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5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9)
“딩쉐이, 지금 내가 머리가 돌아가질 않아. 이제 무엇부터 해야 하지?”
“먼저 일본을 만나서, 아니, 임재준을 만나서, 아니, 필리핀으로 가야 하나.”
뭘 우선해야 하는지 딩쉐이도 가늠을 할 수 없었다.
집중하자. 집중.
후.
“주석님, 제가 일본 관방장관을 만나 이번 해킹 사건에 대해 정리하겠습니다. 그다음 임재준을 만나 북한 투자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필리핀은……. 일본과 원만하게 해결하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겁니다.”
“어? 그래, 그러네. 그러면 되겠네.”
“주석님은 외교부장을 만나 잠시 입을 닫고 있으라고 하십시오.”
“어? 그렇지. 외교부장은 내가 잘 말하지.”
딩쉐이는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왔다.
일본으로 가야겠지.
그다음 한국을 방문하고.
행선지를 결정하고 발걸음을 떼려는 순간.
띠리리링.
임재준?
무슨 일이지? 전화를 먼저 다 하고.
“네, 딩쉐이입니다.”
-목소리가 왜 그렇게 가라앉아 있어요? 무슨 걱정이라도 있습니까?
“아, 네. 정부 일이라는 게 워낙 복잡하다 보니.”
-방송 보니까 홍커들이 사고 친 거 같은데 그것 때문에 골치 좀 아프겠어요.
“보셨군요. 후. 혹시나 해서 알려드리는데 이번 홍커는 중국과 상관이 없습니다. 단독 범행이지 저희는 그런 지시를 내릴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겠죠. 나한테 이야기해 뭐하겠습니까? 일본이랑 잘 풀어야지.
“그렇지요. 근데 어쩐 일로 전화를 다 주신 겁니까?”
-아, 지금 중국에 도착했거든요.
“중국이요? 또 무슨 일이 터진 겁니까?”
-아니, 뭐, 날 사고만 치는 사람으로 보시네. 헤이룽장성에 들를 겁니다. 그리고 러시아와 북한 철도 연결 상황도 좀 보려고.
“아, 네.”
그래, 제발 빨리 넘어가라.
네가 중국에 오래 있을수록 사고가 터질 확률이 올라간다.
-그래서 부탁이 있어요.
“네, 말씀해 보시죠.”
-러시아로 가려면 국경을 넘어야 하니까. 그 통행증 같은 거 있을 거 아닙니까?
“아, 네.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얼마나 걸리죠?
“당장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묵고 있는 호텔을 말씀하시면 제가 지시를 내려 두겠습니다.”
-그래요. 알겠어요.
호텔명을 알려주고 통화는 끝났다.
임재준이 베이징에 있다.
딩쉐이는 뭔가 불안한 기운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그래, 오늘 임재준과 북한 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끝내자.
되든 안 되든 안 좋은 기분은 빨리 벗어 버리는 게 좋아.
딩쉐이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
Grand Mercure Beijing Central.
재준은 딩쉐이를 만나기로 한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섰다.
우선 간단한 요리와 위스키를 시키고 블록에게 문자를 보냈다.
‘왕삼 외교부장에게 내가 중국에 있다는 정보를 흘려.’
요리와 위스키가 나오고 위스키 한 잔을 따라 음미하는데,
“식사 중이시네요.”
딩쉐이가 서류 봉투를 들고 다가왔다.
“빠르네. 역시 중앙판공청 주임이네요.”
“하하, 뭐 부탁할 일도 있고 해서 좀 서둘렀습니다.”
“부탁할 일이요? 나한테? 일단 한잔하시죠. 힘든 이야기 같은데 술기운이 오르면 말하기도 쉬울 거예요.”
재준은 딩쉐이에게 위스키 한 잔을 따라 주었다.
딩쉐이는 단숨에 술을 들이켜고는,
“러시아도 투마로우 시티에 들어갔는데 중국도 들어가면 안 되겠습니까?”
