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그렇게 해서 밥은 먹을 수 있겠어?(10)
카킬.
쾅.
그렉 파이가 책상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것들이 정말.”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당장 4대 메이저 CEO들과 긴급회의 소집하세요.”
“알겠습니다.”
월가의 헤지펀드들이 무차별적으로 남미와 아시아의 곡물을 사들였다.
전 세계에 돈이 남아돈다.
미국에 이어 일본도 슬슬 양적 완화를 준비해야 한다고 떠들어 댔다.
일본은 2001년부터 5년간 양적 완화로 엔화를 풀었지만, 물가는 도리어 하락했다.
더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
“이게 왜 이렇게 된 거야?”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월가의 헤지펀드들이 몰려들면 유럽 헤지펀드들이 달려드는 건 시간문제였다.
곡물 메이저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비축분을 풀어서 가격을 떨어뜨려서라도 헤지펀드들이 물러나게 만들어야 하는데.
후.
그렉 파이가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었다.
띠리리리링.
ADM?
오지 않고 전화를?
“페리노. 오랜만이네.”
-긴급회의를 소집한다고 하던데. 맞나?
“그래, 지금 헤지펀드들이 설치고 있다고 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않나.”
-나는 별로 타격이 없는데.
“뭐? 그게 무슨 소린가?”
-우리 공급망에는 문제가 없다고. 헤지펀드가 설치는 곳은 카킬의 공급처던데. 그러니 난 긴급회의에 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려 전화했어.
뭐라고? 카킬의 공급처만 공격당한 거라고?
그렉 파이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떠오르는 이름 하나.
빌어먹을 투마로우.
“자네 옛날 일로 투마로우와 손잡고 나를 공격하는 건가?”
-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옛날 일은 이미 잊은 지 오래고. 투마로우와 손잡기는 뭘 손잡았다는 거야? 중국 기업을 인수한다기에 수수료 받고 그냥 이름만 빌려줬을 뿐인데. 자네 과장이 너무 심해.
“그런데 어떻게 월가 헤지펀드가 카킬 공급처만 공격하는 거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자네가 직접 월가에 전화를 해보면 되지. 하여튼 나는 못 가니 그리 알고 끊을게.
툭.
이놈이 일부러 염장을 지르려고.
그래도 일리 있는 말을 했네.
그렉 파이는 월가로 전화를 걸었다.
카킬은 여유 자금을 전담해서 투자해주는 부티크, 카킬실버스타를 자회사로 두고 있었다.
부티크는 투자은행 역할을 해주는 투자사를 가리킨다.
미국에서 실력 있는 뱅커가 자신의 이름을 걸고 고객의 자금을 투자해주는 곳을 부티크라 부른다.
띠리리리링.
실버스타의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
긴 한숨.
-그렉, 전화 올 줄 알았어.
“실버스타, 헤지펀드들이 왜 카킬의 공급처를 공격하는 거지?”
-그게, 몇 달 전 월가의 소식지에 투마로우의 근황에 대한 기사가 실렸어. 프랑스 수에즈투자사를 통해 프랑스 곡물을 전부 사들인다는 기사지.
“그건 나도 알고 있어. 수에즈가 투마로우 자회사라는 것도 알고.”
-그럼 이야기가 쉽겠네. 수에즈가 ADM과 손잡고 중국의 대두 기업을 인수하여 식용유 가격 인상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둔다는 예측 기사였는데.
“ADM과 손잡은 게 아니라 단지 이름만 빌려줬다고 하던데.”
-그게 무슨 상관인가?
“뭐?”
-단지 월가 뱅커들은 투마로우와 척을 지기 싫은 거야. 여기 뱅커들은 투마로우를 따라서 투자하고 있다고. 그러니 당연히 ADM 공급처는 피하는 거지.
“그놈들이 카킬은 무섭지 않고 투마로우는 무섭단 말이지?”
후.
-그렉, 진정하고 들어. 월가의 뱅커들은 이제 국가 따위는 무서워하지도 않아. 영란은행 사태로 영국을 무너뜨릴 때만 해도 놀라워했지. 하지만 이후 투마로우가 벌써 나라를 몇 개나 무너뜨렸는지 알아? 국가도 무서워하지 않는데 카킬을 두려워하겠나? 카킬이 투자은행이라면 모를까.
“투자은행이 대단한 건 알겠는데. 그 정도라고?”
