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7화 그렇게 해서 밥은 먹을 수 있겠어?(13)
그렉 파이는 재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카킬을 상장시키고 상장된 주식을 전부 투마로우가 인수한다고 말했다.
이 말은 이제 카킬은 투마로우에 의해 운영된다는 뜻이다.
싸워야 하나?
아니, 싸울 수 없다.
어떻게 카킬이 투마로우를 지금 상태로 상대하겠는가.
한창 자금이 여유로울 때도 힘겨운 상대였을 텐데.
그렉 파이는 물러날 때를 잘 아는 경영인이었다.
여기서 물러나는 건 후일을 도모하는 게 아니다.
아예 투마로우와 손을 잡는 게 현명한 처신이었다.
그렉 파이는 주주가 아니라 전문 경영인이었다.
이번 사태가 이사회에 알려지면 임시주총이 열리고 자신의 자리는 다른 이에게 넘어갈 것이다.
이대로 물러날 수 없어.
아직 카킬 가문은 카킬의 재배지가 상실되었다는 것을 모른다.
일단 비축분을 풀어 공급에 차질이 없게 보여야 한다.
그리고 3대 메이저가 투마로우와 손을 잡았으니 뉴욕증시에 상장을 시켜 자금을 확보한 후에 투마로우에 맞서야 한다고 이사회를 설득해야 한다.
그 후 상장으로 들어온 돈으로 재배지 협상을 다시 진행하면 된다.
문제는 이사회가 사태를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 자신의 무능함을 용서하느냐인데.
“CEO 자리를 유지하게 해 주실 수 있습니까?”
재준은 그렉 파이를 보고 갸우뚱했다.
“CEO에 미련이 있는 거예요? 보통 큰일을 겪으면 좀 쉬고 싶어 하는 게 사람인데. 일하고 싶어요?”
“아직 물러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말했잖아요. 임무라고. 임무를 잘 수행하면 자리는 보존할 수 있어요.”
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카킬의 사람이 아니라 투마로우의 사람이 되는 건데.
하긴, 카킬이 상장하면 투마로우가 카킬의 최대 주주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은 투마로우의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알겠습니다.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좋아요. 나도 그렉이 카킬을 계속 경영하는 것을 원해요. 곡물 사업이란 게 경험이 풍부해야 하니까.”
곡물 공급이 말처럼 쉬운 건 아니다.
나라마다 풍작과 흉작에 따라 곡물량을 조절해야 하고 싫은 소리도 들어야 하는데 경험이 없으면 저것만큼 고단한 일도 없을 테니까.
이후 그렉 파이는 재준과 이사회 설득에 대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나누고 자리를 떠났다.
그렉 파이가 떠나자마자 펠그리니와 블록이 다가왔다.
“보스, 그렉 파이에게 카킬 경영을 그대로 맡기실 겁니까?”
“왜? 그러면 안 돼?”
“아니요. 전 보스가 그렉을 싫어하는 줄 알았죠.”
“뭐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지. 하지만 이미 우리를 경험한 사람이 자리를 지켜주는 게 편하지 않겠어? 딴마음을 먹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그렉은 월급쟁이잖아. 우리와 싸울 의지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아.”
아, 월급쟁이.
“월급쟁이라니까 확 와닿네요.”
“그렇지. 우리 같은 뱅커는 성공보수라는 게 있어서 자리에 크게 미련이 없지만 그렉 같은 전문 경영인은 자신의 위치에 목을 매지.”
펠그리니가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표정을 지었다.
“보스, 로이드레퓌스는 프랑스 곡물을 푼다고 해서 쉽게 포기할 것 같진 않은데. 무슨 다른 계획이 있습니까?”
“그건, 다른 계획이라기보단 상황이 그렇게 만들 거야.”
“상황이요?”
이거 또 앞으로 일어날 일을 알고 있는 거야?
“지금 러시아 대통령이 누구지?”
“드미트리잖아요.”
“그 사람이 현재 러시아의 실세라고 생각해?”
“아니죠. 실세는 전 대통령 푸차르죠. 다음 대통령은 다시 그 사람이 집권할 겁니다. 그러고 보니 러시아 대선도 얼마 안 남았네요.”
푸차르, 별명은 오리발 푸틀러.
와. 이 인간도 만만치 않은 인간말종인데.
이러고 보니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이 비슷한 시기에 막가파 대빵들이 등장하네.
