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1화 돈이 많으면 무조건 나쁜 놈인가(9)
백악관.
“지금 뭐라고 한 겁니까?”
“중국이 위안화를 0.1% 절하했습니다.”
“이 작자들이 진짜.”
평소에 흥분하지 않기로 유명한 대통령이 이를 드러내며 화를 냈다.
작년 G20 회의에서 분명 위안화 절상하라고 말했는데 대충 얼버무리더니 오히려 절하해 버렸다.
“이거 미국을 우습게 보는 거 아닙니까?”
“맞습니다. 그냥 넘기시면 안 됩니다.”
이것들이.
어디서 무역 좀 하더니 감히 미국을 무시해?
“이번에 아주 버릇을 고쳐야 하는데. 뭐 좋은 방법이 없습니까?”
“이 기회에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하겠다고 협박을 하면 어떻겠습니까? 아마 식은땀 좀 흘릴 겁니다.”
환율 조작국?
그거 괜찮네.
“일단 공식적 루트 말고 비공식적으로 흘리세요. 그래야 협상을 요청할 겁니다.”
“네.”
“그리고 민주당 당장 들어오라고 하세요. 지금 표 좀 얻자고 시위할 때가 아닙니다. 환율 조작국에 대한 입법을 논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자국 통화 가치를 낮춰서 대미 무역 흑자를 더 많이 달성하는 나라를 환율 조작국이라 부르는데, 좀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는 않다.
환율을 조작한다는 것은 국가를 상대로 사기를 치는 행위다.
그것도 전 세계 모든 나라를 상대로.
만약 들키면? 뭐, 그날로 금융 거래 정지되는 것은 물론 수출에도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
무역 흑자 조금 올리려고 자기 목을 거는 국가는 없다.
그러니까 환율 조작국이란 건 순전히 미국 입장에서 대미 무역 적자에 대한 화풀이 정도로 보면 된다.
암튼,
환율 조작국 요건은 대미 무역수지 흑자가 200억 달러 이상, 경상수지 흑자가 국내총생산(GDP)의 3% 이상, 외환시장 개입 규모가 GDP의 2% 이상인 나라가 대상이다.
한국, 독일, 중국, 일본, 대만, 스위스 정도이다.
나라들을 보면 알겠지만, 진짜 환율을 조작할 만큼 허접한 국가가 아니라 순전히 대미 무역 흑자국들이다.
한국을 예로 들어보자,
대미 무역에서 흑자가 300억 달러로 당연히 요건 충족.
경상수지 흑자가 GDP 대비 무려 8%에 가까우니까 당첨.
그런데 한국은 죽었다 깨어도 환율 조작국이 될 수 없다.
외환시장 개입 규모가 전무하니까. 아니 오히려 마이너스다.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외환시장에 개입 안 하는 걸 배운 거지.
근데 중국은 대미 무역 흑자가 자그마치 3600억 달러.
이건 뭐 미국이 중국에 수출하는 게 아예 없는 것처럼 보이네.
나머지 두 개는 중국으로서는 말이 안 된다.
경상수지 흑자가 국내총생산(GDP)의 2.4%?
거기다 외환시장 개입 규모는 아예 없단다. 빵, 제로.
이걸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지만 공식적인 문서에 기록되어 있으니까 일단 패스.
나중에 들통나서 왕창 두들겨 맞을 게 뻔하지만.
근데 왜 대통령이 환율 조작국을 들먹인 것일까?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되면 우선 미국 기업이 해당국에 투자할 때 미국 정부가 금융을 지원해주지 않는다.
또 해당국 기업이 미국 정부에 손을 벌릴 수도 없게 된다.
한마디로 미국 정부를 통한 돈줄이 막힌다.
국제통화기금(IMF) 같은 국제기구를 통해 전방위 압박이 들어올 수도 있다.
다른 나라 사이에서 평판이 나빠지면 수출 감소 등 간접적인 악영향은 덤이다.
실제로 중국을 환율 조작국으로 지정할 수 있을까?
불가능하지.
한다고 해도 국제 소송 걸고, 중국이 가지고 있는 3조 달러 다 풀어 버린다고 협박하고, 서로 관세 붙이고, 뭐 다들 알고 있는 차기 대통령인 트 머시기 형님이 전개한 막장 세계가 미리 열릴 수도 있었다.
이번 대통령은 그럴 배짱은 없다.
“그런데 대통령님.”
비서실장의 표정이 많이 안 좋았다.
“무슨 일이 또 있습니까?”
“중국에서 흘리는 것 같은데 이번 위안화 절하 원인이 투마로우라는 소리가 있습니다.”
“뭐요? 투마로우?”
“네, 위안화를 대량으로 매집하고 있다고 합니다.”
“규모가 얼마나 됩니까?”
“정확하게 말은 안 하는데 대충 3,000억 달러 규모라고 합니다.”
“3,000억 달러요?”
“대충.”
이런 정신 나간 인간들.
투마로우 돈이 많다고 하다니 이 정도일 줄이야.
월가를 규제했더니 아예 해외에다가 돈을 실어 나르고 있잖아.