-충고 하나 하지. 투마로우와 싸우려 들지 마.
“싸우려는 게 아니라. 우리 공급망에서 손을 떼라고 말하는 거야.”
-그게 그거라고.
“이봐 실버스타, 자네가 나서줄 수 없나?”
-나서고 있어. 하지만 역부족이야. 우리가 움직이는 자본력은 월가에서 보잘것없는 수준이거든.
“미치겠네.”
-한 가지 방법은 있는데.
“방법? 그게 뭔데?”
후.
-투마로우 임재준을 만나. 카킬은 투마로우와 척을 진 적이 없으니 선의의 피해자잖아. 도움을 청하게. 카킬이 임재준을 만나는 사진 한 장이면 이 사태는 해결이 될 거야.
“뭐?”
-언론에 흘리고 공식적인 자리를 만들어 봐.
어라.
그래, 이건 순전히 월가 놈들이 착각해서 일어난 일이다.
그럼 내가 투마로우와 손잡는 시늉이라도 하면 다 해결되는 거잖아.
“알았네. 임재준을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지?”
-내가 알아볼게.
“그래, 힘 좀 써줘.”
툭.
흠. 근데 이 기분은 뭐지?
그렉 파이는 약간의 안도가 찾아오자 수치심이 훅 밀려왔다.
쪽팔리네.
언제 이런 일을 겪어 보았는지 기억도 없다.
국가라고 하더라도 카킬은 아래로 내려다보았는데.
곡물 없이 버틸 수 있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참담하네.
자꾸 실버스타의 말이 생각났다.
‘카킬이 투자은행이라면 모를까.’
투자은행이 기업 순위에 상위권을 차지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킬도 만약 상장한다면 기업 순위 열 손가락 안에 든다고 했는데.
이렇게 차이가 나나?
임재준을 만나면 뭐라고 하나?
***
ADM.
하하하하하하.
페리노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웃어 본 지가 얼마 만인지 모른다.
이 상황이 통쾌라는 단어에 딱 어울렸다.
벌컥.
윌켄이 들어오면서 페리노의 상태에 피식 웃어 버렸다.
“그렇게 좋아?”
“당연하지. 가슴에 맺힌 덩어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 것 같아. 정말 후련해. 이게 정말 현실이라는 게 믿기지 않아. 그렉 파이의 얼굴이 썩어 들어가는 걸 직접 못 본 게 억울할 지경이야.”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긴장을 풀지는 마.”
“걱정 마. 카킬이 숨통이 끊어지기 전에는 마음을 놓지 않을 거야.”
윌켄은 페리노의 즐거움에서 팀원들의 얼굴이 겹쳤다.
우리도 저렇게 즐거워할 때가 있었는데.
이제는 너무도 당연히 여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이게 다 보스 때문이지.
“페리노, 이제 진짜 자네 실력을 발휘해야 해. 헤지펀드들이 계약한 농장은 기껏해야 1년이야. 재계약 시점에 되면 카킬이 달려들어 다시 계약할 거야. 그때는 늦어. 지금부터 빠르게 움직여서 1년 후 계약 협상을 하는 게 좋아.”
헤지펀드들이 카킬 재배지 중 만기가 도래한 곳을 정확히 찾아내 단기 계약을 체결했다.
헤지펀드 특성상 장기 계약은 무리니까.
곡물 가격이 오른다는 보장이 있으니 달려든 거지, 농장을 운영한다는 건 투자은행 특성상 좀 웃긴 일이다.
“알고 있어. 우리도 움직이고 있으니 걱정 마. 이미 계약 가능한 공급처도 다 파악해 놓았어.”
오.
페리노가 자신 있다는 듯 주먹을 쥐어 보였다.
읠켄이 그 모습에 같이 주먹을 쥐며 호응했다.
“페리노, 내가 곡물에 대해 잘 몰라서 물어보는데, 카킬이 중국에 대두를 수출할까?”
“당연하지. 계약한 한 해 물량은 무조건 맞춰줘야 해. 그 이상은 힘들겠지만. 근데 과연 카킬이 중국으로 대두를 제때 보낼까 의문이 들긴 해.”
“왜 그렇지?”
“지금 헤지펀드 롤 모델이 누군데? 투마로우 아니야?”
“그렇지.”