어쩐지 세상이 뒤숭숭하더라 했어.
이때부터 이 인간들이 설쳤으니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이지.
블록과 펠그리니가 재준의 말을 기다리며 두 눈이 말똥말똥 빛났다.
아, 상황을 설명해야지.
“푸 씨 이 사람이 대통령이 되면 가장 먼저 할 일이 식량안보 정책일 거야. 이게 곡물 수출을 전면 금지하고 곡물 자급률을 100%까지 끌어 올리는 거거든.”
우리 푸틀러, 투마로우를 위해 열일하지.
“확실한 겁니까? 올리가르히가 가만히 있겠어요?”
올리가르히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 및 그 외 구소련계 국가의 경제를 장악한 특권계층, 대체로 소련 공산당 관료 출신이나 그들의 지원을 받아 거대 재벌로 성장한 사람들이다.
“올리가르히, 우리 푸틀러 형님이 말끔히 제거하고 그 자리를 실로비키로 채울걸.”
실로비키는 푸차르 정권을 떠받치는 군부, 정보기관, 군산복합체 등 무력부처 관련 정치가들의 파벌 및 권력 실세들이고.
“만약, 만약에 러시아가 곡물을 공급하지 않으면 로이드레퓌스는 아프리카 농장밖에 없어요. 이미 프랑스는 수에즈에게 물량을 몰아주고 있어요.”
“그럼, 커피나 면화 같은 곡물만 취급하게 되겠네. 중동에 밀을 수출하는 것은 꿈도 못 꿀 거고.”
“회사가 많이 쪼그라들겠는데요.”
후후.
재준은 빙글 웃으며 말했다.
“그렇지. 벙기 인수 끝나고 푸틀러가 대통령 당선되면 마가리타 아줌마랑 담판을 지으러 가야지.”
***
월스트리트.
윌켄과 퀴니코가 벙기를 적대적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투자자를 모집했더니 삽시간에 월가 투자은행들이 대부분 몰려들었다.
최근 월가는 벙기 적대적 인수가 가장 핫한 뉴스였다.
-벙기 주식 팔았어?
-그럼, 20% 프리미엄 얹어 준다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팔았지.
-근데 회생 능력이 거의 제로에 가까운 벙기를 왜 투마로우가 인수하겠다는 거야? 아르헨티나라면 이가 갈릴 텐데.
-그렇지. 이번에 아르헨티나 파업 협상이 타결돼도 월가에선 벙기에 투자할 기업은 없을 거야. 이놈의 나라는 툭하면 전국 단위로 파업을 일삼아.
-근데 말이야. 아르헨티나에서 워서스틴과 페렐라를 봤다는 소문이 있던데.
-맞아. 나도 들었어. 아르헨티나 파업 투마로우가 주도한 거 아니냐면서.
-만약 그렇다면 투마로우는 점점 빌런으로 흑화한다는 거 아니냐? 이익을 위해선 나라 하나 정도는 튀겨먹을 수 있는.
-그런데 그걸 꼭 나쁘게만 볼 수는 없어. 약점을 보였으니 공격당하는 거잖아. 이번 아르헨티나만 해도 파업으로 경제가 좀 무너지긴 했어도 이번만 넘기면 부정부패한 정치 세력을 몰아낼 수 있고 앞으로 투명한 회계와 탄탄한 성장을 할 수 있으니까. 투마로우는 이익을 위해 공격한 거지만 그 나라로 보면 잘못된 부분을 개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어.
-그렇지. 아르헨티나처럼 자원이 풍족한 나라면 경제가 훨훨 날아가겠지.
어!
대화를 나누던 둘은 말을 멈추고 서로를 쳐다봤다.
-대박, 그럼 벙기를 인수한 투마로우는 훨훨 날아가는 거야? 벙기만 억울한 거 아냐?
-아니지. 벙기는 못 한 걸 투마로우는 한 거지.
-그게 그러네.
월가에서는 벙기를 인수하는 투마로우를 긍정적으로 바라봤다.
***
카킬 이사회.
보통 기업의 이사회는 이사 6명이 선임되어 중요한 안건을 처리하지만 카킬의 이사회는 6명의 이사와 24명의 대주주가 참석한다.
30명의 가문 사람들 모두가 모여서 회의 진행을 주시했다.
그랙 파이가 이사들을 보며 4대 곡물 메이저의 위기를 설파했다.