이러니 중국이 화들짝 놀라 위안화를 절하했지.
“임재준 당장 만나자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비서실장이 나가고 대통령이 소파에 몸을 던졌다.
후.
정말이지 못 해 먹겠네.
아니 민주당은 이런 시기에 왜 시위에 나간 거야?
처리할 현안이 얼마나 많은데.
버피세를 논할 거면 차라리 TV 토론이나 하지.
가슴이 답답해져 오는 대통령이었다.
***
재준의 아지트.
개판이 되어 버린 시위를 마친 저녁.
재준은 혼자 조용한 시간을 가졌다.
이제 슬슬 시위대를 빠져나가야 하는데.
뭐라고 구실을 만들고 나가야 하나.
삐이익.
서형길이 바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을 확인한 다음 재준을 발견했다.
지난번 미키가 다짜고짜 샷건을 들고 설친 이후에 생긴 버릇이다.
“도련님.”
“아, 어서 오세요. 술 한잔해요.”
쫄쫄쫄.
위스키가 서형길의 잔에 채워지자 단숨에 원샷을 때렸다.
카! 좋다.
헉!
기분 좋게 한잔을 마시고 눈을 떴을 때 보인 재준의 얼굴이 술맛을 확 떨어뜨렸다.
“도련님, 그 분장 좀 바꾸셔야겠는데요.”
“그러잖아도 이제 이 짓 그만두려고요.”
“정말입니까?”
“네, 민주당에 공화당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원래 버피세를 견제하려고 시작했는데. 거의 된 것도 같고.”
“당장 때려치우세요.”
“근데 문제가 있어요.”
문제? 무슨 일을 또 벌이시려고?
“그냥 이대로 나가면 되는 거 아닙니까?”
“에이, 그러면 뒤끝이 안 좋잖아요. 이왕 시작한 건데 모두 저를 기억하게 만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아, 그렇죠. 최소한 나쁜 놈은 되면 안 되죠.”
“그리고.”
재준이 무언가 비장한 표정으로 말을 하다 끊었다.
또 뭐 하시려고요?
이제 하도 많이 당해서 재준의 표정만 봐도 큰일이 벌어질 걸 짐작할 수 있는 서형길이었다.
꼴깍 마른침이 넘어갔다.
“마지막으로 시위대에서 버피세 반대 연설을 해야겠어요.”
네?
아니 정말 죽으려고 환장하셨어요?
인간의 이해 영역 안에 있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자꾸 밖으로 나가려는 겁니까.
“도련님 그건 아닙니다. 지금까지 잘하던 일에 왜 갑자기 찬물을 확 끼얹으려는 겁니까?”
“그래야 그 자리가 민주당과 공화당의 허무의 장이 되지요. 어쩌면…….”
“어쩌면 뭐요? 너무나 뻔한 상상이 들어서 기대감이 확 떨어집니다.”
“내가 문제가 되겠죠?”
“당연한 말을 왜 하십니까? 제일 먼저 날아오는 돌은 필히 도련님에게 던진 돌일 겁니다.”
“거, 이대로는 안 되겠고. 그럼 어쩐다. 아, 천 실장하고 블랙워터 좀 오라 하세요.”
“천 실장? 블랙워터? 그렇지, 그놈들이 있었지. 잠시만요.”
서형길이 통화를 시도했다.
“헤이. 미야. 컴온 히어. 위드 천.”
-OK.
매번 느끼지만 정말 신기하게 대화가 가능하다.
특히 저 ‘미야’.
저건 분명 ‘It’s me’일 텐데.
‘me’라는 영어와 ‘~야’라는 한국어의 합성어를 미국인이 알아듣다니.
과연 누가 대단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잠시 후, 천 실장과 블랙워터의 수장 테론이 등장했다.
천 실장은 그대로인데, 와우! 테론은 특수부대 출신 아니랄까 봐 전에 봤을 때보다 팔뚝이 굵어진 게 눈에 확 들어오네.
“보스, 부르셨습니까?”
“어, 어, 와서 앉아요.”
저런 덩치가 나를 보스라 부르니 진짜 내가 전쟁을 막 치른 특수부대원 같잖아.
천 실장은 여전히 쓸데없는 말과 행동은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대화는 재준과 테론이 이끌었다.
“테론, 내가 단상에서 연설을 할 건데.”
“으흠?”
“이 연설이 대중을 자극할 것 같단 말이지.”
“신변 보호해야 하는군요.”
“그렇지. 하지만 대놓고 블랙워터가 등장하면 내가 투마로우 오너라는 걸 다 알게 되잖아. 그럼 지금까지 일이 말짱 도루묵이 되거든.”
“말짱 도루묵?”
“헛수고란 소리야.”
“으흠?”
“뭐 좋은 방법이 없을까?”
“화려하게 아니면 확실하게. 어떤 걸 원하십니까?”
화려하게?
“화려하게는 어떤 걸 말하는 거야?”
“연설을 하십니다. 우린 사복을 입고 경계 태세를 섭니다.”
