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돈이 많으면 무조건 나쁜 놈인가(6)
폴 라이레놀 하원 의장 집무실.
똑똑.
복잡한 현안에 대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라이레놀 의장은 갑작스런 노크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들어와.”
비서가 무척 다급한지 자꾸 뒤를 돌아보며 빠른 걸음으로 라이레놀 의장 앞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기에 저래?
평소에 냉정한 사람이.
라이레놀이 심드렁하게 말을 쏘아붙였다.
“큰일이라도 났어?”
“저 의장님.”
“말해봐.”
여기.
비서는 사진 몇 장을 꺼내 탁자에 올려놓고 그중 하나를 의장 앞으로 밀었다.
라이레놀이 사진에 집중하는데,
그냥 평범한 시위 현장 사진이잖아.
가뜩이나 골치 아픈 시위라 짜증이 확 밀려왔다.
“이게 왜? 그냥 시위하는 사진이잖아.”
사진은 연설하는 블러드 페니를 중심으로 대략 100여 명의 군중이 그의 연설을 경청하는 사진이었다.
“잠시만요.”
비서는 빨간 펜을 꺼내더니 사진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기, 여기.
“이게 뭔데?”
“여기 둘은 블랙워터 팀원입니다.”
블랙워터?
“임재준 경호를 맡은 사설 부대잖아.”
“네, 그리고 여기.”
좀 멀찍이 떨어진 군중 중 한 명에게 동그라미가 쳐졌다.
“그래서 세 명이 여기 있다고?”
“이 사람은 서형길입니다.”
서형길?
“그게 누군데?”
“임재준이 한국에서 데려온 팀원입니다.”
이 사람이 지금 뭐 하자는 거지?
“프랭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야? 이들이 임재준과 관계있는 게 왜? 당연히 투마로우도 버피세를 무마시켜야 하는데. 정탐이라도 하는 거 아냐?”
“그리고 여기. 전에 의장님께서 블러드 페니에 대해 알아보라고 하셔서 꼬리를 붙였습니다.”
“그래서 뭐 좀 알아냈어?”
프랭코는 다시 사진 두 장을 라이레놀에게 밀었다.
블러드 페니가 어느 건물로 들어가는 사진 한 장과 서형길이 건물로 들어가는 사진 한 장이 보였다.
어라?
“이 둘이 연관이 있는 거라고?”
“그리고 중요한 건 이 건물은 911 테러 직후에 임재준이 사들인 건물입니다.”
“뭐라고?”
라이레놀은 사진을 다시 들여다봤다.
사진 찍힌 시간을 보니 같은 건물에 둘이 5분 간격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 건물은 임재준 건물이다.
근데 블러드 페니가 이 건물에 들어갔다?
이 건물에?
하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말도 안 돼.
“프랭코, 하하, 지금 당신 말은 블러드 페니가 임재준의 끄나풀이다. 이 말을 하고 싶은 거야?”
“가능성 있는 이야깁니다.”
“그러니까 이 건물 안에 임재준이 있고, 블러드 페니는 임재준에게 보고라도 하려고 들어간 거다?”
“네.”
“나, 이런 사람을 봤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블러드 페니와 임재준이 한 팀이다?
아니야, 그림이 전혀 맞지 않아.
서로 죽일 듯이 상대를 향해 폭격을 가해도 시원치 않은데 서로 손을 잡았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때,
띠링.
비서의 핸드폰으로 사진 한 장이 전송되었다.
엇!
“의장님. 이거.”
비서가 핸드폰 사진을 라이레놀에게 보여주었다.
“어라? 건물에 사람이 무더기로 들어가네.”
“임재준 팀원들입니다. 하나같이 월가에서 유명한 뱅커들이고요.”
“이게 지금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거라고?”
“네, 잠복하면서 보낸 사진입니다.”
지금 저 건물 안에 임재준과 팀원 그리고 블러드 페니가 있다.
“그렇다면 블러드 페니와 임재준은 분명히 연관이 있는 거네.”
“그렇게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시위, 임재준이 뒤에서 조종한다는 건데.
왜?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리고 이거.”
비서가 내민 신문 조각이 다시 탁자에 올려졌다.
“서형길을 보자마자 알아차렸습니다. 동양인이 선거운동을 주도하기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게 뭐?”
“지금 이 단체는 버닝소셜입니다.”
“버닝소셜? 거긴 민주당 버니 핸더슨의 지지단체…….”
