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7화 돈이 많으면 무조건 나쁜 놈인가(5)
뉴욕 재준의 빌딩 앞.
두리번두리번.
좌우를 확인하고 아무도 없다고 확신한 재준은 후다닥 빌딩으로 몸을 날렸다.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 겨우 일주일이 지났지만, 빵과 우유만 벌써 스물한 개 먹었다.
그러다 불현듯 자신의 빌딩이 월가의 어느 한적한 골목에 있다는 걸 떠올렸다.
재벌다운 요리를 먹고 말겠다.
뭐, 남아 있는 시위대를 생각하면 조금 미안하지만, 그들은 자신이 원해서 참석한 거고 재준은 스스로 원해서 시위대에 참석한 것도 아니니까.
으휴, 본 사람은 없겠지.
뭐 있어도 상관없고.
그냥 볼일이 있으려니 생각하겠지.
내가 이 빌딩 주인이라고 생각하겠어?
재준은 2층 아지트 위스키 바의 문을 열었다.
자꾸 아지트, 아지트 하니까 바 이름이 없는 줄 아는데 이 바의 이름이 agit이다.
삐걱.
문이 열리자 누가 들어오는지도 확인하지 않고 미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아직 영업 전입니다. 두 시간 후에 오세요.”
“미키, 나야.”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고개를 든 미키는 들어온 사람을 보고 두 동공이 확장되었다.
눈앞에 동전 모양의 페인팅을 하고 피 묻은 돈을 입에 문.
블러드 페니?
어떻게 여길?
뭐 얻어먹을 거 없나 들어온 모양인데.
여긴 네가 들어올 만한 곳이 아니야.
순간 바 아래로 내려간 손이 샷건을 집어 들었다.
“움직이지 마, 블러드 페니. 머리에 구멍 나기 전에 나가는 게 좋을 거야.”
“미키, 나라니까? 네 보스.”
철컥.
샷건의 앞 손잡이 포엔드를 전후로 잡아당겨 장전을 한 미키가 재준을 노려봤다.
보스?
“너는 시위대 보스지, 내 보스는 아니지. 난 시위대라면 치가 떨리는 사람이야. 나가, 나가라고.”
미키는 월가를 점령하겠다는 시위대가 웃겼다.
노력을 쥐뿔도 하지 않으면서 남 탓만 하는 노숙자들.
자신이 생각하는 진짜 월가의 뱅커는 재준이라 생각했다.
유쾌하고 주변인들을 배려하며 일에 파묻혀 사는 워커홀릭.
잠을 줄여가며 노력하고 또 쓸 때는 화끈한 인간. 임재준.
돈에 대한 집착이 좀 많이 강하지만, 뭐 어떤가.
그게 진정한 월가의 뱅커지.
그런데 저놈은 월가에서 노숙을 하며 뉴욕을 지저분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먹여 살려주는 투마로우를 향해 거침없이 삿대질을 했다.
용서란 단어가 아까운 놈.
“이 빌어먹을 무정부주의자야. 당장 나가지 않으면 머리에 바람구멍을 내주겠어.”
저벅, 저벅.
미키가 총구를 정확히 재준을 향하며 다가왔다.
“미키, 나 임…….”
펑.
굉장한 굉음과 함께 재준의 말문이 막혔다.
저놈이 진짜로 쏘네.
“첫발은 공포탄이야. 두 번째는 공포탄이 아니란 걸 알 거야.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기어들어 오는 거야? 당장 나가.”
어, 어.
“알았어. 나가, 나간다고.”
이런 제길 무슨 말을 못 하겠네.
자신의 일에 충실한 건 좋지만 그래도 사람은 알아봐야지.
이거 분장이 지워지지도 않고.
뒷걸음질로 물러가던 재준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데,
“도련님.”
마침 서형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항상 재준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서형길이 재준이 빌딩으로 사라지자 자신도 재빨리 움직인 것이다.
뭔가 또 다급한 일이 발생한 게 분명해.
그리고 조심스럽게 계단을 올라오는데 불현듯 굉음? 총소리 비슷한 게 들렸다.
득달같이 들어와 보니.
뭐야? 이 상황은.
“미키, 아유 크레이지?”
블러드 페니 뒤에 뛰어 들어온 사람은?
저, 저 사람.
“서형길? 여긴 왜 들어 온 거야?”
“죽이려면 나 먼저 죽여.”
서형길이 재준 앞으로 나서며 미키의 총구를 막아섰다.
뭐지, 이 희생정신은?
“아는 사람이야?”
“디스 이분 유어 보스, 투마로우 오너. 아유 크레이지?”
“리얼리?”
와, 말이 통하네.
재준은 서형길을 보고 입을 턱 벌렸다.
영어는 늘지 않은 것 같은데 의사소통은 잘 되었다.
미키는 재준을 보고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란 표정으로 쳐다봤다.
재준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거봐, 내가 말했잖아. 나라고. 나.”
“아니, 나라고만 하면 어떡해요. 빨리 이름을 말해야죠.”
“말하려는데 네가 막 쐈잖아.”
아, 쏘리.
근데 그 페이스는 뭐예요?
“보스, 그럼……. 블러드 페니가 보스예요?”
