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이게 금괴야. 난 이걸 쓰레기라고 부르지(5)
“거길 왜 꼭 제가 가야 합니까? 여기 전문가가 이렇게 많은데.”
“전문가? 없는데. 우리 중국 가서 지방은행과 계약할 거예요. 계약은 박 형이랑 강 선배가 전문이잖아.”
“어, 그게.”
맞는 말이다.
지금까지 월가 뒤처리만 수백 건을 했다.
여기 두 사람 만큼 계약에 빠삭한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윌켄은 독일로 가서 도이치방크 확실하게 러시아에서 손 떼라고 경고하세요.”
“독일이라. 알겠습니다.”
“아마, 바로 쫓겨날지도 몰라요. 하지만 경고는 해야 합니다.”
“네.”
역시 윌켄은 모든 일에 군말이 없었다.
그리고 처리도 확실했고.
어, 이러면 확실히 쫓겨난다는 말이 되나.
그리고 문제는,
“마가리따, 엘리자베스를 데리고 프랑스로 가세요.”
“싫은데.”
“싫은데요.”
마가리따와 엘리자베스가 동시에 재준의 의견에 반박을 달았다.
재준은 두 여자를 보며 잠시 자신의 경험 속을 헤집어 봤다.
내 말에 싫다고 말한 사람이 있었나?
기억이 없는데.
너무 오랫동안 독재 아닌 독재 속에 살아서 그런가?
익숙하지 않은 반응에 다음 무슨 말로 답으로 삼아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고민은 무슨 고민.
집 나오면 개고생이란 말을 실감하게 해주면 되지.
“그러든가. 참, 가기 전에 중국이란 나라에서 발생한 가짜 음식에 대한 사건은 한번 쭉 참고삼아 검색해 봐요. 괜히 가서 길거리 음식 사 먹고 사흘 밤낮을 화장실 변기와 씨름하지 말고.”
엘리자베스가 마가리따를 한 번 올려다보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곡물은 땅에서 자라는 거지, 만들 수 있는 게 아닌데. 아니, 가짜로 만들면 사람들이 정말 모를까?
엘리자베스는 시큰둥한 얼굴로 핸드폰으로 몇 번 터치를 해보곤 입을 떡 벌렸다.
중국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라고 일부러 다 적어 보았다.
젤라틴과 왁스, 색소로 만든 가짜 계란.
새우 꼬리에 젤라틴을 주입한 가짜 새우.
돼지고기를 소고기 추출물에 담근 가짜 소고기.
플라스틱으로 만든 가짜 쌀, 가짜 국수. 이건 대박.
과일주스에 화학첨가물을 넣은 가짜 와인.
시멘트로 만든 가짜 호두.
쥐고기로 만든 가짜 양고기.
수돗물로 만든 가짜 식수.
골판지로 만든 가짜 소고기 찐빵.
아이 머리가 커지는 기형아를 만드는 가짜 분유.
그리고 말하기 더러운 가짜 식용유,
검정 비닐로 만든 가짜 미역.
폐기된 가죽 분말로 만든 가짜 우유.
나무젓가락으로 만든 가짜 버섯.
종이로 만든 가짜 무.
설탕으로 만든 가짜 꿀, 이 정도는 귀엽게 봐줄 만하다.
구두창이나 타이어로 만든 가짜 타피오카.
진흙으로 만든 가짜 후추.
암을 유발하는 화학물질로 만든 가짜 두부.
이거 너무 많은 거 아냐?
재준은 엘리자베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흐흐흐, 이래도 갈 거냐?
하지만,
“우리 호텔 음식만 먹을 거죠?”
“어?”
“아니면 대형마트에서 한국산 통조림을 사도 되고.”
“어?”
“그러네, 그러면 되겠다. 엘리자베스는 역시 똑똑해. 천재가 맞아.”
아니 그런 일로 천재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언제부터 둘이 이렇게 죽이 잘 맞았어.
***
SEC(증권거래위원회).
“론, 투마로우와 도이치방크의 레버리지드 슈퍼시니어 채권 소송은 어떻게 돼가고 있나?”
“도이치방크가 일류 로펌을 고용한 데 반해 투마로우는 상대적으로 작은 로펌을 고용했습니다.”
“그래? 그거 약간 의외인데.”
“대신에 휘슬블로어가 있는 모양입니다.”
“내부제보자(휘슬블로어)?”
“지금 소송을 맡은 로펌이 이 내부제보자가 처음에 찾아간 로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계속 소송을 진행하는 것 같습니다.”
SEC 회장 제이크는 ‘그럼 그렇지’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투마로우라면 대형 로펌이 아니라 초초초거대형 로펌이 와도 확실히 이길 거라고 믿었다.