“투마로우 시티에요? 중국은 나름대로 과학 도시를 운영 중이잖아요.”
“아시면서.”
“좀 그런가.”
잔이 채워지자 딩쉐이가 다시 단숨에 들이켰다.
과학 도시도 뭐가 있어야 결과를 만들어내지.
아무것도 없는 맨땅에 헤딩만 죽어라 하니 머리만 띵했다.
홍커를 통해 정보를 수집하려는 계획도 이제 물 건너갔고.
“투마로우 시티에 들어오려면 최소한 사이언스나 네이처 같은 곳에 논문을 몇 개는 기재했어야 할 건데. 이미 투마로우 시티 운영위원회가 생겨서 그곳에서 정하고 있어요.”
“저희가 논문 개수로는 미국 다음 아닙니까?”
“정말 그렇다고 생각해요?”
후.
딩쉐이의 한숨이 길어졌다.
위스키 한잔을 다시 단숨에 들이켰다.
사실 산업혁명 이전의 과학은 중국이 중세 서양 세계를 앞섰던 적이 있었다.
나침반, 종이, 화약, 인쇄술이 서양에 전해지며 사람들을 놀라게 했으니까.
하지만 증기기관이 나온 후로는 ‘예전엔 그랬었지’란 회상용 역사가 되었다.
이에 중국은 1999년부터 과학 기술에 투자하는 돈을 늘리면서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과학을 따라잡기 위해 무지막지한 논문을 공인된 국제 학술지에 기재했다.
그러나 인용조차 안 되는 수준 낮은 논문이 태반이었다.
딩쉐이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럼, 투자라도 하게 해 주세요.”
“에이, 그건 아니죠. 우리 밥상에 숟가락 얹는 거잖아요. 투마로우가 투자한 돈이 얼만데. 투자라는 게 초기가 얼마나 중요한 건 아시죠?”
“압니다.”
안다. 아주 잘 안다.
“그렇다고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닌데.”
재준의 말에 딩쉐이의 안면의 주름이 활짝 펴졌다.
“방법이 있습니까?”
“평양에서 시작한 자율주행 도로가 백두산까지 연결할 예정이에요. 알고 있어요?”
“아니요. 몰랐습니다.”
“쭉쭉 뻗어 나가고 있지요. 그 광경이 얼마나 장관이던지. 이제 평양은 누구나 자동차를 이용하면서 사고 하나 없이 웃고 떠들면서 다니고 있어요. 하, 근데 문제가 있단 말이에요. 백두산에 도착하면 더 뻗어가지 못하잖아. 난 더 갔으면 좋겠는데.”
“더?”
이게 무슨 말이지?
그럼 중국을 자율주행 도시로 선정하고 싶다는 건가?
“어때요? 지린성을 임대해 주는 게.”
“네? 도시가 아니라 성을 통째로요?”
“왜 그렇게 놀래요? 쓸모도 없는 땅이면서.”
“쓸모없기는 하지만.”
또 임대?
“어차피 지린성은 중국에서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곳 아닙니까? 인프라도 없어서 낙후되어있는 곳인데.”
“그렇지만.”
“뭐 하기 싫으면 말고요.”
“잠깐만요. 잠깐만.”
주석도 자율주행 도시 선정에 뛰어들어 어떻게든 중국이 선정되게 하라고 했잖아.
지린성을 다 임대해 주는 건 어려운 결정이겠지만 어차피 중국도 도로나 철도를 추가로 건설하기 위해 돈을 더 투자하길 망설이는 중이고.
“지금 결정이 어려우면 다음 기회에 하고요. 우선 러시아로 뻗어 나가죠. 뭐.”
“기다려 보세요. 왜 그렇게 성격이 급하십니까. 제가 지금 주석에게 연락을 해보겠습니다.”
딩쉐이는 급하게 주석에게 연락을 했다.
