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1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5)
백악관.
“일본의 양적 완화가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대통령은 비서실장의 보고를 듣고 머릿속이 갑갑해지는 걸 느꼈다.
“20년간 이어 온 디플레이션을 극복하려면 방법이 없었겠지.”
인플레이션이 물가만 상승하는 데 반해 디플레이션은 물가 하락에 임금도 하락, 실물 가치도 하락, 기업 가치도 하락, 총체적으로 다 하락을 뜻한다.
미국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로 디플레이션을 강하게 겪은 바 있었다.
일본은 미국처럼 크게 한 방 맞은 건 아니지만 꾸준한 잔펀치를 20년간 맞고 있는 게 더 큰 문제였다.
크게 한 방 맞고 KO 돼 버리면 빨리 병원으로 실려 가서 치료를 받으면 되는데 잔펀치다 보니까 꼭 해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으로 버티게 된다.
할 수 있다.
그래서 일본이 드디어 물가를 올리기 위해 양적 완화를 다시 시작했다.
엔화를 풀어 엔화를 약세로 만들 것이다.
“당분간 일본에게 유리하게 진행될 것입니다.”
“왜 당분간이라고 합니까?”
“결국 엔화의 하락은 수출에는 호재일지 몰라도 수입에는 악재입니다. 일본은 제품 수출보다는 해외에 투자된 자본 이자 수익이 큰 나라입니다. 제품 수출로 기업이 살아나고 노동자의 임금이 올라야 하는데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물가만 상승할 뿐입니다.”
“물가 상승이면 디플레이션을 극복하겠네요.”
“그렇게 되지 못할 겁니다. 임금 상승 없는 물가 상승은 일본 국민만 더 어렵게 될 거고요. 그럼 정부가 또 나서서 물가를 잡을 테죠. 악순환입니다.”
일본에게 중요한 건 노동자의 임금 상승이다.
근데 기업은 임금을 올려줄 만큼 이익이 남지 않는다.
수출이 잘 되면 뭐 하나.
원자재, 특히 석유 수입 가격이 높은데.
결국 일본 노동자는 20년간 임금이 오르지 않았다.
대단한 나라다.
비서실장은 고민하는 대통령에게 고민을 하나 추가했다.
“거기다 북한 문제가 불거져서 일본이 당황하고 있습니다.”
북한이란 단어에 대통령은 잠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일본 이야기하다가 왜 북한으로 넘어간 거야?
하긴 지금 일본에겐 북한이 제일 큰 걱정이긴 하지.
일본의 또 다른 문제는 자신들이 아시아의 평화를 책임지고 있다는 망상 속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중국한테 까인 게 언제인데 아직도 대장 노릇을 하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간섭질을 못하면 죽는 병이라도 걸린 나라가 일본이다.
후.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입장을 표방해야 하는데 아직도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반대를 하자니 기업들이 들고 일어날 것이고 찬성을 하자니 인권 단체가 들고 일어날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깔고 뭉개기에는 여기저기서 입장을 정하라고 난리고.
특히 저 일본, 시도 때도 없이 정부 관료들과 대사관을 들락거리며 자기들은 미국을 지지하니 빠른 답변을 달라고 애들처럼 칭얼거렸다.
그래도 답변을 내기엔 양당의 입장이 혼선이었다.
“북한은 좀 더 두고 봅시다.”
“이제 현실화 된 결과가 하나둘 나타나고 있습니다.”
“벌써요?”
“투마로우 시티의 정보 공유는 지금까지 지지부진하던 연구에 획기적인 속도를 붙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나온 게 뭡니까?”
“크리스퍼로 배아 유전체변형에 성공했습니다.”
“뭐요? 이 사람들이 정말…….”
크리스퍼는 4세대 유전자 가위를 말한다.
복잡한 이야기는 다 때려치우고.
배아 유전체변형이라면 부모가 원하는 아기를 만들었단 얘기다.
이제 아기가 태어나면 그 아이는 슈퍼맨이 되는 것이다.
대통령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르고 눈앞이 어질어질해졌다.
이제 전 세계가 들끓기 시작할 것이다.
고민하는 대통령에게 비서실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북한에 간 이유가 저것입니다. 북한에서 못 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북한에 자기 발로 들어간 이유가 그것이지.”
“열 달 시간이 남았습니다.”
“뭐가 말입니까?”
“열 달 후에 태어난 아기가 진짜 천재적인 능력을 갖췄다면……. 북한으로 몰려들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모두 자기 자식을…….”
“그렇습니다. 자기 자식을 새로운 인류에 포함시키려 할 겁니다. 아무리 돈이 많이 들어도 말입니다.”
“막아야 합니다.”
