져가고 이어진 러시아와 전쟁으로 헤이룽장성을 빼앗겼지.

“만약 임재준이라면 일본은 어떻게 움직일 작정입니까?”

“임재준이라면, 정말 임재준이라면.”

하하하.

“전 일본 총리가 뭘 하는지 구경할 겁니다.”

“히로키 당신은 관방장관 아닙니까?”

“그러니까 옆에서 더 자세히 구경할 수 있죠.”

“총리를 싫어하는군요.”

“아니요. 임재준과 엮이지 말라고 말려 봐야 나만 욕을 먹을 거니까요. 차라리 한번 경험하게 두는 게 앞으로 일본이 발전하는 길이 될 겁니다.”

차라리.

“딩쉐이 주임님, 임재준과 엮이지 마세요. 진짜 큰일 납니다. 만약, 만약에 홍커를 움직인 게 임재준이라면 왜 그랬을 것 같습니까? 일본과 중국의 전쟁까지도 생각했을 겁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전 그리스 사태도 의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리스 경제 자체도 문제였지만 저렇게까지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지금 4년째 국민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그리스 사태까지?”

그럴 수 있나?

아니, 그럴 수 있지.

중국과 러시아가 어떻게 전쟁을 치렀는데.

전부 임재준의 지시를 주석이 따른 게 원인이잖아.

“한번 임재준의 과거를 살펴보십시오. 그한테 맞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기업은 없습니다.”

“음.”

“그래서 차라리 임재준 편에 서는 게 더 나은 겁니다. 임재준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미국이나 프랑스, 지난 몇 년간 급성장했습니다. 그리고 AMD는 카킬을 제치고 곡물 1위 기업이 되었고요.”

“그럼, 히로키는 총리의 일에 간섭하지 않겠다 이 말이죠.”

간섭을 안 한다.

“아니, 어쩌면 부추길 수도 있습니다. 중국은 불똥 안 튀게 잘 피하시기 바랍니다.”

임재준이 무서운 건지.

총리를 싫어하는 건지.

근데 딱히 히로키 처지와 내 처지가 별반 다르지 않잖아.

“자, 한잔 받으세요.”

위로하고 싶어지네.

***

월가.

월가에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투마로우가 일본 기업들에 대규모 공매도를 실행하고 있다는데. 벌써 상당량의 공매도가 진행됐나 봐.

-그래? 어쩐지 그동안 너무 잠잠했어. 근데 일본에 무슨 일 있어? 아무런 정보는 없었는데.

-나도 정확히는 몰라. 단지 이번 일본은행 해킹 보도에 주목하라는 것 같던데.

-아, 일본 중앙은행 털린 거.

-그건 일본이 문제가 아니라 해커가 능력이 뛰어난 거 아냐? 그게 일본 전체 기업을 공매도할 정도로 문제가 되는 일인가?

-글쎄. 그래도 투마로우가 진행한다니 준비는 해야겠지.

-어, 저기 필리핀 경찰 발표가 나온다.

월가의 뱅커들은 숨을 죽이고 모니터에 집중했다.

[필리핀 경찰은 이번 홍커들의 일본은행 해킹에 대한 사건 내막을 공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치밀한 계획을 짠 홍커는 7월 3일 목요일 일본은행 프린터를 일시 중단한 후 스위프트 시스템을 해킹해서 연준…….]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스위프트 시스템이 해킹당했다는 것인데 모든 이가 자신의 귀를 의심하게 만든 단어는 ‘프린터’였다.

-뭔 소리야? 프린터라니. 일본은행이면 일본 중앙은행인데 프린터를 사용한다고?

-이거 봐. 블룸버그 통신에 투마로우가 일본 기업 공매도 하는 이유를 분석했어.

[투마로우는 팩스와 도장으로 이루어진 일본 기업 문화가 이미 디지털 문화가 자리 잡은 세계 기업 문화에 발 빠르게 대처하기 힘들다고 판단하여 일본 기업 중 디지털이 이루어지지 않은 기업들에 대해 매도 의견을 냈다. 가장 심각한 문제인 도장 문화는…….]

-대단하다. 이게 다 뭐야. 도대체 도장이 몇 개가 필요한 거야. 구청에 등록하는 지쓰인, 은행 거래에 등록한 긴코인, 일반 사무에 사용하는 미토메인, 택배 받을 때 사용하는 샤치하타? 이게 다 도장이라고?

