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7화 여기서부터 여기까지(1)
“이게 다 무슨 말이냐?”
최선실이 돌아가고 임병달은 간신히 정황만 파악했을 뿐,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재준에게 물었다.
“아, 방금 저 여자가 대통령의 비선입니다.”
“비선? 비공식적인 라인이란 말이잖아. 근데 얼마나 해 먹었으면 너에게 무릎까지 꿇어?”
“많이 해먹은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가 대통령보다 높다고 믿고 있는 게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그 증거들이 저 태블릿에 있는 거야?”
임병달은 최선실이 놓고 간 태블릿을 가리켰다.
“해 먹은 거보다 훨씬 중요한 자료가 들어 있습니다.”
“그래? 그게 뭔데?”
“나중에 할아버지가 보시고 판단하세요.”
“뭘 판단해?”
“저걸 언론에 가져다 줘야 할지 말아야 할지.”
“싫다 이놈아! 어디 또 할아비한테 짐을 지워주려고.”
“전 또 미국에 가야 하지만 할아버지는 한국에 계속 사실 거잖아요. 그러니까 한국의 미래를 위해 할아버지가 결정하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저 한국에 계속 있을 겁니다.”
“그래도 싫다.”
“그럼 제가 저 태블릿을 들고 메가폰 한번 잡을까요? 광화문 광장에서.”
헉!
그건 안되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저놈을 보면 신나서 몰려들 게 확실해.
대통령의 비선이네 뭐네 떠들어 대면 기자들도 몰릴 거고.
그럼 내가 또 한차례 현재증권과 연관이 있다고 해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게 되잖아.
안 돼, 아주 지긋지긋해.
“알겠다. 내가 살펴보고 언론사에 전해 줄게. 넌 미국 가라.”
“거봐요. 할아버지가 하시는 게 낫죠?”
끙.
임병달은 세상이 일그러지는 기분이었다.
단지 언론사에 태블릿 하나 전달하는 것뿐인데.
아무래도 앞으로 큰 무언가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질 것만 같은 느낌.
이런 거지 같은 기분을 느끼는 임병달에게 재준이 큰 무언가를 하나 더 얹으려 빙글 웃는 게 보였다.
“너, 왜 웃어?”
“뭐가요?”
“방금 웃었잖아. 그 웃음 내가 모를 것 같아? 사고 칠 때마다 그렇게 웃었어. 지금부터 아무것도 하지 말고 미국으로 가라.”
“안 돼요. 할 일이 있습니다.”
“아니야. 하지 말고 그냥 가.”
“안 된다니까요. 그게 그렇게 쉽지 않아요.”
“그냥 가라니까.”
음.
“아니야, 이건 저보다는 할아버지가 해 주세요.”
“뭘?”
“북한에 증시를 만들어 주세요.”
“뭐?”
“북한에도 증권 시장을 만들어 달라고요. 이건 할아버지가 잘 알고 계시잖아요.”
“증권 시장이라…….”
1970년대 혼란한 투기적 주식시장을 지나 1980년대의 코스피 지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몸소 겪은 임병달이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증권 시장을 만드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북한에 증권 시장을 만드는 건 아주 무지막지하게 힘든 일이다.
그런 일을 그저 잘 알고 있다고 해서 만들 수 있는 게 아닌 걸 뻔히 아는 놈이 자신에게 짐 덩이를 턱 하니 올리고 빙글거리고 있었다.
“안 돼. 미국에서 손을 쓰라 그래.”
“할아버지. 투마로우 시티에 있는 기업들 북한 증시에 모두 올라갈 텐데. 괜찮겠어요?”
“모두? 그게 뭐?”
“생각해 보세요. 북한 증시가 개장되면 증권사가 몇 개나 생길 것 같아요. 한 개밖에 없어요. 은행도 한 개, 증권사도 한 개. 뭐 나중에 다들 몰려오겠지만. 일단 시장을 선점하는 기업은 우리가 해야죠.”
“한 개?”
그러네. 한 군데서 그 많은 물량을 독식하는 거네.
“근데 북한도 국가인데 개인적인 기업에게 증권 시장을 맡길까?”
“할아버지, 미국 같은 큰 국가도 연준에게 다 맡기고 있어요.”
“연준.”
그러네. 이게 꼭 국가가 하라는 법은 없네.
해 볼 만하긴 해.
“알겠다. 내가 힘 좀 써 보마.”
어, 뭔가 이상한데.
자꾸 일이 많아지는 느낌이잖아.
그렇다고 안 할 수도 없고.
애매한 기분이 드는데.
“그리고 투마로우 시티에 진출할 한국 기업들 상담도 맡아 주세요. 가이드라인은 제가 알려드릴게요.”