“그게 뭐가 화려해?”
“연설이 끝나자마자 헬기가 머리 위에서 보스를 끌어 올려 멀리 사라집니다. 으흠?”
떡.
서형길은 턱이 빠져라 입을 벌리고 다물질 않았다.
“지금 영화 찍냐? 뭐 헬기? 그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데.”
“우리 팀원이 보스를 안고 있으면 안전하지. 걱정 말게.”
둘이 안고?
“그건 좀…….”
재준은 상상했다.
남자의 품에 안겨 하늘로 올라가는 자신을.
부르르르.
“그렇다 치고. 그럼 확실하게는 뭐야?”
“그건.”
속닥속닥.
뭐?
꽈당.
테론이 말을 마치자 서형길은 바로 뒤로 넘어갔고 재준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바로 이거야. 확실하게로 하자고.”
“시간은 얼마나 걸리지?”
“한 시간이면 됩니다.”
“그래? 그럼 내일 당장. 괜찮아?”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겠습니다.”
“오케이.”
이야 이런 방법이 있을 줄이야.
겨우 일어난 서형길이 재준을 향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이건 진짜 아니다.
테론과 천 실장이 나가자 서형길이 재준에게 득달같이 물었다.
“진짜 하시려고요?”
“그럼요. 정말 확실한 방법이잖아요. 블랙워터가 확실하게 준비한다고 하고.”
이때,
띠리리링.
재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블록?
“응, 블록.”
-보스, 지금 중국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왜?”
-위안화 매집한다는 소문이 돌자 지방자치은행에서 문의가 쇄도하고 있습니다.
“그래?”
이거 돈을 더 벌겠는데.
근데 이상하네.
위안화를 절하했는데 오히려 NDF 거래를 하겠다고?
“이유는?”
-중국이 미국을 겨냥한 위안화 절하라는 게 알려지면서 조만간 절상하지 않겠느냐는 소문이 퍼지고 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일단 중국으로 가 봐.”
-네, 알겠습니다.
“아, 혹시 모르니까. 박민수와 강호석 팀장도 데리고 가. 여차하면 한국으로 튀어야 할지도 몰라.”
-네.
돈을 잃고 싶어 환장을 했다면 거두어 줘야지.
투마로우가 위안화 절하를 조장한 것이 단지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라고만 생각하는 중국.
하지만 이게 선물환이란 사실이 알면서도 덤벼들었다.
그럼, 이쪽에서 먼저 터뜨리면 되지.
서형길이 재준을 보며 뭔 말인지 몰라 눈만 껌뻑거렸다.
“이사장님, 저희 팀원에게 이번 계획을 알리고 대기하라고 하세요.”
“아, 알겠습니다. 대기하라고요.”
“네.”
대기하라고.
대기?
아리송한 표정의 서형길은 밖으로 나갔다.
***
주코티 공원 민주당 지역.
버니 핸더슨의 텐트 안에 상원 의원 여러 명이 둘러앉았다.
시위는 이제 민주당과 공화당이 합류하면서 버피세를 하느냐 마느냐로 치열하게 공방을 펼치는 분위기였다.
당연히 시위대는 여러 가지 구호를 외쳤지만.
이미 언론은 버피세 외에는 대수롭지 않게 다뤘다.
지책의 말대로 시위는 이미 허물어져 있었다.
이런 와중에 블러디 페니가 각 언론사에 기자를 소집했다.
“오늘 블러드 페니가 중요한 발표를 한다는데 그게 뭔지 알고 있습니까?”
“뭐 또 버피세 법안을 만들라고 정부에 공식 요청한다고 하겠지요. 매일 중요한 발표라고 하고는 똑같은 말만 반복하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소렌 상원 의원이 꾀죄죄한 몰골로 나섰다.
거, 아무리 시위 중이지만 좀 씻지.
그런 표정 하지 말아요. 당신도 만만치 않아.
서로 상대의 몰골을 보며 은근히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생방송으로 진행할 거라고 합니다.”
“들었습니다. 다른 날과 다를 것 같습니다. 뭔가 진짜 중대한 발표가 있을 것 같습니다.”
됐고.
버니 핸더슨이 블러드 페니의 발표야 뻔하다는 듯이 손을 저었다.
“만약 버피세에 대한 이야기라면 우리는 다른 때보다 좀 더 적극적인 의사를 표해야 합니다. 그동안 너무 공화당 눈치를 보느라 무르게 행동한 건 사실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오늘은 좀 더 과감하게 나가야 합니다.”
“그건 그거고. 오늘 생중계이니 다들 깔끔하게 단장합시다. 한 블록 너머에 있는 워싱턴 호텔 10층 전체를 빌렸습니다.”
오. 역시.
오랜만에 샤워를 하게 된 상원 의원들은 벌써 기분이 개운해졌다.
그러나 의원들 생각은 다 똑같은 것일까?
워싱턴 호텔에 도착해 보니 공화당 의원들이 있었다.
마주치자 잠시 대기, 시위대가 보지 않는다고 생각하자마자 삿대질을 해대며 대판 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