“지금 투마로우가 하는 걸 봐. 프랑스에 곡물 엘리베이터가 300개를 넘어서고 있어. 정말 무식하게 곡물을 쌓기만 하고 있잖아.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잉여 곡물을 모조리 사들이고 있어. 자네 보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헤지펀드들도 투마로우가 곡물을 풀기 전까지는 쌓아 놓기만 할 거야. 그러면 가격은 폭등하겠지. 카킬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가격이 진정될 때까지 공급을 미룰 거야. 지금까지 그래왔으니까.”
“중국이 가격을 맞춰 주기 전까지는 공급을 미룰 거란 말이지?”
“그렇지.”
“그럼 중국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 같은데.”
투마오루가 중국 대두를 전부 쥐고 있고 카킬이 대두를 보내지 않는다면 대두 대란이 일어난다.
식용유와 가축 사료는 옥수수로 대체가 가능하지만. 자급률 90%가 넘는 옥수수도 점점 수요가 커지며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누군가 책임질 대상이 필요할 테지만.
그런데 그 대상이 투마로우는 아니지.
“윌켄, 우리가 거래하는 건 먹는 거야. 생명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거라고. 공급을 미루면 누가 죽어 나가는데. 아무리 중국이라도 곡물 앞에선 머리를 숙여야 해. 웃돈을 주고라도 사야지. 곡물은 자칫 공급에 차질이 생기면 13억 중국인들이 정부를 향해 들고 일어날 거야.”
“음, 그렇겠네.”
가뜩이나 빈부의 격차가 K2보다 큰 중국인데 기본 먹거리가 공급이 안 되면 뒤집어엎을 것이다.
이때,
띠리리링.
못 보던 전화번호인데.
“여보세요.”
-저 실버스타입니다. 기억하십니까? 전에 한 번 뵌 적이 있는데.
실버스타? 누구지?
“죄송합니다. 제가 기억력이 좋지 않아서요.”
-아, 네 그건 중요한 게 아니니 상관없습니다. 저는 월가 파인 스트리트에 있는 카킬실버스타 팀장입니다.
카킬?
“카킬 투자사군요.”
-네, 그냥 조그맣게 하고 있습니다.
“근데 무슨 일이십니까?”
-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그렉 파이가 임재준과 대화를 원합니다.
급한 모양이네.
“일단 알겠습니다. 보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네. 기다리겠습니다.
큭큭큭.
페리노가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자 윌켄이 썩은 미소를 지었다.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네.”
“당연하지. 자그마치 카킬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생겼는데. 신용은 월가보다 우리가 더 중요하다고.”
“그렇겠지. 먹고 사는 문젠데.”
“그래, 자네 보스에게 연락할 거야?”
“해야지. 선택은 보스가 해야 하니까.”
윌켄이 핸드폰을 들어 톡톡 두드렸다.
띠리리리링.
“보스. 윌켄입니다.”
-네. 무슨 일입니까?
“카킬에서 보스를 보자고 하는데요.”
-월가 헤지펀드들을 말려 달라는 말이겠네요.
“그렇겠죠. 지금 여기저기 뜯겨서 상처투성이일 테니. 만나 보시겠습니까?”
-윌켄 생각은 어때요? 아니 옆에 페리노 있죠? 그에게 물어보세요. 내가 만나는 게 좋은지 아닌지.
“네? 그걸 왜 페리노에게 물어봅니까?”
-일단 물어보세요.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페리노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나?
윌켄이 고개를 끄덕이며 페리노에게 물었다.
“페리노, 자네 생각은 어때? 보스가 그렉 파이를 만나야 하나 말아야 하나?”
“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음.
임재준과 그렉 파이가 만난다.
내 대답을 원하는 거면 우리 메이저의 생각이 궁금한 건가?
가만. 내가 투마로우와 전혀 상관없는 입장이라면?
그래, 벙기. 벙기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임재준과 그렉 파이가 만나는 그림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
항복.
하하하, 이거 정말 묘한 상황이 연출되는구나.
“윌켄, 나는 둘이 만났으면 하네.”
“그래?”
윌켄이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을 들었다.
“보스, 들으셨죠? 페리노는 만났으면 한답니다.”
-페리노. 똑똑하네요. 윌켄, 카킬 IPO 준비하세요.
“네? 카킬을 상장시키겠단 말이에요?”
-일단 다 찢어발긴 다음에.
와! 그림이 이렇게 되는 거였어?
이번엔 나도 놀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