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1화 이게 금괴야. 난 이걸 쓰레기라고 부르지(12)
러시아 크렘린궁.
임재준이 중태에 빠졌다고?
우린 뭐 눈과 귀가 없는 줄 아나?
멍청하기는.
러시아도 당연히 중국에 있는 임재준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받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중국도 러시아를 시시각각 주시하고 있기는 마찬가지였고.
중국 놈들 어디 우리에게 덤터기를 씌우려고.
그렇게 허술하게 당할 줄 알았나?
하여튼 머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놈들이라니까.
근데 임재준은 저격을 왜 당해준 것일까.
중국은 얕잡아 보아도 재준의 피격은 영 거슬렸다.
러시아는 이번 사건에 전혀 개입하지 않았으니 중국 소행이 분명했다.
이상한 보고도 있었고.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 임재준을 낚아채서 총탄을 피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알고 있었다는 소린데.
설마 임재준, 중국과 손을 잡고 자작극을 벌인 건가?
그리고 러시아를 배후로 지목하고 우리가 손을 쓰지 못하게 한 후에 무얼 하려고?
중국은 또 무슨 이득이 있길래.
어쨌든 결론은 대금을 지불하지 않고 금을 손에 넣겠다는 건 변함이 없겠지.
“비서실장.”
“네.”
“올리가르히들 전부 데려와.”
“네.”
비서실장이 빠르게 움직여서 밖으로 나가자 묘한 표정을 지으며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그럼, 우리가 먼저 움직인다.
잠시 후.
초췌한 몰골의 올리가르히 여덟 명이 비서실장에 이끌려 왔다.
하나같이 차라리 죽었으면 하는 얼굴들에서 이미 삶의 포기를 읽을 수 있었다.
한때 러시아를 주름잡던 올리가르히라고 볼 수가 없었다.
푸챠르는 그들을 보며 자신의 턱을 매만지면서 말했다.
“우리 애국자님들. 요 며칠 잘 지내셨습니까?”
후.
짧은 한숨을 쉰 올리가르히들이 푸챠르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자신들을 다시 불렀는지 그 의미를 읽어 보겠다는 듯이.
지금까지 산 세월이 적지 않은 이들이기에 자신들을 다시 불러들인 것만으로도 무언가 일이 잘 풀리지 않고 있다는 걸 직감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할 일이 있다는 것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말씀하세요. 할 수 있는 일이면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
마지막 끈을 놓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말이었다.
“최선이라. 좋은 태도입니다. 해줄 일이 있습니다.”
“뭡니까?”
“모두 임재준에게 금에 대한 대금을 받으러 중국으로 가 줘야겠습니다.”
중국?
서로의 의아한 시선들이 교차했다.
아직 영국에 있는 걸 모르는구나.
아직은 다행이라 생각했지만,
“중국이 아닙니다.”
알리셰르!
올리가르히 일곱이 멋대로 입을 연 알리셰르를 향해 인상을 구겼다.
그건 마지막 카드라고 이 멍청아.
푸챠르가 나머지 일곱의 표정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하하하.
“자, 자, 여러분. 이렇게 합시다. 2,200억 달러 받아 오면 지금 운영하고 있던 사업체에서 일은 할 수 있게 해 주겠습니다. 뭐, 월급쟁이지만.”
살려는 주겠다.
이걸 믿어야 하나?
미하일이 푸챠르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표정을 읽어 보려 했다.
하지만 금방 자신이 하려던 일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거리라는 걸 알았다.
지금 대통령의 의도를 알아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자신의 돈과 권력이 전부 사라진 지금 대통령에게 맞서기에는 너무나 무기력했다.
그러니,
그냥 주는 대로 받아먹는 개가 돼라.
그래, 개가 되라면 돼 주지.
목숨이 붙어 있어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으니까.
아직은 미하일의 의기가 꺾이진 않았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어딥니까? 돈을 받기로 한 나라가.”
“영국입니다. 이미 중국 국채가 투마로우클레이스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영국. 거기다 중국 국채라. 확실히 자금 세탁은 깔끔하게 처리했네. 역시 임재준다워.”
