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그렇게 해서 밥은 먹을 수 있겠어?(3)
아르헨티나 벙기 농장에서 좀 떨어진 곳.
벙기는 존 요한 가트리브 벙기라는 사람이 1818년(?)에 네덜란드에서 설립했다. 이후 벙기는 40년 후 벨기에로 건너갔다가 25년 후에 아르헨티나로 간 다음 21년 후에 브라질로 사업을 확장하고 1994년에 뉴욕 증시에 상장하면서 본사만 미국에 정착했다.
솔직히 본사가 미국에 있을 뿐 어느 나라를 본진으로 삼고 있는지 알기 어렵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건 아르헨티나에 가장 큰 농장을 가지고 있었다.
아르헨티나가 워낙 땅이 좋다.
뭘 심어도 막 자란다.
대략 매출은 500억 달러.
페렐라는 나무에 팔을 기댄 채 벙기 농장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페렐라와 위서스틴은 아르헨티나로 가서 벙기와 손을 잡도록 해.’
재준의 지시대로 아르헨티나로 날아왔다.
아르헨티나 정부를 이용해서 벙기 농장을 장악하고 미국 본사를 압박하려는 게 워서스틴과 페렐라의 계획이었다.
근데 웬걸, 아르헨티나 정부와 미국 본사의 유착 관계가 예상외로 끈끈했다.
즉, 벙기 농장을 정부가 운영하고 있다?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어디 있나?
정부가 할 일이 얼마나 없으면 사기업 농장을 다 관리해 주고 있다니.
여긴 진짜 노답인 국가다.
후.
저 멀리 석양을 바라보며 다시 한숨을 깊게 내쉬자,
“화보 찍냐? 여기까지 와서. 그나저나 아르헨티나 정부가 원래대로 돌아갔으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아마 벙기 농장의 약점을 잡는다고 해도 본사로 가는 길목은 전부 차단되어 버릴 거야.”
워서스틴이 폼 잡고 농장을 노려보는 페렐라에게 커피를 건네주었다.
그 뒤에서 키칠로가 미안한 듯 고개를 숙이고 커피를 홀짝였다.
죄송합니다.
이 모두가 제가 못나서 생긴 불찰입니다.
국민을 위한 정부가 들어서고 4년. 그게 끝이었다.
대선에서 국민의 등골을 빼먹는 정치인들이 다시 당선되었다.
돈을 막 뿌려 댄 거지.
얼마나 뿌려댔으면 인플레이션이 왔을까.
솔직히 배고픈 국민들에게 눈앞에 보이는 돈은 희망찬 미래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유혹이었다.
괜찮아. 키칠로 네 잘못이 아니야.
페렐라는 키칠로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커피 맛있네요.”
“워서스틴에게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습니다. 벙기 농장과 미국 본사 사이를 끊어 놓는다고요?”
“생각은 있는데 실천이 안 되네요. 하하.”
“내 생각엔 말야.”
워서스틴이 페렐라의 이 상황을 뒤엎을 수 있단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일을 키우는 건 어때? 더러운 일은 다 같이 알아야 제맛이잖아. 모두 잊지 못할 기억을 다시 만들어 주는 거야.”
“예전에 보스가 했던 식으로?”
“그렇지. 이대로 돌아갈 순 없어. 다들 일을 잘 해결하고 돌아올 텐데. 우리만 허탕 칠 수는 없잖아?”
“그럼 언론을 이용해야 하는데 우리가 아르헨티나 언론을 움직일 수 있을까?”
“언론은 이미 정부가 통제하고 있어서 힘듭니다.”
키칠로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음.
이러면 들고 있는 패로는 안 된다는 건데.
“그러지 말고 보스랑 통화해 봐.”
보스?
역시 보스 없이는 안 되는 건가?
그래, 고민하면 뭐해.
워서스틴이 재준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띠리리리링.
-왜? 워서스틴. 그쪽 벌써 끝난 거야?
재준의 목소리에는 ‘난 시작도 못 했는데 넌 벌써?’라는 놀라움이 담겨 있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요. 보스, 그러니까. 이쪽 꽉 막혔는데요.”
-어, 그래? 잘 됐, 아니, 문제가 뭔데?
“정부가 농장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미국 본사와 유착이 심해서 뚫고 들어갈 여지가 없습니다.”
-언론은?
“언론도 정부 손에 놀아나는 것 같고요.”
-그럼, 더 좋네.
“네? 뭐가 좋아요? 할 게 없는데.”
-언론이 정부에 통제된다는 건 국민들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란 거잖아.
“그렇긴 하죠.”
-CGT(전국노동자총연맹) 위원장 우고 보야노를 찾아가. 그가 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을 거야.