지난 포지션리미트 때 자신이 당한 걸 생각하면 다시 임재준을 만난다면 먼저 하고 싶은 걸 얘기하면 다 들어준다고 할 것 같았다.
싸우면 뭐하나. 어차피 투마로우 맘대로 될 텐데.
굳이 팔다리 머리까지 깨지고 나서 들어주기보단 처음에 원하는 걸 들어주는 게 그나마 심장에 무리도 안 가고 임재준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지름길이었다.
대형 로펌이 어딘지 모르겠지만 맘고생이 심할 것 같은데.
가서 중간에 그냥 손 떼라고 얘기해 줄까?
미친 짓이지. 내가 SEC 회장인데 어디다 충고를 해.
제이크는 멍청한 생각이라고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론이 뭔가 말하려다 제이크의 상태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회장님.
아직 끝난 거 같지 않은데요.
“회장님, 그리고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어디서?”
“투마로우 펠그리니한테서요. 그 뭐냐 리보금리 조작이라고 했던 거 같습니다.”
리보금리 조작?
이 무슨 얼토당토않은 소리야?
그걸 어떻게 조작할 수 있어?
쓸데없는 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거 아닌가?
“투마로우 요즘 왜 월가 조작 사건을 들추고 다니는 거야? 할 일이 없나?”
“그럴 리가요. 얼마 전까지 곡물 메이저로 중국을 무릎 꿇게 하고 러시아로 날아갔다고 합니다.”
러시아? 거기 요즘 새 대통령 당선으로 시끄러운 곳인데.
설마 러시아에 은행 개설하려고 간 것은 아니겠지.
아니면 또 누구 하나 인생 막장 경험하게 하려는 건가?
“또 시끄러워지겠네. 근데 리보금리 조작이라니 너무 뜬금없는 소리 아냐?”
“그러니까요. 오늘 자료를 보낸다고 했으니 한번 보시면 알게 되겠죠.”
리보, LIBOR(London Inter-Bank Of fered Rate)는 런던 시장에서 은행 간 하루짜리 콜금리를 일컫는 말이다.
글로벌 채권시장에서 일종의 벤치마크로 가장 범용성이 있는 지표다.
제이크는 리보금리보다는 펠그리니에 꽂혔다.
펠그리니라면 금융위기를 정확하게 예측해 낸 수학 천재인데.
그가 무언가를 냄새를 맡았다면 그냥 넘어갈 문제는 아니지.
그래도 그렇지 리보라니.
영국뿐 아니라 미국의 채권 프라이싱의 기준이 되는 금리를.
말도 안 돼.
제이크는 아무리 생각해도 리보금리 조작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다.
이때,
삐삑삐삐삑.
팩스로 무언가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론이 곧장 팩스를 살피며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팩스로 전송된 자료에는 유럽 대형 은행들의 그날그날 금리에 동그라미가 체크되어 있었다.
같다.
금리가 전부 똑같아.
이게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야?
계속 팩스로 전송되는 자료는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론은 제이크에게 팩스 용지를 들고 달려갔다.
“회장님, 이거 진짜인 거 같은데요.”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을 해. 뭐가 진짜라는 거야? 설마 리보금리를 조작했다는 게 진짜라는 거야?”
“네.”
“뭐?”
“여기, 이걸 보세요.”
론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가는 제이크의 눈에 힘이 꽉 들어갔다.
“설마 한두 달이겠지.”
“아닌 것 같은데요.”
론과 제이크는 팩스가 뱉어내는 소리가 끊기지 않자 신음성을 내뱉었다.
벌써 팩스 용지 한 두루마리는 거의 소진되고 있었다.
이미 바닥이 거의 팩스 용지로 뒤덮여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전화해서 그만 보내라 그래.”
이때, 삑삑삑거리며 팩스가 용지를 더 달라고 아우성을 질렀다.
제이크는 설마 하는 맘으로 다시 팩스 용지를 들여다봤다.
“이거 정말이면, 얼마나 큰 파장이 예상되는지 알지. 저기 바닥에 있는 팩스 다 가져와 봐.”
“네.”
“아니야, 전화부터 걸어. 내가 직접 통화할 테니.”
론은 핸드폰을 들어 펠그리니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신호음이 가고 펠그리니가 받았다.
여기.
론이 건네는 핸드폰을 제이크가 약간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펠그리니?”
-네. 자료 아직 한참 남았는데요.
“그만 보내. 이메일 있잖아. 그리로 보내.”
-이메일은 벌써 보냈습니다.
“그래?”
제이크는 론에게 고갯짓으로 이메일 검색을 지시했다.
