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그렇게 해서 밥은 먹을 수 있겠어?(4)
허름한 식당.
어서 오세요.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해가 진 저녁인데도 소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페렐라는 성큼 안으로 들어가 마치 익숙한 곳에 온 듯 구석 자리로 향했다.
정장을 잘 차려입은 신사가 잘 구워진 소고기 갈비를 접시에 놓고 잘라 먹으며 TV를 보고 있었다.
키칠로가 알려준 대로 대통령 비서실장의 뒷모습이 보였다.
옆 테이블에 앉은 페렐라가 먼지를 털어내며 신사를 쳐다봤다.
보스처럼. 보스처럼.
“뭐 좀 재밌는 거 하나요?”
“그냥 보는 겁니다.”
페렐라는 벽에 걸린 메뉴를 보고 종업원에게 손을 들었다.
“여기 맥주 하나만요.”
TV에선 키칠로가 나와서 토론이 한창이었다.
“이야, 잘해. 역시 적폐의 저격수. 이게 다르네.”
페렐라가 손가락을 입 모양으로 만들며 말했다.
“진짜 입 좀 놀리는 사람 못 보셨나 봐요.”
“아니, 저 사람 몰라요? 예전에 대통령 비리와 탄핵안 들고나와서 정계 사람들 싹 다 물갈이하게 만들었던 사람인데. 별명이 코르도바 성당의 요정이던가.”
신사는 먹던 음식을 멈추고 TV를 보았다.
“저 얼굴이? 무슨 요정? 요정이 아니라 관종이겠지. 저 사람은 그냥 심부름꾼이야. 진짜는 따로 있었다고.”
“설마요.”
“왜 내 말을 안 믿지?”
“그냥 길거리 잡지에 나온 기사를 믿는 거 같은데. 그거 다 꼰대들이나 하던 짓인데.”
“뭐라고?”
“왜 그렇게 화를 내요? 처음 보는 사람한테.”
그러게.
“미안합니다. 저도 모르게. 하하.”
“괜찮습니다. 카를로스 비서실장님.”
“뭐?”
카를로스는 그 말에 자신을 아는 이와 대화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기 이곳은 어린 시절을 보낸 도시 외곽에 위치한 작은 마을.
한 달에 한 번 이 식당에 들러 식사를 하며 마음의 안식을 찾는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까지 찾아와서 자신의 이름을 들이댔다면 분명 목적이 있다는 이야기.
“당신 뭐야?”
“뭐라니, 사람이죠.”
“그러니까 어디 소속이냐고? 아니면 기자야?”
페렐라가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카!
“시원하다. 시원해.”
그리고 카를로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투마로우. 당신이 말한 저 심부름꾼에게 심부름시킨 사람.”
“뭐라고?”
벌떡.
카를로스가 당장이라도 나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질 하고는. 그래서 어디 쥐꼬리만 한 돈이라도 만지겠어요? 큰돈을 만지려면 사람이 차분해야 하는데. 아, 10억 달러면 큰돈도 아니지만.”
멈칫.
10억 달러?
다시 돌아와 자리에 앉았다.
“목적이 뭐야?”
“우리가 이번에 퓨솔을 팔려고 하는데 정부가 좀 사줬으면 해서요.”
“퓨솔? 진짜 판다고?”
“왜, 거짓말 같아요? 가격만 맞으면 정리하고 싶거든요. 어째 의향은 있나요?”
“의향?”
당연히 있지.
그런데 너 진짜 투마로우냐?
투마로우가 왜 가만히 있어도 매년 수억 달러를 벌어주는 거위의 배를 가르려는 거지?
“무슨 속셈이지? 이해가 가지 않는데.”
“이유는 충분하죠.”
일단 되든 안 되든 질러보고.
“벙기 농장이면 거래 이유로 좋은데.”
벙기 농장?
그건 미국 본사에서 나서야 하는 거잖아.
“음, 그건 내가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 곤란해.”
“아, 곤란하군요.”
그렇지. 그냥 한번 던져 본 거야.
어쨌든 대통령에게 말은 한번 들어가겠지.
투마로우가 벙기 농장을 원한다. 뭐 이렇게.
“그럼, 교환할 게 뭐가 있을까요?”
“그보다 왜 퓨솔을 팔려는 거지? 난 아직 이해가 가질 않아.”
페렐라가 다시 맥주를 한 모금 시원하게 마셨다.
카.
청량한 소리를 내고는 카를로스를 봤다.
“정치란 참. 당신이 정치인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겁니다. 손익만 따지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죠. 이 좋은 기업을 왜 팔까. 하지만 우린 월가의 뱅컵니다. 뱅커가 자꾸 석유 생산량이나 채크하고 있고. 세금이 얼마네. 세금이 많네. 세금을 절약하는 방법은 뭐네. 세금이, 세금이. 제조업은 세금이 왜 그렇게 많은지. 월가 뱅커의 몸값이 얼만 줄 알아요? 그 시간에 기업 인수해서 리모델링한 후 팔면 퓨솔에서 나오는 이익의 열 배는 법니다.”
