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1화 이게 금괴야. 난 이걸 쓰레기라고 부르지(2)
“이번에 백악관에 들어가서 들은 이야긴데. 3차 양적 완화를 해야 한다나 봐.”
후, 후, 후.
여기저기 한숨이 터져 나왔다.
양적 완화가 시작되면 전 세계가 환율 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양적 완화가 뭔가?
자국의 환율을 낮추어 무역에서 이익을 보겠다는 수작이다.
즉, 나 말고 다른 놈들 다, 다, 다 죽이는 짓이다.
이거나 위안화 절하나 뭐가 달라, 다 똑같은 거지.
내로남불의 전형.
하지만 재준은 투마로우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일을 진행해야 했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양적 완화를 금 매입으로 진행하기로 했어.”
음, 음.
역시나 금방 재준의 의도를 이해했다.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월가의 뱅커 아닌가, 이 정도는 기본으로 알아들어야지.
근데,
“왜 금을 매입하는데요? 원래 국채를 사는 게 정석 아닌가요? 왜 그런지 설명해 주세요. 어서요.”
엘리자베스가 재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채근했다.
무시하자.
절대 자상하게 설명해 주는 선례를 만들면 안 된다.
재준은 엘리자베스를 보며 ‘멍청아’라는 눈으로 쳐다보고 고개를 휙 돌려 모두를 보고 말을 시작했다.
“사실 금 매입은 재정 절벽을 해소하는 용도로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러시아 자금 세탁을 잡아내려는 의도도 있어.”
자금 세탁이라니요?
이런 불법적인 일에 냄새를 잘 맡는 퀴니코가 귀를 쫑긋 세웠다.
거기다 러시아라니.
이건 앞으로 큰 싸움이 또 일어날 전조였다.
윌켄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어요.”
몇 년 전부터 러시아의 올리가르히 움직임이 심상치 않았다.
러시아 주변국으로부터 덴마크나 독일을 거쳐 미국으로 그들의 자금이 흘러들어오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엔 작은 금액이더니 내년 러시아 대통령 선거가 다가오자 대부분의 올리가르히가 몰려들면서 금액이 너무도 빠르게 불어났다.
특히 러시아의 레드 마피아가 올리가르히의 금을 달러로 환전하는 식의 방법을 주로 사용했다.
유럽 시스템의 장점이 허점으로 둔갑했다.
유럽 안에서 자본이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보스, 그럼 한 번은 러시아에 들어가야 하겠군요.”
“당연히 한번 가봐야지. 받을 돈도 있고.”
러시아?
페렐라와 워서스틴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지금 아르헨티나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다시 호랑이 아가리로 들어가는 건 아니라 생각했다.
안 되지, 절대 안 돼.
게다가 지금 러시아는 반정부 시위가 2년째 이어지고 있는데.
2011년 러시아 의회 선거에서 여당인 통합러시아당의 부정선거 의혹과 러시아 총리 블라디미르 푸챠르의 독재 가능성을 두고 러시아 국민들, 해외 언론들과 국회의원들이 나섰다.
반정부 시위라니.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추억이 되살아났다.
하지만 페렐라와 워서스틴과는 다르게,
“러시아 저도 갈 거예요.”
단호한 엘리자베스가 끼어들었다.
모두의 시선이 엘리자베스를 향했다.
“네가 러시아를 왜 가? 거기 지금 어수선해.”
“바로 그거예요. 그래서 가는 거예요. 안정되어 있으면 배울 것도 없잖아요. 할아버지가 늘 말씀하셨어요. 모두가 혼돈이라고 생각할 때 기회가 온다고요.”
재준은 너무나 맞는 말이라 생각했지만,
네가 할 말은 아니잖아.
“퀴니코는 덴마크로 가서 당스케방크 본사를 방문해.”
“당스케방크면 덴마크에서 제일 큰 은행이잖아요.”
“거기 가서 에스토니아 지점에서 불법 자금 세탁이 일어나고 있으니 조사 착수하라고 난리를 치는 거야.”
여기가 러시아 첫 접촉 지점이었다.
당스케방크에 겁을 줘서 더는 올리가르히의 자금 세탁에 관여하지 못하게 만든다.
“블록은 도이치방크 좀 들여다봐 봐. 아주 볼만한 일들이 많이 숨겨져 있을 거야.”
“그 많은 자료를 어떻게 다 뒤져요?”