-그럼 개인이 몇 개의 도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거잖아.

-그리고 이거 PHS, printour-hanko-scan, 이거네. 이번 일본은행이 털린 게 이체 결과를 프린터 해서 도장 찍고 다시 스캔으로 보내는 거. 여기서 프린터가 고장 나니까. 은행에 그 큰돈이 오고 가도 몰랐던 거야.

-거기다 7월 4일부터 주말까지 3일 동안 시간을 벌었어.

-이건 또 뭐야?

[투마로우는 또 다른 점에서 일본의 미래는 암울하다 진단했다. 일본은 양적 완화를 외치면서도 과감한 투자보다는 내부 유보를 쌓아두는 편이다. 하지만 그 정도가 심해 GDP의 90% 수준인 450조 엔을 육박하고 있다.]

-저건 나도 안다. 저거 일본인들 병이야. 일반 국민도 똑같아. 미국은 예금 자산이 13%밖에 안 되는데 일본인은 거의 60%잖아. 돈이 은행에 다 묶여 있는 거지.

-양적 완화를 해 봐야 은행에 고스란히 들어가는구나. 근데 일본 제로금리잖아.

-그래도 투자하면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팽배한 거지. 차라리 원금을 보존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거야.

-투마로우가 일본을 손절 할 만하네. 차라리 주변에 있는 한국이나 중국에 투자하는 게 낫겠다.

-저건 국민 전체가 인식이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정부가 떠들어도 힘들어.

-뭐해? 우리도 던져야지.

-아, 그렇지. 우리가 이럴 때가 아니지.

-여기 블랙리스트도 올라왔어. 잘 보고 던져.

-나도 보고 있어.

월가를 시작으로 일본 기업 블랙리스트가 돌기 시작했다.

***

일본 총리대신 관저.

“일본은행이 프린트를 쓰는 게 그렇게 안 좋은 일입니까?”

코베는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인식 때문입니다.”

금융청장이 기어들어 가는 소리를 내었다.

아무래도 이번 사건을 촉발시킨 건 일본은행이고 제일 먼저 화살받이가 된 것도 금융청장이었다.

“도장만큼 확실한 결제 수단이 또 어디 있다고 전 세계가 이 난리를 친단 말입니까?”

흥.

들리지는 않았지만 히로키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투마로우가 시작했으니까요.”

“뭐요?”

“투마로우가 시작하면 월가가 들썩이고 전 세계 증권사가 움직입니다.”

“우리 의견은 냈습니까?”

“이미 미국의 여러 매체에 반박 기사를 실었습니다.”

“그런데도 일본의 의견보다 투마로우 의견에 쏠린단 말입니까?”

“맞는 말이니까요.”

“뭐요?”

아까부터 삐딱하게 구는 관방장관을 코베가 매섭게 노려봤다.

저놈이 뭘 잘못 처먹었나.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겁니까?”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봅니까?”

“지금까지 독단으로 처리하셨으니까요. 이번에도 총리님 의견을 먼저 말씀하시면 따르겠습니다.”

내가 총리, 너를 잘 알지.

협조적으로 나가면 수렁에 빠지지 않아.

넌 내가 직접 임재준에게 데려다주지.

“미국 언론사에 로비를 하세요. 일본 기업 고유문화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기사를 실으란 말입니다. 당장.”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광방장관 히로키는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인 뒤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히로키가 나가고 난 후 코베는 의아한 듯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재무성 장관에게 말했다.

“국내 증시는 어때요?”

“다른 나라에 비해 크지는 않지만, 하락 중인 건 맞습니다.”

“그럼, 후생노동성 장관, 일본연금기구에 있는 돈으로 증시를 올리세요. 일본 증시가 올라가야 전 세계가 다른 방향으로 생각을 할 겁니다.”

“위험합니다. 억지로 버틴다면 외국인들이 지분을 전부 던질 겁니다. 뉴욕증시와 일본 증시에 동시 상장된 주식의 갭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더 많은 외국인이 뛰어들 거고요.”

“그렇다고 하락하는 증시를 보고만 있으란 말입니까?”

“일본연금기금이 부실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건 나중에 생각할 일이에요. 일단 방어하세요.”

후.

“알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