“세금?”
아, 그렇구나.
세금 때문에 시간 낭비를 한다.
살짝 끌려오는 듯 보이자 한발 더 나아갔다.
“그리고 조만간 수출 관련 세금 올릴 거잖아요.”
“수출 관련 세금?”
들어본 적이 없는데.
나도 모르는 세금 인상을 투마로우가 알고 있다고?
“그럴 계획이 없는 거로 아는데.”
“정말입니까? 이상하네. 우리 보스가 아르헨티나 인플레이션을 잡을 가장 확실한 방법은 수출 관련 세금을 올려서 수출 물량을 내수로 돌려야 한다고 했는데. 들어보지 못했단 말이죠?”
“잠깐, 잠깐.”
뭐? 인플레이션을 잡을 수 있다고?
이건 대통령에게 전달해 볼 만한 이야기인데.
그렇지. 시중에 풀린 자금이 금리 인상으로 안 잡히는 이유가 바로 수출 대금이었어.
어쩐지. 한 해에 1,000억 달러의 돈이 쏟아져 들어오니 금리를 아무리 올려도 소용이 없었던 거야.
특히 농산물. 저 벙기 농장. 그리고 퓨솔.
전부 세금을 올려서 수출을 줄이면 인플레이션을 막을 수도 있겠는데.
“들어본 거 같아. 내가 잠시 착각했을 뿐이야. 재무부나 중앙은행에서 세부사항을 조율한다고 했던가.”
“그렇죠? 인플레이션을 잡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다고 했어요.”
벌떡.
갑자기 마음이 급한지 카를로스가 일어났다.
“이만 가 봐야겠어.”
“벌써 가시려고요? 아, 그렇겠네. 시간은 돈이니까. 좋은 소식 들리길 바랍니다. 얘기 잘 되면 실장님께 큰 선물 하나 드릴게요.”
“선물?”
“시실리에 별장 어떠세요.”
꿀꺽.
마른침 넘어가는 소리가 어찌나 큰지 페렐라 귀에도 들렸다.
“빨리 가 보세요.”
“어, 그럼. 다음에 꼭 보자고.”
카를로스 비서실장이 멀어지자
어휴.
페렐라는 한숨을 길게 쉬었다.
보스처럼 하는 게 쉬운 게 아니구나.
역시 난 머리 굴려서 인수 가격이나 산정하는 게 딱 어울려.
***
프랑스 아브르 항구도시.
아고고고고고고.
재준은 힘껏 기지개를 폈다.
이게 무슨 사서 고생이란 말인가.
“보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닙니까?”
“뭘, 이 정도는 돼야지.”
“그래도…….”
재준은 센느강을 따라 곡물 엘리베이터 딱 100개를 동시에 짓고 있었다.
개당 건설비용이 180만 달러이니 1억 8천만 달러가 들어가는 대공사였다.
내가 한다면 한다고.
어디 두고 봐라, 마가리타, 이 못된 아줌마야.
전문가들과 일일이 돌아다니며 100개의 현장을 일일이 체크했다.
바쁜 와중에 자꾸 워서스틴이 통화를 해서 울화통이 터지긴 했지만.
오늘은 프랑스 대통령 올랑도가 방문하기로 했다.
아직도 해결이 안 되는 그리스 사태로 프랑스 분위기가 엉망진창인데 이 대규모 공사로 국민들의 반응이 한껏 고조되었다.
[수에즈투자사 유럽 최대 곡물 회사로 거듭나다. 투마로우는 공사 대금으로 발행한 채권 전량 매입. 프랑스 국민 일자리 창출에 대대적으로 환영]
이런 곳에 정치인이 안 나타나면 안 되지.
적당히 신문에 오르내려야 다음 연임에 지장이 없다.
프랑스 대통령은 5년 임기에 한 차례 연임이 가능하다.
잘하면 10년을 대통령으로 살아갈 수 있다.
잠시 후.
올랑도 대통령이 도착하고 재준을 향해 두 팔을 벌리며 다가왔다.
“무슈. 오랜만입니다.”
“네. 대통령님.”
둘은 악수를 격하게 하고 마주 보며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
팟팟팟팟팟.
카메라 플레시가 터지자 가볍게 손을 들고 미소를 지었다.
[올랑도 대통령. 투마로우 임재준과 공사 현장 시찰. 프랑스 농업에 큰 업적을 세울 것이라 기대]
뭐 대충 이 정도 기사가 나가겠지.
프랑스 농업.
프랑스 농지는 대략 30만㎢로 한국 국토 면적이 10만㎢니까 대략 한국 국토의 3배에 달하는 면적이 농지인 셈이다.
