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6화 역시 구경은 싸움 구경, 불구경이지(9)
러시아 크렘린궁.
후.
푸챠르는 지난 기억을 되짚으며 후회를 하고 있었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지?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
국가 전체는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전쟁으로 인해 분위기는 뒤숭숭하고 일 년 예산에 해당하는 돈을 전쟁 비용으로 중국 땅에 처박았다.
아직도 은행과 기관의 전산망은 해커의 공격에 대응하느라 정상적인 작동이 불가능했고 국민 대부분은 인플루엔자의 공포에 외출은커녕 가족끼리도 얼굴을 맞대길 꺼렸다.
정상적인 업무가 이루어지는 게 불가능했다.
유럽과 교류는 이제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철저한 통제 속에 진행되어 마치 죄인이 된 느낌이었다.
“인플루엔자는 어때?”
“다행히 잡혀가고 있습니다.”
“사망자는?”
“음. 워낙 치사율이 낮습니다. 현재 십만 명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러시아 인구 1억 5천만 명이니 인구 대비 치사율은 0.1%.
인플루엔자에 걸린 사람만 따지면 1%가 되려나.
그런데 치사율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다.
전쟁 치렀지, 전염병 번져서 골골거리지, 해외에 나가는 건 고사하고 여행 자체가 거부당했다.
국민들은 푸챠르라면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
미쳤지.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건가.
“중국은?”
“사망자가 백만 명정도 추산되고 있습니다.”
딱 인구대비 10배다.
“그쪽도 만만치 않네. 병신들.”
누가 병신인지 모르겠지만.
참.
“금은?”
“중앙은행에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그나마 다행이네.”
그나마 자존심은 지켰다.
“죄송합니다.”
마카르는 자신의 잘못이 아닌데도 푸챠르에게 고개를 숙였다.
“네가 왜 죄송해? 다 임재준 그 새끼 때문이지. 그놈이 금만 중국으로 빼돌리지 않았어도. 아니지, 중국이 새끼들이 해킹만 안 했어도.”
하여튼 공산국가 병이다 병.
어떻게든 핑계 대는 병.
“우크라이나도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빌어먹을, 그놈들도 기어오르는 건가?”
“크림반도 반환 시위가 격해지고 있습니다.”
“거기까지는 안 돼. 찍어 눌러.”
“네.”
성가신 놈들.
“북한은 어때?”
“한창 건물이 올라가는 중입니다.”
전쟁을 치르느라 북한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면서 미국과의 관계가 개선될 여지가 마련되었다.
아니다. 투마로우 때문에 완전히 좋아졌다고 봐야 했다.
북한 접경지대에 병력을 강화해야 하나.
아닌가, 북한이 병력을 강화하려나.
아, 머리야.
이제 북한이 러시아보다 잘 살게 생겼네.
옛날과 다르게 오히려 우리한테도 큰소리치겠어.
아니 어쩌다 사회주의 대표인 세 나라가 이 지경이 된 걸까.
문제는 맨 처음 생긴 시점에서 다시 더듬어 봐야 해결책이 나오는 법이다.
푸챠르는 마카르에게 다가오라고 손짓을 했다.
“임재준에게 만나자고 연락해.”
“임재준이요?”
“뭔가 북한에 발이라도 걸쳐야 할 거 아냐?”
그럼, 김정은을 만나야지 왜 임재준을 만납니까?
또 무슨 무서운 일을 당하시려고.
마카르의 이마에 주름이 늘었다.
***
중난하이.
“아니, 정말…….”
시앙핑은 어이가 없어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인플루엔자는 러시아에 퍼뜨렸는데 그게 러시아군을 통해 다시 중국으로 들어오더니 중국 전역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사망자도 러시아보다 열 배가 더 나왔다.
“딩쉐이, 어쨌든 수습은 잘되고 있는 거지?”
“네, 백신은 이미 만들어져 있어서 빠르게 생산 중입니다.”
그러게, 하지 말자고 했잖아요.
그나마 우리가 뿌린 걸 눈치 못 채서 다행이지 진짜 큰일 날 뻔했습니다.
“빌어먹을 러시아. 그놈들은 뭐해?”
“국가 전산망 교체하느라 정신이 없을 겁니다.”
“홍커는?”
“공격에 가담했던 이들은 모두 대만과 홍콩을 거쳐 필리핀에서 조직을 정비할 계획입니다.”
혹시나 하는 맘에 필리핀에 흔적을 남기고 사라져야 한다.
만에 하나, 중국이라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
“북한은 어때?”
“전 세계 과학 기술이 응축된 느낌입니다.”