“방법이 없습니다. 북한을 침략한다면 모를까, 아니, 북한을 건드리면 더 많은 나라가 북한을 보호하려 할 겁니다. 북한을 찾아갈 부모 중 대다수는 세력가들이니까요.”
“그렇지요. 그래……. 빌어먹을.”
대통령의 입에서 욕설 비슷한 게 나왔다.
이 욕설은 북한에 대한 것이 아닌 자신에 대한 것이다.
나도 미셸과 상의해서 북한을 가야 하는 거 아닌가.
“그리고.”
“또 뭐가 있습니까?”
“김정은이 평양을 자율주행 지역으로 선포했습니다. 이제 평양의 모든 운송수단은 자율주행을 위한 실험실이 되었습니다.”
“갈수록 태산이군요.”
“미국도 입장을 정해야 합니다.”
“양당 대표를 만나야겠습니다.”
“네.”
비서실장은 담담하게 대답을 하고 돌아섰다.
“제이콥.”
돌아서는 비서실장을 대통령이 불렀다.
“네.”
“난.”
대통령이 입술을 깨물었다.
“찬성입니다.”
“저도.”
마지막 말을 남기고 제이콥 비서실장은 걸어 나갔다.
왜 둘은 말을 남겼을까.
미국의 대통령 비서실장은 다른 나라와 궤를 달리한다.
비서실장은 13개의 부처를 거느리고 4,000명의 직원이 일하는 곳의 수장이다.
작은 행정부를 거느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당이 반대한다고 해도 백악관의 비서실에서 움직이면 가능한 일이 된다.
***
투마로우 시티 내 북조선 증권 센터.
드디어 오늘이 투마로우 시티에 있는 2,000여 개의 기업 중 1,000개의 기업이 상장하는 첫날이다.
전산 시스템 시범 가동도 잘 마무리되었다.
엑스추어 플러스(EXTURE+).
한국이 개발한 거래 시스템으로 리눅스 기반의 주전산 시스템이다.
한국 시장과 연동을 위해 현재증권 임병달 회장이 한국거래소를 설득해서 북한으로 가져왔다.
물론 투마로우 시티에 들어선 한국 대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도왔고.
원래 이런 시스템을 개발하려면 2년 정도 걸리지만, 한가하게 시스템 개발할 시간이 없었다.
그리고 잘 만들어졌으면 가져다 쓰는 게 훨씬 유리하지. 거래 시스템이 뭐 특별한 거라고.
시스템이 문제가 아니라 시스템에 올릴 상품이 문제다.
주식 거래야 당연한 거지만 각 국가마다 독특한 상품이 존재해야 한다.
예를 들면 한국의 경우 코스피200지수라든가 KRX100지수, ELW(주식 워런트 증권), 심지어 돈육 선물 같은 거.
사람들이 혹할 만한 상품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해외 거래 시스템과 연계하여 매매하게 만드는 것도 중요하고.
또한 임병달이 한국에서 2,000명 가까운 인재들을 데려왔고 재준 팀원은 인재들을 통솔하며 각자 맡은 분량을 처리했다.
상장이라는 게 상장 주식을 몽땅 시스템에 올리는 게 아니라 일단 몇 개의 대형 증권사에 선 매수 주문을 받고 남은 물량만 시장에 내놓는 게 정석이다.
재준은 먼저 가장 덩치가 큰 종목을 다루는 윌켄에게 갔다.
“윌켄, 뱅가모바이오사이언스는 어때요? 난 여기가 가장 궁금한데.”
뱅가모바이오사이언스가 이번 배아 유전체변형으로 첫아기를 만들어 낸 곳이었다.
“뱅가모 측에서 일단 10%만 시장에 내놓겠다고 했는데 전 세계에서 물량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특히 중동에서 과열 양상까지 벌어지고 있고요. 컨트롤하기 버거워요. 하하.”
“주당 얼마까지 치솟을 것 같아요?”
“1,000달러는 가뿐할 겁니다. 1.2% 정도 시장에 풀릴 텐데, 올라가자마자 2,000달러까지 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2,000달러?
어느새 엘리자베스가 다가와 둘의 대화에 끼었다.
“배당 안 하죠?”
“내가 배당하지 말라고 했어. 아니, 북한 증시에 상장하는 모든 기업은 배당을 못 하게 할 거야. 그 하이에나 같은 행동주의자들 코빼기도 못 비치게.”
“뭐, 배당은 없어야 하지만, 아저씨가 말하니까 심술이 나네.”
“넌 왜 나만 보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내 능력을 개화했어요.”
“갑자기 뭔 소리야?”
“아저씨를 괴롭히는 게 내 일이더라고요.”
“뭐?”