“아, 그런가? 그럼 내가 말한 부분만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네? 네.”
“10년 전에 인수한 뱅커컨피던스의 영업권 상각 비용처리를 살펴보고, 탄소배출권 관련 증명서 거래의 부가가치세가 탈루되었는지 확인하고, 영국 보보폰 매각할 때 뒷돈이 오갔는지 알아봐, 그리고 서브프라임 모기지 상품 ‘겜스톤’ CDO 판매, 아, 뉴욕대에 가면 수학과 교수가 있을 거야. 벤 에릭이라는 사람인데 한번 만나봐.”
“뭐가 이렇게 자세해요? 이거 미리 조사하신 거예요?”
“응, 신문을 보다 보니까.”
신문?
푸.
모두 재준의 입에서 ‘신문’이란 말이 나오자 입술을 내밀고 야유를 보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펠그리니, 리보금리를 살펴봐 줘. 분명히 조작된 흔적이 있을 거야.”
“네, 조작이라면 내가 나서야죠.”
“나머진 러시아로 향합시다.”
옛썰.
엘리자베스의 씩씩한 대답만 들릴 뿐 나머진 피로에 찌든 얼굴을 했다.
***
덴마크 당스케방크.
“투마로우에서 오셨다고요. 어서 앉으세요.”
당스케방크 행장 라르센은 투마로우란 말에 퀴니코를 극진하게 대했다.
당스케방크가 덴마크 최대 상업은행은 맞지만 바로 아래 네덜란드에 있는 투마로우암로와 그 옆 벨기에에 있는 투마로우포르티에 비길 정도는 못됐다.
하물며 프랑스의 투마로우사라크나 스페인의 투마로우산타떼, 영국의 투마로우클레이스와는 비교도 할 수 없었다.
가슴이 웅장해진다.
퀴니코는 밖에 나와보니 투마로우의 위상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환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따뜻한 A.C. 퍼치스 티핸들의 화이트텝플이란 차가 나왔다.
여러 가지 과일 향이 블렌딩되어서 코끝을 간질였다.
“좋군요.”
날카롭게 각을 세워 왔지만 차 한 잔에 맘에 살짝 누그러졌다.
“투마로우가 어쩐 일로 당스케방크를 찾아오셨습니까?”
“아, 네. 큰일은 아닌데, 하지 마셨으면 하는 일이 있어서요.”
“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맘이 누그러져도 퀴니코는 퀴니코였다.
부드러운 미소에 말에는 가시가 돋쳤다.
“러시아 올리가르히의 자금 세탁을 중지했으면 합니다.”
“저희가 불법을 저질렀다고요?”
“덴마크에 있으시니 잘 모르고 계셨군요. 지금 에스토니아 지점에서 러시아 올리가르히의 자금을 세탁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갔다가는 일이 크게 번질 것 같아 제가 이렇게 직접 찾아 왔고요.”
“에스토니아에서?”
러시아와 바로 국경을 접하고 이는 에스토니아에서 요즘 자금의 흐름이 서서히 늘어나고 있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 수출입 자금이 수시로 오가는 상황이고, 러시아 대통령이 바뀌면서 새로운 대통령을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를 탈출하는 통에 생기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투마로우는 유럽에 문제가 발생하는 걸 원하지 않습니다. 서둘러 진상을 파악하고 거래를 중지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투마로우 그룹이 유럽중앙은행을 통해 당스케방크에 정식으로 문제 제기할 수 있습니다.”
후.
행장 라르센은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조사하겠습니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시면 투마로우에 요청하십시오. 저희가 적극 도와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퀴니코는 재준이 당스케방크에 가서 한바탕 난리를 치라고 했지만 A.C. 퍼치스 티핸들 때문에 모질게 대하지 못했다.
“저 실례가 안 된다면.”
“네 말씀하십시오.”
“이거 어디 가서 살 수 있습니까?”
네?
모든 일에 의심부터 하던 퀴니코가 의외로 차에 취미를 붙이는 순간이었다.
이 차는 의심할 수 없어.
***
존 F. 케네디 국제공항.
재준이 옆에서 쫑알거리는 엘리자베스 때문에 귀마개를 하고 눈을 감았다.
절대 시위하는 나라에는 갈 수 없다는 페렐라와 워서스틴, 덴마크로 향한 퀴니코, 도이치방크 자료에 빠진 블록, 10년 치 리보 금리에 파묻힌 펠그리니를 빼고 전부 러시아로 향했다.