이거 봐라.
임재준이 뒤에서 정치공작을 하고 있었단 말이잖아.
지금 버니 핸더슨의 인기가 조작되었다, 이건데.
“프랭코, 어떻게 생각해?”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 버니 핸더슨이 임재준과 손을 잡았든가, 아니면.”
“아니면?”
“버니 핸더슨의 인기는 임재준이 만들어 낸 겁니다.”
“임재준과 버니 핸더슨이…….”
손을 잡았다면 도드프랭크법 때문일 텐데.
굳이? 임재준이 소송으로 법안 정지시키고 금융소비자보호부 연준 산하로 만들어 무용지물로 만들고.
이렇게 다 만들어 놓고 버니 핸더슨의 손을 또 빌린다?
그런 멍청이는 없지.
그렇다면 버니 핸더슨의 인기가 올라가면?
도드프랭크법에 신경을 쓰지 못할 거라 생각한 건가?
이게 말이 되네.
임재준 좀 무서운 구석이 있는데.
이 정도로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단 말야?
감히 정치인을? 그것도 민주당의 선두 주자인 버니 핸더슨을 가지고 놀아?
“그럼 아직도 서형길이 관여하고 있나?”
“그건 지금 조사해 봐야겠습니다. 이게 전부 오늘 알아낸 정보라서 시간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조사한다…….
“아니, 그쪽에 손 떼. 그냥 가만히 놔둬.”
“그냥 둬도 괜찮겠습니까?”
“응.”
그래, 괜히 우리가 들쑤셔서 민주당이 눈치라도 채면 우리만 손해지.
버니 핸더슨의 약점을 쥐고 있는 이상, 마지막 크로스 카운터는 내가 먹일 수도 있어.
근데 정말 궁금하네.
임재준, 블러드 페니랑 무얼 하려는 것일까?
블러드 페니를 한번 찾아가 볼까?
***
백악관.
대통령은 민주당 상원 의원들과 조촐한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공화당은 하원을 장악한 이후 사사건건 정부의 일에 간섭했는데, 그게 여간 심한 게 아니었다.
특히 하원 의장 폴 라이레놀은 지난번 시위 현장에서 대통령을 대차게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만찬이 끝나고 티타임이 돌아오자 대통령이 먼저 불편한 의제를 꺼냈다.
“도드프랭크법은 힘들 것 같은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흠, 흠.
모두 차마 입으로 꺼내지 못하고 속앓이를 하던 말을 대통령이 먼저 꺼내자 헛기침만 할 뿐 말을 보태기 싫은 내색을 하였다.
대통령이 답답한 듯 채근했다.
“말해 보세요. 뭐가 잘못됐는지 알아야 이번 버피세를 통과시킬 것 아닙니까? 얼마 전에 있었던 부채 한도 상향에서 아주 힘겨웠습니다.”
흥.
상원 의원 한 명이 기분이 썩 나쁘다는 듯 콧바람을 뿜었다.
“미국이 디폴트가 되면 어떠한 일이 벌어지는지 뻔히 알면서도 부채 상환 상향에 반대했던 자들입니다.”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있기 전 8월에 미국의 부채가 상환되지 못할 위기에 처했었다.
자칫 경제 대국 미국이 디폴트를 선언하는 어이없는 일이 발생할뻔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었을까?
이유는 간단한데 미국은 부채 상환 한도도 법으로 정해져 있다.
정말 별걸 다 법으로 정하는 나라다.
어쨌든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선 채권을 발행해서 빚을 갚으면 되는데, 이게 법으로 정해져서 더는 채권을 발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해결도 간단했다.
법으로 정한 부채 상환 한도를 올리는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하면 될 일이었다.
근데 이걸 공화당 하원 의원들이 부채 상환 한도를 못 올리겠다고 발목을 잡았다.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안에 미국 디폴트를 발표한다면 이거야말로 역사에 길이 남을 흑역사를 만드는 일.
그러니 공화당이 원하는 무언가를 주어야 할 상황이었다.
와, 여기도 한국만큼 만만찮은 정치인들이다.
어쨌든 공화당이 원하는 걸 주고 만기일에 겨우 부채 상환 한도를 통과시키며 일단락되었다.
근데 재준이 이 좋은 기회를 왜 흘려보냈을까?
공화당과 짜고 도드프랭크법을 아예 묵살시킬 수도 있고 아예 월가 특별 감세 법안을 얻을 수도 있는데.