“여기 보니까. 임재준이라면 아무도 딴지를 걸지 않아. 그러니까 아주 위험을 달고 살아요. 어쩌면 죽을 수도 있는데. 너무나 태연해. 그래서 내가 할 일이 이거구나 알게 되었어요. 평생 아저씨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거.”
“너 이제 20대야. 연애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그럴 나이라고. 여기 돈밖에 모르는 인간들 사이에 있으면 인성 터져. 안 돼.”
“나도 남자한테 귀속되는 결혼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어요. 그리고 남의 비위 맞추면서 연애할 마음도 없고요. 나도 이제 슬슬 돈에 대해 각성하는 중이란 말이죠. 위험하지 않으면서 떼돈을 버는 방법은 아저씨를 괴롭히는 거예요.”
“너 아이큐가 몇이라고 했지?”
“190.”
“그거 아무래도 잘못된 거 같다. 다시 재 보자. 내가 보기엔 앞에 1은 잘못 기재한 게 틀림없어.”
둘이 옥신각신하는 걸 본 윌켄은 엘리자베스의 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지, 보스에게 딴지 걸 인간 하나는 옆에 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근데 저러다 둘이 사랑에 빠질 확률이 있지 않을까?”
혼자 중얼거리는데,
“그럴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까워요.”
헉!
어느새 펠그리니가 윌켄 옆에서 같이 중얼거렸다.
“왜?”
“처음에 호감을 느끼는 단계에서 도파민이 분비되고 이것이 뇌의 다양한 부위로 흩어지게 되죠. 이후에 열정적인 사랑에 빠졌을 때 페닐에틸아민이라는 호르몬이 나옵니다. 다음에 신체적 접촉을 통해 사랑의 완성 단계에서 옥시토신이 평상시의 5배나 증가하고요. 안정된 사랑을 하는 단계에서 행복 호르몬인 엔돌핀이 나오죠.”
“근데?”
“보스는 돈 이외에는 도파민 자체가 분비되지 않아요. 나머지 호르몬이 나올 틈이 없어요.”
“어떻게 그렇게 단정할 수 있어?”
“시각에서 즐거움을 느끼지 않는 것 같아요. 영화나 영상, 사람의 외모, 심지어 음식에서도 놀라거나 즐거워하는 걸 본 적이 없거든요.”
“술이나 음식은 좋아하잖아.”
“그런 것 같이 보이지만, 잘 보면 먹은 후에 즐거워하죠. 즉 미각으로 즐기는 겁니다.”
호.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지금까지 보스가 여자에 대해 호감을 느끼거나 홀린 걸 본 적은 없는 것 같긴 해.
저 엘리자베스만 해도 굉장한 미인인데 저렇게 인상을 팍팍 써가며 투닥거리고 있으니.
하긴, 나이 차가 10년 이상이니 여자로 볼 수도 없겠지만.
아닌데, 30년 이상 나이 차가 나도 연애하는 사람 많던데.
아, 내가 지금 왜 이런 걸 걱정하지?
재준과 엘리자베스가 대충 말싸움이 정리됐는지.
“암튼 나랑 같이 뱅가모에 가 보자.”
“흥, 저도 그러려고 했어요.”
윌켄이 둘의 의견일치에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뱅가모에 볼일이 있습니까?”
재준과 엘리자베스가 윌켄을 쳐다봤다.
그리고 엘리자베스가 윌켄에게 말했다.
“우리 아기 때문에요.”
“네?”
“뱅가모의 첫 배양 세포가 우리 아기거든요.”
“아니 지금 무슨 짓을…….”
“뱅가모 연구소장님이 여기 아저씨 유전자와 제 유전자가 꼭 필요하다고 해서 기부했어요.”
“네?”
윌켄은 이제 재준이 하는 일에 더는 놀랄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새로운 싸이코가 나타났다.
“강력한 정신력을 가진 유전자가 필요하다고 해서.”
“그러면 아기가 태어났을 때는 어쩌려고요? 둘이 결혼이라도 하는 건가요?”
윌켄!
엘리자베스가 윌켄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무슨 과학 실험 한 번 한 거 가지고 결혼을 해요. 아기가 나오면 제가 데려가서 키우면 되죠.”
“그 배아 지금 어딨습니까?”
“여기.”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배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니야.
보스 옆에 있더니 엘리자베스도 정상인 범주를 벗어난 게 분명해.
“아기가 태어나면.”
“키운다니까요.”
“그럼 결혼을 해야.”
“안 한다니까요.”
혼미하다. 혼미해.
저절로 고개를 내젓는 윌켄을 심드렁하게 바라본 재준이 엘리자베스에게 말했다.
“가자, 뱅가모로.”
“오케이.”
둘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며 윌켄과 펠그리니는 자신도 모르게 뒤를 따라갔다.
이건 꼭 따라가서 확인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