“어. 상담도?”
“너무 바쁘시려나? 상담은 제가 할게요.”
“뭐? 네가?”
상담?
아니야, 저놈이 무슨 상담을 하겠어.
협박을 하겠지.
그러면 전부 나에게 달려와 하소연을 할 테고.
“안 돼. 그냥 내가 다 하마. 내가 다 해.”
“정말요? 바쁘지 않으시겠어요?”
“나도 아랫사람 많다. 정 행장도 있고. 내 걱정은 말고 네 할 일이나 해라.”
“네, 뭐 이렇게 제 걱정을 해 주시니 전 제 일을 할게요.”
“그래, 이제 미국에 가는 거냐?”
“아니요. 일단 중국으로 가야죠.”
“중국?”
“네, 거기 투마로우 자산이 몽땅 파괴되었잖아요? 그거 물어내라고 해야죠.”
“누구한테?”
“누구긴요. 시앙핑과 푸챠르죠.”
“그게 그렇게 달라고 하면 그놈들이 막 준대?”
“안 주면요. 전쟁 한번 더 해야 할 텐데요?”
“전쟁?”
“그 전쟁 제가 일으킨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이놈아, 그런 건 조용히 가슴에 묻어 두는 거야.
그렇게 떠드는 게 아니라.
***
투마로우 시티.
재준은 한창 공사 중인 건물들을 바라보며 창가에 서 있었다.
“대충 정리가 되어 가는구나.”
북한이 변하는 건 좋은 일이었다.
다만 위협적인 태도를 버리는 게 선행되어야 하지만.
북한에 이런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 세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김정은이 아직은 변화를 밀어붙일 만한 능력이 충분했고 체제가 바뀐 것도 아니었다.
여전히 공산주의에 맞게 모든 이익은 노동당에 집약되어서 인민들에게 그들만의 방식으로 재분배되었다.
“오래가진 못하겠지.”
아무리 노동당이 인민에게 호의를 베풀어도 윗대가리들이 더 배부른 건 사실이니까.
그리고 천천히 자본주의에 대한 환상이 현실이 되길 바랄 것이다.
자본주의가 그렇게 썩 좋은 제도는 아닌데.
그렇다고 사회주의가 좋다는 건 아니다.
어쩌면 새로운 인류가 유전 공학으로 만들어지고 생명 연장이 보편화되면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전혀 새로운 세계가 펼쳐질지도 모른다.
“그게 더 나을 수도 있어.”
재준은 진짜 그런 세계가 왔으면 했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똑똑.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박혁이 들어섰다.
재준은 손을 들어 소파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이제 끝난 건가?”
“네, 저희는 러시아에서 손을 뗐습니다.”
“홍커는?”
“그쪽도 손을 뗐습니다.”
“이제 러시아는 됐고.”
후.
재준의 말에 박혁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전쟁이란 항상 사람을 공포에 떨게 만든다.
하물며 잠시라도 머리 회전을 멈추면 바로 추적당하는 사이버 전쟁의 당사자들은 공포에 긴장이 더해졌다.
“북한도 꽤 자유로워질 거고.”
자유라는 말에 박혁의 볼살이 움찔 흔들렸다.
“북조선에 그런 일이 정말 일어납니까?”
“왜? 안 될 것도 없잖아.”
“전 아직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북한에서 30년을 산 자신의 경험에, 70년을 산 아버지의 이야기도 들어보았다.
외부에서 의미하는 자유와 북한 내에서 알게 된 자유가 다르다는 것은 24살 때 해외에 나가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딱히 자유로워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자유로운 인간은 게을러지게 마련이니까.
북에서 게을러지면 주변에 민폐를 끼치게 된다.
그게 죽기보다 싫었다.
북한 밖에 있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서로를 감시하면서 산다고 알고 있다.
감시, 풋.
다 옛말이다.
굶어 죽거나 병들어 죽는 게 다반사인데 남의 사생활이나 훔쳐보면서 사는 게 어디 가당키나 한가.
자유니, 감시니 하는 것들은 다 배부른 투정에 불과했다.
“북조선은 자유보다는 돈이 필요합니다.”
“돈은 곧 충분히 들어올 거니까 걱정 마.”
“충분히요?”
“그럼, 자 이리 와 봐.”
재준은 창가로 가서 수백 개의 건물이 올라가는 정경을 가리켰다.
“장관이지. 앞으로 더 많은 기업이 여기로 몰릴 거야.”
후우.
“그전 개성공단도 많은 기업이 있었지만, 인민들 생활은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입만 고급이 되어서 그들이 철수하고 그것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십니까? 그놈의 초코파이.”