“뭐? 응축?”
시앙핑의 눈매가 찌그러지며 딩쉐이를 노려봤다.
지금 나한테 북한 광고라도 하겠다는 거야, 뭐야?
시앙핑의 기분을 모를 리 없는 딩쉐이였다.
“죄송합니다.”
“아니야, 그 정도로 몰렸다는 거잖아.”
“네, 솔직히 놀랐습니다. 이렇게 많은 기업이 몰려들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만큼 각국에서 과학 발전에 반대하는 쓸데없는 인간들이 많았던 거야. 그거참, 우린 왜 이런 걸 생각하지 못했을까.”
중국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윤리니 법이니 하는 건 있으나 마나 한 것이고.
“주석님, 저희도 인구가 14억입니다. 중국 안에 북한과 같은 과학 단지를 만들 수 있습니다.”
“중국 안에?”
그렇지. 14억 인구 중에 똑똑한 놈들 선별해서 과학자로 키우는 거야 어렵지 않지.
문제는 앞선 기술인데.
“홍커들 언제 들어오지?”
“1년은 걸릴 겁니다.”
“그래? 그럼 러시아는 대충 마무리하고 필리핀에서 북한 투마로우 시티를 해킹하라고 해. 어떤 것도 좋으니 기술을 빼 와.”
“주석님.”
딩쉐이는 요즘 부쩍 목소리를 높이는 횟수가 많아졌다.
“왜?”
“임재준과 또 엮이게 됩니다.”
“해킹은 달라. 우리가 했는지 어떻게 알겠어?”
“너무 뻔하지 않습니까? 기술 도둑질은 북한과 중국밖에 없는데 북한을 해킹하면 중국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른다고 발을 빼면 돼. 한두 번도 아니고.”
시앙핑은 자신이 생각해도 대견하다는 듯 양쪽 입꼬리를 올렸다.
딩쉐이는 시앙핑을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가 봐도 중국이라고 알 텐데.
***
현재증권.
청와대에서 웬 여인이 찾아왔다.
임병달과 재준은 자리에서 일어나자 그 여자가 임병달에게 다가와 속삭이듯 말했다.
“대통령님을 대신한 최선실입니다. 오늘은 비공식 만남이니 편하게 합시다.”
임병달의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예전부터 대기업들 사이에 들려오던 대통령의 그림자라는 여인에 대해선 이미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터라 거부할 수 없다고.
“그럽시다.”
모두 자리에 앉았다.
풉풉.
재준은 자신을 최선실이라고 소개한 여인을 보고 새어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너구나, 나도 신문으로만 보았는데.
무엇을 가지고 있기에 대통령을 쥐고 흔드는지 볼까?
우선 아예 무시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
최선실은 재준이 비웃는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뭐가 그렇게 우습죠?”
재준이 상관하지 말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왜 오셨어요? 뭐 설마 북한을 돕지 말라 그런 말 할 거면 그냥 가세요. 그럴 맘은 없으니까.”
“그런 뜻은 없지만, 당신 말투가 상당히 거슬리는데요. 어차피 한국인이면 정부에 협조하는 게 좋을 텐데요.”
“한국인?”
“그래요.”
“그럼 한국 국적을 버리면 되는 건가요? 그리고 무슨 정부의 협조? 정부가 내가 하는 일에 방해만 했지 도움을 준 기억이 없는데.”
“뭐요?”
“이봐요. 최선실 씨. 당신 직책이 뭡니까?”
“뭐요?”
“아니, 직책도 없는 사람이 대통령을 대신하네 마네 하냔 말이에요?”
최선실은 재준을 보고 입꼬리를 올렸다.
“당신이 임재준인가? 한번 만나보고는 싶었는데 상당히 거슬리네.”
“말 놓지 맙시다. 어디서 은근슬쩍 반말하려고 그래요?”
“역시, 뭘 모르고 뛰는 망아지 같아.”
큭큭큭.
“서로 이야기가 안 되는 것 같은데. 그만 가세요.”
“정말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나?”
음.
“후회라…….”
재준이 말을 멈추자 최선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네까짓 기업인 정도가 어딜 감히.
“이제 말이 되려나?”
“아니요. 당신이랑은 말을 나누고 싶지 않은데요. 직책도 없는 일반인과 무슨 대화를 합니까? 나중에 오리발이라도 내밀면 나만 손핸데.”
“그럼. 그만두죠.”
어쭈 강단은 있는데.
그럼 돈을 잡고 물고 늘어져 볼까?