“자, 그럼. 난 여기서 기다릴 테니. 가급적 빨리 다녀오세요. 중간에 허튼짓이라도 하면 가족들을 안 보는 거로 간주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한차례 푸챠르를 노려본 올리가르히들이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대통령은 사라지는 그들을 보곤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죽이나 나중에 죽이나 상관은 없지.
그나저나 2,200억 달러의 중국 국채라면 뭔가 쓸모는 있겠지.
2012년 중국의 부채는 GDP의 34%인 5조 2천억 달러.
2,200억 달러면 중국을 향해 큰기침 정도는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
중난하이.
“주석을 감축드립니다.”
이제 일주일 후면 부주석은 주석으로 올라선다.
이미 예정된 수순이라 부주석에게는 별다른 감흥이 없었지만, 주변 인물들 특히 태자당에게는 이보다 좋을 순 없었다.
중국 공산당의 삼대 파벌.
상하이방, 공청당, 그리고 현 부주석이 소속한 태자당.
지금까지 주석을 차지한 건 상하이방의 장민, 다음으로 공청당의 후진타였고, 이제 태자당의 시앙핑에게 주석의 자리가 돌아왔다.
원래 상하이방에서 주석이 나와야 하지만 공청당이 죽기를 각오하고 반대를 해서 태자당에게 기회가 주어졌다.
상하이방이나 공청당에서는 주석 자리를 잠시 태자당에게 줬다 다시 빼앗을 속셈이었지만 이들은 지금 부주석에게 된통 당하게 된다.
누가 뭐래도 경제를 살렸는데 인민이 태자당을 적극 지지해버리게 되었으니 어쩔 수 없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꼴이 된다.
이 사람이 바로 장기 집권으로 ‘중국이 중국했다’란 유행어를 만든 시앙핑 주석이다.
시앙핑은 그 특유의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손사래를 쳤다.
“별일 아니니 그만 돌아들 가십시오. 몸들 조심하고요. 앞으로 할 일이 많습니다.”
모두 시앙핑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시앙핑이 주석의 자리에 올라서면 모두 한 자리씩 할 테니 그 전에 괜한 구설수를 만들지 말라는 당부이자 경고를 못 알아들을 사람은 없었다.
모두 돌아가자 시앙핑은 딩쉐이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임재준 일주일 동안 절대 밖으로 못 나오게 잡아 놓았지? 내가 주석에 올라서기 전엔 절대 소란이 일어나면 안 돼.”
“네, 임재준도 굳이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는 듯합니다. 꼭 오랜만에 휴식을 즐기는 듯 전화 통화도 안 한다고 합니다.”
“그건 다행이네. 러시아 근황은 어때?”
“그쪽도 조용합니다.”
“그래?”
조용하다.
그럴 놈들이 아닌데.
“너무 조용해도 문제가 있는 거야. 폭풍이 오기 전엔 항상 고요가 있다는 걸 잊지 마.”
“걱정 마십시오. 취합 가능한 모든 정보를 수집하고 있습니다. 조그만 낌새라도 보이면 즉시 보고드리겠습니다.”
“보고하지 말고 먼저 행동을 취해. 보고는 나중에 해도 돼.”
“네.”
러시아가 2,200억 달러를 그냥 포기할 리는 없을 텐데.
제발 내가 주석에 올라간 후에 일을 벌여도 벌여라.
그 이후에 무엇이든 중국 주석의 힘이 어떤지 똑똑히 보여줄 테니.
***
투마로우클레이스은행.
올리가르히 여덟 명이 행장실에 모여 다이돈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잡은 희망의 끝자락을 놓치지 않으려는 의지가 그들의 대화에서 흘러나왔다.
“미하일, 정말 그놈이 대금을 받아가면 우릴 살려 줄까?”
“살려주겠지. 약속은 지키니까. 하지만 난 러시아를 떠나고 싶어. 대통령의 꼭두각시 노릇이나 하려고 그 큰 사업체를 운영하고 싶지는 않아.”
미하일은 러시아의 니켈 왕으로 불릴 만큼 거대한 니켈광산과 기업을 운영했다.
니켈은 비행기, 항공 우주선, 의료용 기구, 각종 전자 기기의 충전용 배터리 등 최첨단 산업에 사용되는 만큼 전 세계에서 돈을 긁어모았다.