하하하.
재준이 박혁의 말에 크게 웃었다.
“그렇지, 맞아. 사람한테 제일 간사한 게 입맛이지. 그거 몇 번 먹었다고 단숨에 삶이 업그레이드 된 것 같아지고. 알지, 알아.”
뚱한 표정의 박혁을 보고 재준이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하지만 이번엔 달라. 전 세계 부자들이 살고 싶어서 북한을 찾을 거야. 돈을 보따리로 짊어지고 말이야. 이곳은 인공지능과 로봇이 대부분의 일을 처리할 거고. 어쩌면 전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곳이 될지도 몰라.”
“그 정도입니까?”
“그렇지. 그래서 네가 해 줄 일이 많아.”
“그 일이 뭡니까?”
또 해킹할 곳이 있나?
“뭐야? 그 심각한 표정은. 내가 또 범죄라도 저지르라고 시킬까 봐 그런 거야?”
“범죄는 아니라도.”
“아니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 넌 여길 지켜야 해. 물론 최고의 보안 전문가들이 각자 자신의 기업을 지키려고 할 거야. 네가 할 일은 여길 해킹하는 놈들을 끝까지 추적해서 정체를 밝혀내는 거지. 어때, 재밌겠지.”
흐흐흐.
박혁의 웃음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입안을 맴돌았다.
“만약 그게 국가라면요.”
“그게 무슨 상관이야. 국가든 기업이든 다 털어서 공개해 버리는 거지.”
해커를 쫓는다.
“그런 일이라면 해 볼 만 합니다.”
“좋아. 그 자신감. 그리고 또 다른 집단도 만들었으면 좋겠어.”
“집단이요?”
음.
재준이 손으로 자신의 턱을 만지작거렸다.
“전 세계에 흩어진 해커들을 결속시키는 거야. 불의에 대항하는 불의한 집단 같은 거. 왜 있잖아. 악당을 잡는 악당.”
“법이 어쩌지 못하는 범죄를 단죄하라는 겁니까?”
“그렇지. 아나키즘을 표방하며 자유를 탄압하는 독재 정부와 자유와 사회 정의, 법의 투명성을 훼손하는 범죄에 단호히 맞서는 거지. 어때, 멋있지 않아?”
박혁은 두 눈을 껌뻑껌뻑 이며 재준을 ‘별 미친 소리를 다 듣겠네’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딴 일을 왜 합니까?”
“왜 하긴. 그래야 해커들을 규합할 수 있잖아. 그리고 아까 말했잖아. 국가든 기업이든 털어야 한다고. 근데 너보다 좀 센 놈이면 어떻게 할 거야. 그럴 땐 다른 손을 좀 빌려야지.”
엥?
그럼, 결국 투마로우 시티를 보호하기 위해 전 세계 해커들을 공짜로 부려먹겠다는 거잖아.
“그들이 힘을 빌려줄까요?”
“당연하지.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부터는 아주 쉬워. 일단 독재자 한 놈만 넉다운 시켜 봐. 너도나도 하려고 달려들걸. 원래 해커들이 그렇잖아. 실력을 발휘하고 싶은데 할 곳이 없는 천재들이잖아.”
박혁은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여겼다.
자신만 해도 해킹을 시작하면 오직 성공을 위해 무슨 짓이든 했으니까.
돈을 벌고 안 벌고는 나중 문제였다.
해커에겐 실패했다는 소리가 죽기보다 싫은 법이다.
그리고 언론에 성공했다는 소식이 퍼지면 그 희열은 말로 하기 힘들 정도였다.
“일단 해보겠습니다.”
“자, 그리고 이거.”
재준이 핸드폰에서 사진 하나를 띄워 보여주었다.
“이건 가이 포크스 가면이잖아요.”
“이게 바로 해커 집단의 상징으로 쓰일 가면이야.”
“이걸 쓰고 뭐해요?”
재준이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고 한 손을 자신의 얼굴의 반을 가렸다.
“영상을 찍는 거지. 우린 어나니머스다(We are Anonymous). 누구누구를 단죄하기 위해 디도스 공격을 감행하겠다. 이렇게.”
“어나니머스요?”
“어때, 내가 생각해낸 이름인데. 맘에 들어?”
어나니머스가 2013년에 활동을 시작했다.
어디선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해커가 알면 버럭 화를 내겠지만 뭐, 어떤가, 결국은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해커가 또 존재한다고 좋아할 텐데.
단, 이름을 빼앗겼다고 생각하려나?
아니지, 애초에 어나니머스가 익명 사용자의 기본 이름인데.
박혁은 재준의 말에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