아, 서형길은 요즘 도날드 트롤링과 죽고 못 사는 사이가 되어서 투마로우에 코빼기도 비추지 않는다.
차라리 잘 됐지.
근데 어떻게 의사소통을 하는 걸까?
재준이 상대를 안 해주자 엘리자베스는 강호석을 붙들고 투자은행이 하는 일에 대해서 이것저것을 물어봤다.
그리고 은근히 재준의 과거에 대해서도 묻자 강호석은 지금까지 쌓인 불만을 재준의 흑역사(?)를 늘어놓는 거로 대신했다.
듣고 있다가 자신도 거들겠다며 박민수도 나섰다.
재준은 귀마개를 했음에도 성능이 별로인지 다 들렸다.
“그러니까 그때 자기가 무슨 점쟁이가 된 듯 부르르 떨면서…….”
“어머, 어머. 미쳤네. 미쳤어.”
“……그리고 부동산이며 금고에 숨겨둔 금괴를 모조리 싹…….”
“와, 정말 타고났구나. 증권 안 했으면 완전 역대급 나쁜 놈이잖아. 그쵸.”
“그렇지.”
아니, 그건 어떻게 알고 있었어?
천 실장이 말해 준 건가?
하지 말라고 하기도 뭐하고 참나.
에라 모르겠다.
재준이 그냥 포기하고 옆으로 돌아서 자려는데,
“여기서 보네.”
웬 익숙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마가리따?
“여긴 어쩐 일이에요? 설마 나한테 사람이라도 붙인 거예요?”
“호호호, 당연하죠. 8억 달러 받아줄 때까지 쫓아다닐 거예요.”
“그렇다고 러시아까지 쫓아와요?”
“러시아 간다니까 같이 가는 거예요. 걱정이 너무 돼서.”
“내 일인데 마가리따가 왜 걱정을 해요?”
“어머, 러시아에 아는 사람 있어요? 러시아 문화는 알고요? 러시아 지리는 잘 알아요?”
“아니요. 모르는데요.”
“모르고 러시아를 간다고요? 제정신이에요? 누가 당신을 만나주기라도 한대요?”
아니, 러시아를 가는데 꼭 제정신에 가야 하는 건가?
그리고 투마로우 임재준이 가는데 안 만나 준다고?
“설마 투마로우 임재준이라면 만나 줄 거라 생각한 건 아니죠.”
헉!
독심술이라도 익힌 거야?
“러시아는 아무리 유명한 사람이라도 처음 보는 사람하고는 차도 같이 안 마셔요. 아세요?”
“그래요?”
이건 몰랐는데.
“그리고 예술에 대해 뭘 좀 아세요?”
“아니 그건 내 영역이 아니라서…….”
“러시아 사람은 예술을 모르는 사람과 말을 섞지 않아요. 혹시 러시아에 아는 지인은 있어요?”
“그것도 내 영역이 아니라서…….”
“뭐야? 러시아는 중국보다 인맥이 더 중요한 나라예요. 정말 대책 없는 사람이네.”
요즘 왜 이러지?
왜 나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이 난 여자들이 꼬이는 거지?
결혼할 때가 된 건가?
근데 마가리따는 50대고 엘리자베스는 20대인데.
둘 다 아니지 않나.
“러시아에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란 말이 있어요. 여기서 생략된 말이 바로 인맥이에요. 그만큼 러시아란 나라는 인맥이 중요하다고요.”
강 선배 잔소리는 저리 가라구나.
“‘빠 블라투’라는 말 알아요? 지인을 이용하여 일을 성사시킨다는 말이에요. 러시아인은 당연시하는 말이죠. 그만큼 사회주의 국가들은 인맥 없이는 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렇군요.
제가 잘못했어요.
“그래서 마가리따는 러시아에 인맥이 풍부한가요?”
“당연하죠. 제가 올리가르히에게 투자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잖아요.”
그건 자랑이 아니잖아.
돈 날린 건데.
“알았어요.”
“올리가르히를 만나게 해 줄 수 있어요.”
“정말입니까?”
“인제 보니 대책도 없이 무조건 러시아로 가려고 했나 보네. 큰일 나려고.”
“알았다니까요.”
“으유,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엘리자베스가 마가리따를 보더니 엄지를 척 올렸다.
그래, 차라리 마가리따와 같이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