그런 노다지를 빼앗긴 것도 모자라 눈앞에서 천문학적인 돈이 정부로 들어가는 꼴을 본다고 생각하니 계속 기업을 운영할 마음이 없었다.
블라디슬라프가 이해한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하긴, 미친놈. 월급쟁이라니. 월급은 얼마나 줄지 궁금하기는 해. 하지만 대통령 월급보다 많이 주지는 않을 거잖아. 그걸 돈이라고. 그렇다고 따로 챙기지도 못할 테고. 그런 짓은 안 하느니만 못하지.”
블라디슬라프의 말에 빅토르가 꼬리를 달았다.
“자네가 대통령에게 못 하겠다고 거절할 수는 있어?”
“거절 못 할 이유도 없잖아. 엄연히 은퇴할 나이도 훨씬 넘었는데. 젊고 쌩쌩한 애들이나 데려다 쓰라고 하지 뭐.”
“가족은 어쩌고.”
“그게 문제지만. 이야기는 해 볼 거야.”
“괜한 일에 목숨 걸지는 마.”
흥.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신세 한탄이 계속되는데.
벌컥.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지요. 요즘 감사 중이라 늦어졌습니다.”
“…….”
아직도 리보금리 조작 사건에 대한 조사가 끝나지 않았다.
검찰 조사가 끝날 만하면 증권연합회에서 나오고, 이 조사가 끝날 만하면 은행감독위원회에서 나오는 통에 조사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당연히 벌금은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하지만 다이돈은 임재준이 한 말을 머릿속에 새겼다.
‘될 수 있으면 조사에 협조하면서 시간을 끄세요. 벌금 걱정은 하지 말고. 그보다 훨씬 많이 벌 거니까.’
그래서 다이돈의 얼굴을 어둡지만은 않았다.
중앙 자리에 앉자 올리가르히를 죽 둘러보고는 말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올리가르히는 다이돈에 첫 마디에 당황했다.
무슨 일로?
우리가 올 이유가 하나밖에 더 있나?
근데 굳이 이걸 묻는 이유가 뭘까?
“당연히 우리는 금에 대한 대금을 받으러 왔습니다.”
“대금이라면 중국 국채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네, 맞습니다.”
다이돈은 의외라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리더니,
“그건 이미 중국으로 돌려보냈습니다.”
“네?”
미하일이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소리냐’라는 눈으로 다이돈을 쳐다봤다.
“그걸 왜 중국으로 다시 돌려보냈습니까?”
“그럼, 그걸 계속 가지고 있습니까? 투마로우클레이스은행은 엄연히 전달하는 역할만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약속한 날짜에 나타나지 않으셨으니 우리는 돌려보낼 수밖에요. 그렇지 않으면 저희도 장부에 기재해야 하고. 그럼 매출이 되고 세금을 내야 합니다.”
“연락도 없이요?”
“전부 전화를 안 받으시던데요.”
전화.
그렇지. 다 빼앗겼지.
“그렇더라도 보통은 1년 정도는 기다려 주지 않나요?”
후.
“평상시라면 저희도 은행감독위원회에 허락을 구하고 기다리긴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리보금리 사건으로 저희가 융통성을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원칙대로 처리할 수밖에요.”
“그래도…….”
“아니, 왜들 그런 표정을 지으시죠? 중국이 먼 곳도 아니고 사람이 가지 못할 곳도 아닌데. 가서 받아 오면 되는데요? 이 기회에 관광 삼아 중국도 여행하고 좋지 않습니까?”
관광 삼아.
으휴, 이 사람이 우리 처지를 알 리도 없고.
“다이돈, 사실, 그 대금은 이제 정부에게 돌아가야 할 돈입니다. 저희 개인 자산이 아닙니다. 우리야 그 돈이 중국으로 가든 러시아로 가든 이제 상관은 없는데. 이대로 돌아가면 우리 신변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어떻게 손을 좀 쓸 수는 없겠습니까?”
“난감하군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
“근데 어쩌다 그런 일이 발생한 겁니까? 본인들은 러시아 최고의 재벌들 아니 십니까?”
그동안 대통령도 갈아 치울 수 있다고 큰소리 떵떵 치던 인간들이 이제는 구석에 몰린 생쥐 꼴이 되어버렸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