“아, 네. 그럼…….”
-그럼, 난 바빠서 끊을게.
뚝.
보스도 바쁜가 보네.
근데 왜 바쁜 거지?
프랑스에 날아가 놓고.
통화를 마친 워서스틴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CGT의 보야노를 찾아가라는데.”
“전국노동자총연맹이요?”
키칠로가 놀란 눈으로 워서스틴을 바라보았다.
미국에 있는 사람이 CGT의 보야노를 어떻게 알고 있지?
세계적인 은행 오너는 모르는 게 없어야 하는 건가?
“키칠로, 우고 보야노를 아세요?”
“잘 알죠. 현 정부가 정권을 장악하는 데 가장 큰 힘을 보탰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버림받았죠. 지금은 CGT를 이끌면서 반정부 세력을 구축한 인물입니다.”
“그래요?”
거 참, 보스는 이런 사람은 또 어떻게 아는 걸까?
물어보면 또 그러겠지. ‘신문에 다 나와 있어.’라고.
“그럼, 그 사람을 만나러 갑시다.”
“그를 만나면 뾰족한 수가 나오는 겁니까?”
“그건 모르죠. 보스는 그가 열쇠를 쥐고 있다고 했으니 일단 만나는 겁니다.”
“아, 네.”
후.
지금까지 아무 힘도 못 쓴 보야노인데.
임재준은 왜 그가 열쇠를 쥐고 있다고 하는 걸까?
일단,
“그럼 당장 가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
CGT(전국노동자총연맹).
“어서 와요. 키칠로.”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죽지 못해 삽니다.”
정말 죽지 못해 겨우 사는 사람의 얼굴을 한 보야노가 키칠로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그러나 워서스틴과 페렐라를 보고는 인상을 찡그렸다.
딱 봐도 미국인.
아르헨티나의 자원만 쏙쏙 빼먹는 놈들.
보야노는 키칠로를 보며 ‘누구?’라는 표정을 짓자,
“투마로우에서 왔습니다.”
아,
그제야 표정을 풀고 악수를 청했다.
“보야노입니다.”
“워서스틴입니다. 이쪽은 페렐라.”
“투마로우라면 지난 정부에게 시원하게 한 방 먹이신 분들 아닙니까? 언제든 환영입니다.”
“큭큭큭, 네.”
의외로 투마로우에 대한 인상이 좋네.
하긴 키칠로와 연이 닿았다면 그럴 수밖에.
서로 악수를 나누며 자리에 앉았다.
“자, 자, 어쩐 일로 저를 다 찾아오신 겁니까?”
지난번 아르헨티나 썩은 정부를 몰아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해 준 투마로우이기에 보야노는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생겼다.
정부에 팽 당하고 반정부 세력을 만들기는 했어도 지금까지 이렇다 할 성과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투마로우가 나타났다.
정부를 찾아가지 않고 자신을 찾아 왔다는 것은 분명 이번에도 크게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
보야노는 둘의 말에 귀를 기울였는데,
“벙기 농장을 먹으려 합니다.”
네?
워서스틴의 거침없는 말에 보야노가 잠시 움찔했다.
페렐라도 어안이 벙벙하게 워서스틴을 바라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인수한다고 해야지,
천박하게 먹는다가 뭐야? 먹는다가.
네가 보스야?
그러자 ‘뭐하긴, 보스 흉내 한번 내 보는 거지’라는 워서스틴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보야노가 답했다.
“먹다뇨? 벙기 농장은 아르헨티나 국민을 먹여 살리는 기업입니다.”
“뭐, 주인이 바뀐다고 수출이 줄어드는 건 아니잖아요? 오히려 더 많은 이익을 노동자에게 돌아간다면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엉?
이익을 노동자에게 돌려준다고?
이거야말로 우리가 바라던 일이지.
지금 정부로 흘러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
그 돈만 노동자에게 돌려준다면 임금이 두 배는 오른다.
그런데,
“좋긴 한데 어떻게 하시려고요?”
“그걸 왜 저한테…….”
워서스틴의 말에 보야노가 눈을 깜빡이며 쳐다봤다.
재준이 흉내를 내는 건 좋은데 여기서 막힌 워서스틴이었다.
보스가 이 사람한테 가면 열쇠가 있다고 했는데.
이 사람 표정을 보니 열쇠는커녕 키홀더도 없는 눈치잖아.
“잠시만요.”
워서스틴은 미소를 지으며 핸드폰을 들어 톡톡 두드렸다.
이번엔 윌켄을 흉내 내기로 마음먹은 워서스틴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띠리리리링.
신호음이 울리자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또 왜? 바빠 죽겠는데.
