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7화 이게 금괴야. 난 이걸 쓰레기라고 부르지(18)
하얼빈시.
“아저씨, 어떻게 이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를 수 있죠? 내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엘리자베스는 식사 후 차를 마시며 재준에게 물었다.
“어떤 점에서?”
재준은 빙글 웃으며 엘리자베스에게 되물었다.
“2,200억 달러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에요.”
“아, 돈의 크기? 겨우 2,200억 달러에 호들갑은. 미국 일 년 예산이 얼마인지 알아?”
“4조 달러요.”
“그럼 미국 대통령은 4조 달러를 보고 너처럼 깜짝 놀라던가?”
“그건 대통령이니까 그런 거잖아요.”
“맞아, 자기 돈이 아니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그럼 너도 네 돈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되잖아. 돈에 감정을 실으면 1억 달러도 많게 보이는 거야. 너 카킬에서 매년 배당을 받으면서 적다 많다 생각해?”
그런 적 없다.
들어 올 돈이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4억 달러나 되는 돈이 매년 들어오는데.
“음, 이해가 될 것 같긴 하네요.”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이나 많다고 느끼는 거지, 익숙한 사람들은 돈에 대한 감각이 없다고 봐야지. 나처럼.”
하하하.
왜 웃어?
“그럼, 가짜 금은요? 이건 엄연한 사기인데. 이것도 익숙해서 저지른 건가요?”
“그건 익숙한 문제가 아니지. 전략과 전술이라니까. 목표를 정하고 달성하려는 행위일 뿐인데. 우린 전쟁 중이잖아. 만약 사기라면 러시아가 투마로우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을 걸겠지. 우리 방어하면 그만이고. 전술을 펼칠 때 사기일까 아닐까 생각하면 투자은행은 할 일이 없는데. 안 그래? 투자은행 상품은 다 사기야. 선물도 다 사기고.”
“선물이요?”
“그럼, 국가 인정했다고 해서 사기를 사기가 아니라고 할 순 없잖아. 선물이 뭐야? ‘오를 것이다’ 혹은 ‘내릴 것이다’에 돈을 거는 건데. 이건 얼마든지 조작이 가능한 거 아냐? 오늘 퀴니코에게 광물 선물 지수 콜에 투자하라고 했잖아. 그리고 나는 광물을 중국 항구에 잔뜩 쌓아 놓고 있어. 자, 그럼 광물 가격을 올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네? 또 수작을?”
“그러니까, 증권에 관련된 것은 전부 사기라고.”
“그래도 진짜 금을 보내주기로 하고 가짜 금을 보낸 건 엄연한 범죄행위예요.”
“또, 또. 범죄행위는 당한 상대가 소송을 걸어야 성립되는 거라니까. 러시아를 봐. 가짜 금을 받고도 만족하잖아. 아무런 문제가 없다니까. 정 억울하면 나한테 따지든가. 근데 전화 한 통 없지. 신기하지 않아?”
음.
엘리자베스는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
어째 속은 기분이 드는데.
러시아가 만족하는 게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가만히 있는 거 아닌가?
아리송한 표정의 엘리자베스에게 재준이 말을 이었다.
“이번 일 같이 국가를 상대할 때는 일반적인 법을 들이밀면 안 되는 거야.”
“왜요?”
“그 일반적인 법을 만드는 게 국가잖아. 뭐든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놈하고 싸우는데 나도 내 맘대로 해야 싸움이 되지 않겠어? 고객을 위해선 뭐든 해야지. 러시아가 올리가르히와 그 가족들을 다 죽이려고 했잖아. 물론 올리가르히를 두둔하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나한테는 고객 비스무리한 건데. 나의 고객에게 해를 가하려는 놈들은 그만한 처벌을 받아야지. 물론 이 처벌도 내가 정한 거지. 국가가 법을 만들 듯이. 이해되나?”
“아니요. 절대 이해 안 돼요.”
“안 되면 말고.”
음.
“아니 애초에 이런 일을 저지를 수 있는 배짱이 있다는 게 신기하긴 해요. 나 같으면 처음부터 두려움에 저지를 용기도 없어요.”
“그렇지. 그게 나도 신기해.”
생각해 보니 그래.
도대체 이런 행동을 거리낌 없이 하는 나는 누굴까?
이제 차강진이라고 하기엔 너무 나쁜 놈이고 임재준이라고 하기엔 너무 똑똑하다.
둘이 섞였다고 하기에도 스케일이 너무 크고.