몇 마디 주고받는데 주석이 차라리 재준을 만나서 결정을 하겠다고 했다.
“주석님이 지금 이리로 오시겠답니다.”
“아, 그래요? 차라리 잘됐네요.”
“그러면 주석님이 오시기 전에 몇 가지 상황을 짚어 보죠.”
“그래요.”
재준이 딩쉐이와 지린성 임대에 대해 좀 더 자세한 상황을 이야기하는 중에.
딩쉐이.
어디선가 고함과 함께 삿대질까지 하며 왕삼 외교부장이 다가왔다.
“딩쉐이 주임. 지금 뭐 하는 겁니까? 중국 성을 임대한다니. 지금 제정신입니까?”
“외교부장, 여긴 어쩐 일입니까?”
“임재준이 중국에 왔다고 해서 한번 만나러 왔습니다. 그런데 이런 음흉한 짓거리를 하는지는 몰랐습니다.”
“저리 가세요. 인사는 나중에 하고.”
“그렇게는 못 하겠습니다. 소국 주제에 대국이 하겠다는 일에 고개 숙이고 들어오진 못할망정 어디 감히 대국의 땅을 탐하고 있는 겁니까?”
풉.
재준이 왕삼의 말에 웃음을 참으며 입을 틀어막았다.
웃어?
“아, 미안하네요. 난 무슨 사극 찍는 줄 알았어요. 소국이래, 그리고 뭐라더라, 아, 고개 숙이고. 큭큭큭. 하여간 어딜 가도 이런 사람은 꼭 있어.”
딩쉐이는 말투가 바뀐 재준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안 좋아. 아주 안 좋아.
또 뭔 일이 터질 것 같은데.
주석이 오기 전에 이놈을 치워야 해.
재준이 왕삼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봐요. 소국과 대국의 기준이 뭐예요? 혹시 땅?”
“그렇게 봐도…….”
“그럼 러시아가 중국보다 대국이네요.”
“아니지. 감히 러시아 따위가…….”
“그럼, 인구?”
“역사에 이미 중국은 대국이요.”
“역사? 당신이 역사를 믿는다고요? 여와, 복희 뭐 이런 거?”
“그건 지어낸 이야기일 뿐이요.”
“뭐야, 자기 역사도 안 믿잖아. 중국인은 자기 멋대로라니까.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게 역사예요? 그럼 나도 믿고 싶은 역사가 있는데. 고조선이 중국 땅 전부를 지배했다던 역사 알죠. 그렇게 따지면 우리가 중국보단 대국이 되는 건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러니까 내가 듣기엔 당신 말이 말도 안 되는 거지. 대국? 큭큭큭. 어디 대국 클라스 좀 구경해 볼까요?”
“한번 해보겠다는 겁니까?”
“해보자니까. 지금 당장 투마로우 전체를 가동할게요. 중국이 얼마나 버티는지 해보자고요. 이번 일은 전적으로 당신이 책임지는 거예요. 일단 곡물부터 시작하죠. 오늘부터 중국으로 들어오는 곡물은 200% 가격 인상입니다. 다음 달은 300%, 거기에 중국 국채 전부 만기 연장 거부할 테니 돈 준비하세요.”
“뭐요?”
“못 알아들었어요? 자신 있는 것 같았는데. 다음으로 뉴욕과 유럽에 상장한 중국기업 퇴출 시작할게요.”
잠깐.
딩쉐이가 재준의 팔을 잡았다.
“안 됩니다.”
그리고 왕삼을 향해 휙 돌아섰다.
“이 미친놈아.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고 했지.”
“뭐, 딩쉐이 주임, 지금 나한테…….”
“저리 꺼져.”
“이 사람 상종 못 할 인간이구만.”
그건 너지.
짝!
딩쉐이의 손이 왕삼의 두툼한 볼살을 후려갈겼다.
이놈이.