곡물도 종류별로 생산할 수 있고 품질도 좋은 편이다.
땅이 사기지.
그런데,
전에도 말했듯이 프랑스는 식량 자급률이 300%가 넘기 때문에 200%에 해당하는 곡물은 정부가 매입하여 폐기 처분한다.
한국 국토의 2배에 달하는 면적에서 생산된 곡물을 어떻게 폐기한다는 거야?
200%를 수출하면 되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수요를 초과하는 공급 물량을 시장에 풀면 가격이 생산 비용 아래로 떨어지는 가격 대폭락이 일어난다.
프랑스로서는 돈 낭비, 곡물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재준은 이 폭탄을 카킬 위에 뿌릴 생각이다.
아니, 그 전에 그 못된 아줌마부터 잡고.
기자들과 떨어지자 개인적인 대화가 시작됐다.
“무슈, 폐기 처분되는 곡물을 이렇게 다 매입해 주면 내가 뭐라고 고마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별말씀을. 이 기회에 곡물 메이저들의 버르장머리를 뜯어고쳐야 합니다. 먹는 거로 장난치는 놈들은 용서가 안 돼요.”
“하하하. 맞습니다. 맞아요. 저희가 곡물을 폐기했던 것도 다 곡물 메이저의 정치적 압박에서 비롯된 겁니다. 저희가 나서서 해결할 수 없었는데. 투마로우가 나서니 정말 뭐라고 고마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정치적 압박은 걱정 마세요.”
“하하하.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습니다.”
그렇지. 정치적 압박.
프랑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면 당연히 미국이 나서서 한마디 해야 한다.
프랑스는 곡물 가격 안정을 저해하는 행위에 대해 반드시 미국을 이해시켜야 할 것입니다. 뭐 이 정도.
하지만 이미 미국 대통령은 재준에게 카킬을 내주고 중국을 견제하도록 계약서를 쓴 상태라 아무런 조치도 취할 수 없었다.
“근데 무슈, 저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괜찮겠습니까?”
곡물 메이저가 투마로우의 움직임에 깜짝 놀랐겠지.
“뉴욕 증시에 상장되어있는 ADM과 벙기는 함부로 나서지 못해요. 나섰다가는 투마로우 표적이 될 수 있으니까요.”
“그래도 둘은 막지 못하겠군요.”
“카킬과 로이드레퓌스는 지분도 가문이 소유하고 있어서 저희가 어쩌지는 못하지만, 기업 아닙니까. 대출 없이 기업을 운영하는 회사는 없습니다. 채무 만기 연장 카드를 들이대면 당장에는 어쩌지 못할 겁니다.”
이게 바로 은행이 가진 진정한 힘이다.
어딜 감히 기업 따위가 은행한테 까불어.
“근데 그 로이드레퓌스는 프랑스 곡물을 꽤 사 가는데 어떻게 하실 겁니까?”
“원래대로 거래하셔야죠. 프랑스에 이익이 되는 일인데. 그건 제가 나서서 이래라저래라할 일은 아니죠.”
“그래요? 거 참. 무슈는 알다가도 모를 사람입니다. 이럴 때는 로이드레퓌스 공급 물량을 빼앗아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제가 듣기로는 이미 곡물 메이저들은 각자 나라가 정해져 있다고 했습니다. 이 기회에 프랑스가 로이드레퓌스에게 공급을 하지 않으면 쓰러뜨리는 게 더 쉽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진짜 곡물 메이저 전체와 싸워야 합니다. 전 자연스럽게 자기들끼리 싸우는 걸 원하는데요.”
“무슈가 원하는 건 따로 있군요. 음.”
싸움이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건 또 뭘까?
“그런데 이 창고들. 너무 많은 거 아닙니까? 프랑스 곡물을 전체를 한꺼번에 저장해도 남을 것 같은데.”
“다른 나라에서도 곡물을 사 올 겁니다.”
“아, 다른 나라. 이탈리아.”
이 당시 곡물 엘리베이터의 저장 용량은 대략 500만 부셸.
1부셸이 27kg 정도 하니까. 13만 5,000톤 정도 담을 수 있다.
20톤 트럭 6,750대 분량이다.
어마어마하지.
곡물 엘리베이터가 100기 모두 완공되면 20톤 트럭 675,000대 분량을 저장할 수 있다.
이뿐일까, 앞으로 전 세계에 1,000기는 더 지을 것이다.
다 죽었어.
프랑스에 저장된 곡물은 당분간 풀지 않는다.
한 번에 쏟아내야 카킬이 기겁할 테니까.
자, 이제 유럽은 대충 정리가 됐으니 중국을 들쑤셔 볼까.
열심히 팔아먹을 생각밖에 없는 중국에게 열심히 사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