암튼 신기한 인간이 되어 버렸어.
“이제 중국에 있는 금으로 뭘 할 거예요?”
“중국 희토류 기업 주식으로 바꾸기로 했어. 이미 중국에서 희토류 기업 통합 작업이 시작되었고 우리 팀에서 계약을 할 거야.”
“정말로 그 많은 금이 안 아까워요?”
“아까워?”
재준은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띄웠다.
사진엔 헤이룽장성 13개의 은행에 정말 산처럼 쌓여있는 금괴가 있었다.
“이게 금괴야. 난 이걸 쓰레기라고 부르지. 생산성이 제로거든. 이런 걸 사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 불쌍하게 보일 정도야.”
“그래요?”
“그럼, 금은 아무것도 해 주지 않아. 근데 이걸로 내가 기업의 주식을 사면, 그 기업은 매년 열심히 성장해서 나한테 돈다발을 꼬박꼬박 안겨 주지. 금은 뭐 일이나 한대? 물론 매년 물가가 오르니 금값도 올라가겠지만 기업이 벌어다 주는 돈에 비하면 새 발의 피지.”
“그런가?”
“아니, 카킬 주식을 5%나 가지고 있는 네가 그럼 안 되지. 너 당장 카킬 주식을 금으로 바꿀 수 있어?”
“아니요. 절대.”
“거봐, 네가 왜 금하고 바꿀 수 없는지 잘 생각해 보면 답이 되겠네.”
“그렇긴 하네요.”
카킬 주식은 절대 줄어들지 않으면서 배당을 가져다주지만, 금은 배당을 주지도 않고 조금씩 팔다 보면 언젠가는 다 없어지겠지.
“임 대표.”
강호석이 들어오면서 재준을 불렀다.
그 뒤로 매서운 눈매의 박민수가 따라 들어왔다.
재준은 둘에게 반갑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강 선배. 중국하고 계약은 잘 마무리되었어요?”
“응, 상하이 증시에 상장하는 주가를 기준으로 20%를 가져오기로 했어. 더 이상은 무리라고 하더라고. 그리고 우리 돈이 많이 남길래, 중국 광물 업체들 몇 군데 주식을 더 받을 거야. 물론 상하이 증시 상장사 중에서.”
“수고했네요.”
“이제 중국을 떠나야 할 것 같아.”
“그래야죠. 이제 러시아가 득달같이 달려올 것 같기도 하고.”
“러시아?”
엘리자베스가 재준을 보고 외쳤다.
“아니라면서요?”
“그랬지.”
“근데 러시아가 왜요?”
“금을 내가 가지고 있을 때는 러시아가 꼼짝 못 하지만 중국으로 넘어가면 상황이 달라지잖아.”
“중국이 더 무서운 거 아니에요?”
“무슨 소리, 투마로우는 미국 회사야. 미국 자산일 때와 중국 자산일 때는 엄연히 다르지. 미국이 중국 편을 들어주진 않을 테니까.”
“그게 그렇게 되나요?”
“그래, 빨리 도망가야지. 잘못하다간 불바다 한가운데 놓일 수 있어.”
“정말 둘이 치고받고 싸워요?”
“당연하지. 일단 한쪽은 성질나 있고 한쪽은 실실 쪼개고 있는데. 웃고 있는 놈이 꼭 성질난 놈을 비웃는 것 같잖아. 안 그래? 그러니 일단 성질 나쁜 놈이 한 대 쥐어박겠지.”
“어디로 도망쳐요?”
“바로 옆으로. 일단 한국으로 가야지.”
“왜 하필 한국이에요?”
“항구에 광물이 산더미로 쌓여 있잖아. 그거 가지고 멀리 갈 수 있겠어? 한국으로 가져가서 쌓아놔야지. 그리고 소문을 쫙 내는 거야. 광물 공급에 차질이 생겼다. 어때?”
이 도둑놈.
광물 선물에 콜을 걸어 놓고 수작질을.
여기서도 몇십억 달러는 벌겠네.
엘리자베스는 말은 못 하지만 속으로 쌍욕을 끊임없이 외쳤다.
***
중난하이.
시앙핑은 딩쉐이가 가지고 온 계약서를 보고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아주 잘했어. 이걸로 외환 보유고를 대신할 수 있겠어.”
시앙핑뿐만 아니라 중국 주석이 금을 사들이는 이유는 단순히 금을 좋아하는 것보다도 외환 보유고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달러로 채워야 하는 외환 보유고는 금으로도 대체할 수 있다.