“이제 4대 곡물 메이저의 시대는 갔습니다. 투마로우라는 거대 공룡이 곡물 시장을 장악할 것입니다. 우리도 빠르게 대처해야 합니다.”
그렉 파이의 말을 듣고 있던 이사 하나가 피식 웃었다.
“이봐요, 그렉. 과장이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 나도 눈이 있어 뉴스는 봅니다. 벙기가 투마로우에 인수된 건 압니다. 그래 봐야 벙기의 점유율은 15%에 불과해요. 카킬이 전 세계 곡물 시장의 40%를 장악하고 있는데 투마로우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카킬을 넘어서진 못합니다.”
“언론에서 발표한 것만 보면 그렇습니다. 하지만 ADM이 투마로우와 손을 잡았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그래봐야 ADM도 20%인데 벙기와 합치면 35% 아직 우리가 앞섭니다. 그리고 손을 잡은 거지 합병이 아니잖아요. 각자 살길이 있는데 너무 요란 떤다는 생각 안 듭니까?”
“그건.”
안일한 놈들.
배당만 처먹고 이 시장을 머리가 아니라 눈으로만 보니까 위기가 뭔지 모르지.
카킬은 1년에 배당액만 70억 달러다.
30명이 최소 2억 달러를 가져간다.
현재 카킬 가문에서 카킬에서 일하는 임원은 단 한 명도 없다.
전부 선대가 심어 놓은 나무에서 1년에 한 번 열매만 똑 따먹고 나 몰라라 하는 족속들이다.
“좋습니다. 그 로이드레퓌스도 넘어가면 그들이 50%가 넘는 시장을 점유하는데. 이제는 긴장이 되십니까?”
“로이드레퓌스? 이 할망구가 미치지 않고서야 갑자기 왜 투마로우와 손을 잡습니까?”
“이사님, 정말 신문 보신 거 맞습니까? 그럼, 수에즈라는 기업은 들어 보셨습니까?”
“수에즈? 그게 누군데요?”
“곧 로이드레퓌스를 인수할 프랑스 곡물 회사입니다. 벌써 유럽 곡물은 그들이 전량 매입하고 있습니다.”
카킬 가문 사람들은 수에즈가 들먹여지자 수군댔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
-그냥 40%만 점유해도 괜찮지 않나요?
-귀찮게 됐네.
“그래도 40%를 점유하면 되지. 꼭 욕심을 부려야 되는 겁니까?”
뭐 욕심?
이런 배부른 놈들.
내가 이런 놈들을 위해 뼈 빠지게 돈을 벌어 이놈들 아가리에 처넣어 준 거구나.
정말 투마로우와 달라도 너무 달라.
실버스타가 말한 게 이거야.
투자은행이라면 다르다고 한 게.
또 다른 이사가 나섰다.
“그래서 어쩌자는 겁니까?”
그렉 파이는 입술을 깨물었다.
과연 상장하자고 하면 어떻게 반응할까?
말도 안 된다고 하겠지.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한다.
“카킬은 뉴욕증시에 상장해야 합니다.”
“뭐요?”
-뭐라는 거야?
-미친 거 아냐? 할아버지가 절대 상장은 안 된다고 했는데.
-CEO를 갈아 치울 때가 된 거 아냐?
그때,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20대 초반의 여자가 손을 들었다.
일순 가문의 모든 입이 닫히고 여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이 여자가 바로 자그마치 카킬의 지분 10%를 가지고 있는 엘리자베스 카킬.
일선에서 물러나는 할아버지가 자신의 지분을 모두 이 아이에게 줄 정도로 이 게으른 족속 중에서도 천재적인 두뇌를 타고난 아이.
“상장은 어떻게 하나요? 우리가 지분을 내놓아야 하나요? 아니면 신주를 발행하는 건가요?”
-엘리자베스.
여기저기서 신음 같은 소리가 탄식이 흘러나오자 엘리자베스가 일갈을 날렸다.
“조용히 하세요.”
차가운 음성이 튀어나오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렉 파이가 엘리자베스를 보았다.
네가 있었지. 그나마 다행이다.
“신주를 발행할 겁니다.”
“그럼 저희 지분보다 적게 발행하겠군요.”
“네. 49%에 맞출 겁니다.”
“50% 넘어도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배당만 받으면 신경도 안 쓸 분들이 전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