왕삼은 자신의 볼을 감싸고 주먹을 들어 올렸다.
이때.
“왕삼!”
뒤쪽에서 묵직한 음성이 공기를 가득 메웠다.
“주, 주석님.”
저벅저벅.
왕삼에게 걸어온 시앙핑의 시선이 그의 주먹을 향했다.
허허.
그리고 가소롭다는 듯 웃더니 몸을 휙 돌려 재준을 향했다.
“이거 음식이 식었는데 다시 주문해도 되겠습니까?”
“맛있는 거 사 주시게요?”
“그러죠. 딩쉐이, 여기 와서 앉아.”
“네.”
왕삼은 이 광경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나 머리가 복잡했다.
지금 주석이 나를 깐 건가?
주석이 되기까지 물심양면으로 오직 주석을 위해 헌신한 나를.
그것도 어제까지 죽일 듯이 욕하던 놈 앞에서.
그리고 딩쉐이는 부르는데 나는 여기 서 있으라고?
“왕삼.”
주석님이 불렀다.
“네, 주석님.”
“집에 가 봐.”
“네?”
“끌려갈래?”
끙.
왕삼이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뒤를 돌아 걸어갔다.
어휴.
시앙핑의 입에서 한탄이 저절로 나왔다.
어째 임재준 이놈하고 있으면 나도 모르게 과격해진단 말이야.
“딩쉐이가 당신을 만나고 있다는 하길래. 와 봤습니다.”
“저, 주석님. 지금 자율주행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습니다.”
“정말 자율주행 도시로 중국을 택할 겁니까?”
“근데 그게 도시가 아니라 성입니다. 지린성.”
“성?”
“한잔하시죠.”
재준이 시앙핑 잔에 위스키를 따랐다.
일단 시앙핑은 잔뜩 긴장한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단숨에 술을 털어 넣었다.
카
“지린성 어떻게 해 주면 됩니까?”
“99년 임대해 주시죠.”
“또 임대라…….”
“잘 생각해 보세요. 일단 지린성 전체가 자율주행에 적합한 성이 되면 지린성으로 사람들이 몰려들겠죠?”
“그거야 당연히 그럴 겁니다. 교통사고가 아예 없는 지역이 될 테고 차량의 운행 시간이 정확하니 산업에서 낭비되는 자원이 획기적으로 줄면 이익이 늘어나 인민들의 생활이 더 나아지겠죠. 그래서 저도 자율주행 도시를 중국에 유치하도록 지시를 내린 겁니다.”
“잘 아시네요.”
“그래도 99년은 좀 과한 면이 있습니다.”
“우리도 개발비는 뽑아야 하잖아요.”
“지린성에 뭘 지을 생각입니까?”
“대단위 곡창 지대를 만들 생각이에요. 곡물 수익으로 자율주행에 필요한 인프라를 건설하고요.”
음.
“공기 좋은 전원 지역이 탄생할 것 같은데. 주석님도 99년 후에 지린성으로 이주해서 사세요.”
“네?”
99년 후에 내가 지린성으로 이주를 한다고?
재준이 주변을 확인하고 시앙핑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임모탈 연구가 막바지에요. 특별히 조기에 시술을 받을 수 있게 얘기해 드리죠.”
“정말입니까?”
뭐라고?
옆에서 듣고 있는 딩쉐이가 시앙핑보다 더 놀라는 듯했다.
이거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다.
임모탈, 영원히 살 수 있다는 그 불로장생 기술.
재준이 시앙핑을 보고 빙글 웃었다.
“에이, 내가 언제 주석님에게 허튼소리 하던가요?”
“당장 지린성을 임대해 드리겠습니다.”
“아주 호탕하십니다. 하하하.”
웃고 있는 주석과 재준을 보고 있는 딩쉐이는 머리가 어질했다.
또 일이 꼬이고 있다.
언제는 일본과 손을 잡는다며.
나도 중국인이지만 중국놈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