최선실이 대화를 중단하고 일어서려는데,
“아, 대통령에게 잘 전하세요. 당신 때문에 한국 기업은 북한에 발도 못 들여놓는 거라고.”
“이건 어디까지나 당신이 선택한 거야. 나한테 책임을 떠넘기지 마.”
“그러니까요. 내 책임이든 당신 책임이든 한국은 과학 기술 분야에서 한참 뒤떨어지게 된다는 건 변함이 없어요. 그렇게 되면 마루스포츠재단에 기업들이 기부를 하려나?”
“…….”
최선실은 뒷머리에서 감지된 차가운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뻗어 나가는 걸 느끼며 재준을 노려봤다.
이놈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모르면 됐어요. 아, 돌아가면서 대통령 연설문에 내 이야기는 집어넣지 말아요. 기분 더러우니까.”
“뭐?”
“뭘 자꾸 놀라는 척하는 겁니까? 거기 손에 들고 있는 태블릿에 대통령 연설문 초안이 있잖아요. 당신 손보고 대통령이 발표할 거. 맞죠?”
최선실의 시선이 자신이 들고 있는 태블릿으로 천천히 옮겨졌다.
약간 기괴하기까지 한 표정으로.
다시 재준을 향해 비릿하게 웃으며 입술을 핥았다.
“꽤 흥미로운 사람이군요. 당신.”
“어, 이제야 존대를 하네요. 역시 그냥 짚어 봤는데. 정말 대통령 연설문이 있긴 있었구나.”
“어디까지 알고 있는 겁니까?”
“글쎄요. 대통령이 당신을 무척 아낀다는 정도?”
“그 입을 다무는 게 신상에 좋을 겁니다.”
큭큭큭.
“내가 꽤 많이 알고 있긴 하지. 아직 재미난 이야기는 시작도 안 했는데요. 평창군 땅은 아직 안 팔고 있죠?”
“너.”
‘너’라는 말 다음으로 다른 말이 입 밖으로 나와야 하는데 혀가 움츠러들며 목구멍에서 숨이 턱 하고 막혀버렸다.
“원하는 걸 말해봐요.”
“그 태블릿 놓고 나가세요.”
“안 돼.”
“그럼 문화체육부 장관부터 모가지를 날려야 말을 듣겠어요?”
“임재준, 대단하다고 알고 있는데 다르긴 다르네요.”
“외환 반출.”
“그래도 이건 안…….”
“미얀마 ODA 사업.”
탁.
태블릿을 탁자 위에 놓았다.
그리고.
턱.
최선실이 재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살려 주세요.”
재준의 눈에 학질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부들부들 떨고 있는 최선실이 들어왔다.
“아니, 이러면 꼭 내가 당신을 죽이려는 살인마처럼 보이잖아요? 난 사람은 못 죽여봤는데.”
“지금까지 모든 일 덮어 주면 원하는 걸 얻게 해 드리겠습니다.”
흠.
고민이네.
여기서 최선실에게 경고를 해야 하는 걸까, 아니면 대통령에게 경고를 해야 하는 걸까?
이러면 역사의 중요한 사건 하나가 사라지는 건데.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사건 하나는 막아야겠지.
“지금 당장 대통령에게 전화해서 나 바꿔 주세요.”
“네?”
“전화하라고, 전화. 당신하고 대통령하고 연락 주고받는 핸드폰이 있잖아요. 그걸로 전화를 거세요.”
꿀꺽.
이 인간 모르는 게 없다.
최선실은 핸드폰을 꺼내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만요.”
여기.
최선실은 두 손으로 공손히 핸드폰을 건넸다.
“네. 임재준입니다.”
-뭐 하는 거죠?
“아, 내가 최선실을 좀 협박했습니다.”
-그러니까 왜 협박을 했습니까?
“하나만 말할게요. 인천항과 제주항을 오가는 모든 여객선 전수 조사하세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아주 싫어하는 놈들이 있거든요. 내일부터 바로 시작하면 좋겠습니다. 그럼, 투마로우 시티에서 일하는 한국 기업을 볼 수 있게 될 거예요.”
-지금 그깟 여객선 조사를 하라고 대통령에게 말하는 겁니까?
이 사람이 정말 고마워해야 할 판에 거들먹거리기는.
“왜, 싫어요?”
-…….
“싫으면 없던 일로 하고요.”
-아니요. 하겠습니다.
할 거면서 뜸 들이기는.
“잘하셔야 할 겁니다. 아주 잘 하셔야 해요. 대충하지 마시고 꼼꼼하게.”
-제가 직접 내려가서 보겠습니다.
그래야지.
그래도 자리에서 내려오는 건 변함이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