미국 디폴트? 이제부터 시작이다.
앞으로 2년 후에 또 똑같은 위기가 찾아온다.
이 당시 미국 부채는 5초마다 10만 달러씩 증가했다.
2022년엔 3초마다 10만 달러씩 증가했다.
앞으로 기회는 많으니까.
“자, 자. 현안에 집중합시다.”
흠, 흠.
현안이라고 해 봐야 시위대가 원하는 것 중 들어줄 게 하나밖에 없다. 바로 버피세.
이건 어떻게 해서든 통과를 시켜야 하는데.
“솔직히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투자 자본에 세금을 올린다면 누가 투자를 하겠습니까? 실패할 확률이 높은 곳에 투자하는 사람한테 이로 인해 이득을 좀 많이 얻었다고 세금을 때린다면 누가 투자를 하겠습니까? 이러면 공화당뿐만 아니라 기업들의 대규모 공격을 당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100만 달러 소득을 번 이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면 되는 겁니까?”
후.
“그건 더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개인사업자 때문입니다. 그들은 사업자지만 개인 소득에 합당합니다. 그리고 현 개인사업자 세금은 35%입니다. 법인사업자 세금은 22%고요. 그런데 개인 소득이란 이유로 35%에서 세금을 더 올리면 누가 개인사업을 하겠습니까. 개인사업은 대부분 벤처 사업가들입니다. 미국의 도전 정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후.
대통령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 이래도 저래도 걸림돌이 있다.
도대체 세금 좀 올리기가 이렇게 힘든 건가?
부자 증세인 버피세는 꼭 필요했다.
미국의 부채는 걷잡을 수 없이 늘어만 갔다.
이게 다 2008년 금융위기에 공적자금을 투입한 결과였다.
8,000억 달러를 때려 박았으니 미국이라도 흔들릴 수밖에.
그나마 투마로우가 CDS를 막아줬으니 망정이지 진짜 디폴트를 선언할 수도 있었다.
이런 부채를 해결할 방법은 세금을 더 많이 걷는 것밖에 없는데 더는 세금이 나올 구멍이 없었다.
부가가치세를 도입하면 좋으련만 이미 이건 국민을 죽이고 정부에게 좋은 제도라고 결론이 나서 얘기만 꺼내도 공화당뿐만 아니라 민주당 내에서도 절반은 들고일어날 것이다.
아마 선진국이란 명패를 달고 있는 나라 중에 부가가치세가 없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할 것이다.
제일 세수입이 좋은 휘발류나 담배는 각 주에서 알아서 관리하니 참견할 수 없는 일이고.
그렇다고 소득세를 올리면 진짜 돌 맞아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절대 만만하지 않은 것들 중에서 그나마 만만한 게 부자 증세였다.
마침 월가에서 가장 돈이 많은 버피가 주장했고 몇몇 부자들도 동참하고 있었다.
그뿐인가.
지금 전 국민이 응원을 보내고 있는 월가 시위대가 매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부르짖는 게 부자 증세, 버피세다.
어쩌면 기회인데.
난관이 이리 많아서야.
모두 침울하게 인상을 찡그리고 있을 때,
“되는 방향으로 생각을 합시다. 왜 다들 안 된다고 하는 겁니까?”
버니 핸더슨이었다.
“투자 위험이 있으면 투자 성공 시에만 세금을 걷으면 되고, 개인사업자는 따로 관리하면 됩니다. 올리려고 맘만 먹으면 왜 못하겠습니까? 공화당이 그렇게 두렵습니까?”
“공화당이 두려운 게 아니라 공화당이 장악한 하원이 문제인 겁니다.”
“기껏해야 2년 임기인 하원. 이번 선거에서 다 뒤집어 버리면 되는 거 아닙니까?”
“방법이 없으니까 문제 아닙니까?”
“있습니다. 방법.”
네?
모두 버니 핸더슨을 바라보았다.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전국으로 번질 조짐이 보입니다. 해외도 준비 중입니다. 전 세계가 월가에 집중하고 있고요.”
“그런데요?”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에 저희 민주당이 전격 참여하는 겁니다. 그들과 같이 행진하고 그들과 같이 빵과 우유를 먹으며 그들과 같이 공원에서 텐트를 치고 노숙을 하는 겁니다. 이게 전 세계 언론에 대서특필이 안 되겠습니까? 이게 미국 국민을 움직이지 않겠습니까?”
우리더러 노숙자가 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