“펠그리니, 잘 들어. 아무리 투마로우라도 이걸 터뜨렸다가 아닌 거면 역풍이 장난이 아닐 거야. 자신들을 음해한다고 들고 일어서는 은행이 몇 개인 줄 알아? 그것도 다 대형은행들이야.”
-회장님, 대형은행이니까 가능한 겁니다. 그들이 하루 마감에 맞춰 자신들 은행 채권 금리를 같은 금리로 맞춘 거라고요. 누가 봐도 의심스러운 겁니다. 저도 혹시나 해서 10년 치를 다 들춰 봤습니다. 시장 금리와 비교도 했고요. 하지만 한결같이 이들이 단합한 금리가 다음날에 그대로 적용이 됐습니다. 왜 했겠습니까?
제이크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하는 중이었다.
왜 했냐고?
당연히 금리를 미리 알 수 있다면 채권으로 얻는 이익이 도대체 얼만데.
얼마가 아니라 자기가 먹을 만큼 다 처먹어도 괜찮을 정도다.
미친 새끼들.
죽으려면 혼자 뒈질 것이지.
왜 전 세계를 끌어들이냐고.
리보금리가 조작되었다.
이건 리보금리를 보고 채권 금리를 조정하는 전 세계 금리가 조작되었다는 소리다.
“펠그리니, 잠시 시간을 갖자고. 우리가 조사에 들어갈 테니까. 언론에 떠들지 말아줘.”
-저는 그럴 수 있는데. 이 자료 이미 보스 손에 들어갔습니다.
“뭐? 임재준에게?”
이런 미친.
진짜 왜 이러는 거야.
“알았어. 내가 임재준에게 전화할게. 그만 끊어.”
후, 후, 후.
심장이 너무 뛰어 도대체 진정이 안 된다.
뭐부터 해야 하지.
아, 맞아. 임재준, 임재준에게 전화해야지.
제이크는 재준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띠리리리링.
-아이고, 제이크. 웬일로 전화를 다 주신 겁니까?
이 새끼 모르는 척하는 거 봐.
“임재준, 나에게 시간을 주세요. 내가 해결하겠습니다. 나에게 시간을 주세요.”
-뭘요?
미치겠네.
진짜 모르는 거야, 모른 척하는 거야.
“리보금리 조작. 알고 있잖아요. 내가 먼저 조사하겠습니다.”
-아, 그거. 그걸 왜 SEC가 조사를 합니까? 이미 우리가 다 끝냈는데. 그냥 자료를 가지고 발표만 하면 되는데. 우리가 아주 편하게 해준 거예요. 아니면 우리가 발표할까요?
“잠깐, 내 말 좀 들어봐요. 이거 터지면 정말 큰일 납니다. 알잖아요. 십 년간 기준 금리가 조작된 겁니다. 전 세계 은행이 런던으로 폭탄을 투하할지도 모른다고요. 그다음 타깃은 월가예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음. 제이크. 희생양이 필요한 겁니까?
“네?”
이런 개새끼.
또 이미 그림을 다 그려 놓고 내가 그 위에서 놀아나기를 바라는 거네.
희생양이라니 누구를 죽이려고.
“아닙니다. 그런 뜻은 전혀 없습니다. 희생양이라니요.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럼, 다 같이 죽자고?
“네? 허, 허, 허. 아니 그건 아니고.”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생각을 하라고 생각을.
“어딥니까, 그 희생양이.”
-유럽 대형은행들이 단합한 겁니다. 그럼 유럽 은행 중 가장 채권 규모가 큰 은행이 책임을 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럼…….”
도이치방크.
알겠다. 알겠어. 원래 목표가 정해져 있던 거야.
임재준, 개새끼. 진짜 넌 지랄 맞은 놈이다.
도대체 도이치방크가 투마로우에 뭘 그렇게 잘못했기에.
제이크는 머리가 복잡했다.
도이치방크가 무너진다.
미국, 아니 월가에 영향이 얼마나 되겠는가.
”도이치방크를 잡는다고 치면 그 여파는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럽니까?“
-무슨 여파? 도이치방크가 부도라도 난단 말입니까? 왜? 건실한 은행인데.
”리보금리를 조작한 것이 들통나면.“
-그게 뭐?
그게 뭐라니?
-제이크, 어떤 사람이 돈을 똑같이 그렸어요. 그런데 그 돈이 통하지 뭡니까? 그래서 잔치를 벌였네. 잔치가 끝나자 돈이 모자랐어요. 그래서 이번에도 돈을 그렸어요.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또 그리고. 그럼, 사람들이 이 사람이 저지른 죄 중에서 어떤 게 가장 나쁜 죄라고 생각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