얄미운 미국 놈들의 돈인 달러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속이 뒤집힐 만한 일이니 금을 좋아할 수밖에.
“저, 그리고 러시아에서 주석님과 통화를 했으면 합니다.”
“금 때문이겠지?”
“그럴 겁니다.”
“딩쉐이, 네 생각은 어때?”
“임재준과 금에 대한 계약은 아무도 모릅니다. 저희도 모른 척해야 합니다.”
“그렇겠지. 괜히 알고 있다고 이것저것 요구할 게 많아질 테니. 먼저 임재준과 통화해서 이번 중국과 계약은 우리끼리만 아는 거로 하자고 해. 러시아는 내가 통화할 테니.”
“네. 알겠습니다.”
딩쉐이가 밖으로 나가고 시앙핑은 핫라인을 돌렸다.
-오랜만입니다. 주석님. 우선 주석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요즘 심각한 일 때문에 인사가 늦었습니다.
“뭐, 별것도 아닌걸요. 이미 오래전에 내정된 일입니다. 축하받기에도 낯부끄럽습니다.”
-하하하. 그런가요?
“근데 어떤 일로 통화를 원하신 겁니까?”
-네, 솔직히 아시리라 믿습니다. 투마로우 때문에 러시아가 곤란에 처했습니다.
“투마로우가 왜요?”
잠시 푸챠르가 말을 멈췄다.
이 능구렁이가 정말.
모른 척할 걸 모른 척해야지.
-금, 중국에 있는 거 압니다.
“금이요? 무슨 말씀이신지. 금은 러시아로 간 줄 알고 있는데요. 중국엔 없습니다.”
-정말 없습니까?
“네. 없습니다.”
-임재준이 러시아로 금을 실어 보내지 않았습니다. 분명 금은 아직 중국에 있습니다.
“그럴 리가요. 금이 실려 가는 걸 똑똑히 확인했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보내지 않았다니요?”
네놈의 자존심이 가짜 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말할 수 없겠지.
-사실은 금이 아니라 돌을 실어 보냈습니다.
가짜 금이 아니라 돌이라고…….
한심한 놈, 끝까지 가짜를 받았다는 말은 못 하겠다?
“그럼 우리 세관에서 거짓을 보고했다는 말입니까?”
-네, 다시 한 번 확인해 보십시오. 분명 금이 아니었습니다.
“난감합니다. 크림반도로 보냈으니 그쪽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을까요? 전 그쪽이 더 의심스러운데. 보고에 의하면 금이 항구에 도착할 때 러시아는 군을 투입하지 않은 거로 알고 있는데. 아닙니까? 그 전에 군을 투입한 것입니까?”
러시아가 주장하는 군의 투입 시기는 크림반도가 자치를 선언하고 러시아에 도움을 요청한 후였다.
그 전엔 크림반도 땅을 밟지도 않았다고 대외적으로 발표했다.
시앙핑은 군의 투입 시기를 문제 삼고자 물었다.
푸챠르에겐 곤란한 질문이었다.
-크림반도에 도착한 물건은 누구도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금은 없었습니다.
“이상하군요. 여기선 금을 실어 보냈는데 도착하니 금이 없었다니요.”
-금이 아니라 돌이라고요.
푸챠르의 억양이 약간 거세졌다.
“그러니까요. 금을 실어 보냈는데 돌로 둔갑한 거 아닙니까? 그럼 바다 위에서 바뀌었다는 소린데. 해적을 추적해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만.”
-해적, 당연히 추적할 겁니다. 그러니까, 금이 없으니 저희가 보낸 광물을 인도하지 마십시오.
“그건 아니죠. 이미 선하 증권을 가지고 있는 업자에게 어떻게 물건을 양도하지 못하게 합니까? 만약 그렇게 조치를 한다면 중국과 거래하는 모든 나라들이 저희를 믿지 못할 겁니다. 애초에 러시아에서 임재준에게 선하 증권을 건네지 말았어야지요. 지금에 와서 남의 물건을 압류하라는 건 도무지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정말 이러실 겁니까?
“대통령님. 만약 지금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게 돌려주라고 하면 대통령님은 돌려주겠습니까?”
-뭐요?
“지금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러시아가 요구하는 것들이 전부 중국에 해가 되는 일들입니다. 러시아가 하기 싫은 일을 왜 중국이 해야 한단 말입니까?”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 말은 못 들은 거로 하죠. 중국이 잘못 한 게 없는데 그런 말은 협박으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무식하게시리.”
-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