정말 바쁜가?
“보스, CGT에 왔는데요. 그다음은…….”
-거기까지 갔는데 그다음이라니?
“그러니까요. 뭘 해야 하죠?”
-아니 보야노랑 잘 이야기해서 일을 풀어야지.
보야노와 일을 풀라고?
오히려 나에게 기대는 눈치인데.
워서스틴이 슬쩍 보야노를 보더니.
“힘들 것 같은데요.”
-음, 답답하네. 보야노가 들을 수 있게 스피커 틀어봐.
워서스틴이 스피커 버튼을 누르고 탁자에 핸드폰을 내려놓으며 보야노를 향해 살짝 끄덕였다.
보야노는 나? 라는 표정으로 핸드폰에서 울리는 음성에 귀를 기울였다.
-보야노, 지금 아르헨티나 인플레이션이잖아요.
“그렇죠. 대선에서 돈을 살포했으니까요.”
-시중의 돈을 거두어들이려면 금리를 올려야겠네요.
“그건 힘들 겁니다. 지금도 금리는 충분히 높으니까요.”
-금리는 힘들다. 그럼 다음에 할 수 있는 일은 뭐죠?
“글쎄요. 시중에 풀어 넣은 돈을 거두어들이려면……. 글쎄요.”
-세금 있잖아요. 세금. 세금을 올리면 되죠.
“세금이요? 원성이 클 텐데요.”
-소득세 말고 다른 세금.
“다른 세금이 뭐가 있을까요?”
-그건 만들어 줘야죠.
“네?”
세금을 만들어 주다니 뭔 소리야?
-잘 들어요. 아르헨티나에 투마로우가 소유한 퓨솔이라는 석유회사가 있습니다.
“아, 네. 알고는 있어요.”
보야노가 ‘그건 왜?’라는 표정으로 대답을 했다.
-그거 정부에 팔아 버려요.
“네? 그 알짜 회사를 왜 팔아요?”
-알짜니까 파는 거지. 페렐라, 네가 정부 관계자를 만나서 적당히 싸게 판다고 해. 국유화시키자고 꼬셔.
“그럼 우리만 손해잖아요.”
-아니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그놈들은 안 살 거야. 그러니 살짝 귀띔을 해줘. 수출 관련 세금을 올리면 인플레이션도 잡고 주머니도 빵빵하게 채울 수 있다고.
“네?”
-그다음 보야노가 CGT 동지들에게 불을 지피세요.
수출 관련 세금을 올린다는 건 수출을 줄이겠단 소린데.
그럼 실적이 나빠지고 노동자들의 임금도 동결되고.
“파업을 말하는 겁니까?”
-딩동댕. 바로 그겁니다.
“그거 가지고 될까요?”
-시작은 노동자 파업이지만 다른 부분도 끌려올 겁니다. 굳이 나설 필요도 없어요. 인플레율 조작, 달러화 규제 거래 강화, 치안 불안, 언론 탄압, 고위 정치인 부정부패. 떠들기만 하면 돼요. 모두 파업에 참여할 겁니다.
재준의 기억에 따르면 농업을 시작으로 공무원, 은행원, 심지어 경찰과 군인까지 파업에 참여했다.
그야말로 나라 전체가 아비규환으로 변한 것이다.
보야노는 재준의 ‘모두 파업에 참여할 겁니다’란 말에 놀랐다.
“정말 참여한다고요?”
-네.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여기저기서 터질 겁니다.
불만이야 쌓인 건 나도 알겠는데.
이게 한꺼번에 터져 나온다고?
겨우 몇 마디 떠든 거로?
보야노는 신기한 듯 키칠로를 쳐다봤다.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한 표정의 키칠로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믿어봐요. 보야노.
지난번에도 임재준의 예측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맞아떨어졌고 그가 설계한 그림은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모두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데,
-자,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죠?
“네. 보스, 그러니까.”
-이만 난 바빠서.
툭.
어라 얼마나 바쁘면 이젠 인사도 안 하네.
“페렐라, 이제 우리 할 일을 하고 지켜보자.”
“그래, 어디서 이야기를 하면 좋을까?”
보야노가 보기에는 그랬다.
계획이야 좋다.
파업을 일으켜 정부를 혼란하게 만들고 그 틈에 슬쩍 벙기 농장을 카드로 내밀면서 협상을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인가?
지금 정치하는 놈들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놈들이 아닌데.
투마로우가 빼앗아 준 권력을 딱 4년 만에 되찾아 간 놈들이다.
사회 전반에 그들의 세력이 단단하게 결집해 있는데 이렇게 간단하게?
근데 임재준의 말이라면 소를 양이라고 해도 믿을 저놈들은 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