쩝.
“그렇게 됐어. 뭐,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거지. 그놈의 메가폰이 문제라니까.”
“대박,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지금 투마로우를 몰아내자는 시위대를 직접 이끌고 있다니. 이게 무슨, 아니, 뭐 특별한 계획이라도 있는 겁니까?”
“계획이 있으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아니지, 계획은 있었는데 다 틀어져 버린 거지.”
보스도 계획이 틀어질 때가 있구나.
“일단 앉으세요.”
“어, 그리고 먹을 거. 요리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좀 줘.”
“아, 네. 잠시만요.”
미키가 주방으로 들어가고 서형길이 재준 앞에 앉았다.
“도련님. 이제 어쩌실 겁니까? 아까 보니까 대통령한테 막 대하는 것 같던데.”
“별 시답지 않은 얘기를 하길래. 나도 모르게 말이 나왔어요. 지금쯤 열불이 나서 나 죽이라고 할지도 몰라요.”
“헉! 블랙워터에게 전하겠습니다. 특급으로 관리하라고.”
재준은 서형길을 쳐다보았다.
“그게 영어로 돼요?”
“그럼요. 아까 미키랑도 대화하는 거 보셨죠. 이미 저도 상당한 영어 실력을 갖췄습니다.”
“아, 네. 네.”
서형길은 믿지 못하겠다는 재준을 보고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헤이, 미야. 아우어 보스 이즈 매우 덴저로우스. 스페셜 시크릿 가드, 베리 스페셜 시크릿 가드.”
-OK.
툭.
“보셨죠.”
“아, 네. 네.”
말하는 사람보다 알아듣는 인간이 더 신기하네.
“블랙워터도 블랙워터지만 천 실장도 도련님 주위에 있습니다.”
역시 선수는 다르네.
전혀 눈치를 못 챘는데.
“보스, 여기.”
미키가 몇 가지 요리를 해서 가져왔다.
땡스.
재준은 요리를 먹으며 미키에게 엄지 척을 했다.
“역시 사람은 사람이 한 요리를 먹어야 해. 그동안 기계가 한 요리만 먹었더니, 어휴, 미치는 줄 알았네.”
“기계가 한 요리요?”
“공장에서 나온 빵.”
아하.
“참. 미키. 지금 윌켄에게 전화 좀 넣어줘. 당장 이리로 다 모이라고.”
“네.”
그렇게 팀원이 오기까지 재준은 인간이 한 요리를 맛있게 먹었다.
***
“정말이네. 블러드 페니가 진짜 보스였어.”
“내가 말했잖아. 아주 익숙하다고.”
페렐라는 강호석의 말을 당연히 믿고 있었지만, 사람이란 증거가 코앞에 있기 전까지는 일말의 의심을 품게 마련이다.
그래서 TV에서 시위대를 지휘하는 보스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보스, 시위대는 왜 들어가신 거예요? 정말 버피세를 공론화시키려고 들어가신 거예요?”
공론화?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됐어.”
“그럼 원래 의도는 뭔데요?”
“그야 당연히 잠깐 구경만 하고 투마로우로 가는 거였지. 일이 꼬여서 누가 나에게 메가폰을 주는 바람에.”
메가폰이란 말에 강호석은 격하게 긍정했다.
이런, 이런.
어떤 놈인지 제대로 엮었네.
“또 옛날 버릇이 나왔네. 나왔어.”
“거, 그게 이제 잊었다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강호석을 보며 지긋이 미소를 짓는 재준.
큭큭큭.
워서스틴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입술을 깨물어 막았다.
항상 이런 식이지.
“큭큭, 앞으로 어쩔 계획이에요?”
“글쎄. 뭐, 절반은 진행해 놨으니까 본격적으로 움직여야 하는데……. 제일 먼저 할 일은 금강산도 식후경이지. 윌켄.”
“네.”
“투마로우 이름으로 시위대에 삼시 세끼 음식을 제공해 줘요.”
“네?”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짓이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보스 빼고는 전부 우릴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 난 시위대인데요? 거기다 한 사람에 10달러만 잡아도 만 명이면 10만 달러예요. 세끼면 30만 달러고.”
“30만 달러.”
하루에 한화로 3억 날리는 거네.
뭐 이 정도 가지고.
근데 앞으로 70일을 시위하면 2,100만 달러.
괜찮아. 괜찮아. 다 받아낼 거니까.
누가 낼지는 이미 정해진 거고.
“충분히 투자할 만하니까. 근데 만 명분을 제공하는 식당이 있을까?”
“네, 공장 열 개만 섭외하면 되긴 합니다. 크게 어려운 건 없어요.”
“그럼 됐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윌켄이 통화를 시작했다.
10분 안에 끝나겠네.
재준은 펠그리니를 쳐다봤다.
“펠그리니, NDF 거래할 건데 어느 나라가 좋은지 환율 예측 좀 해줘.”
“NDF요?”
“우리가 어디다 돈을 쓰나 다들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데 해외에서 거래를 해야 하잖아.”
“그렇다면…….”
이야, 머리 굴러가는 소리가 벌써 들린다.
“그리고 블록, 우리 거래 내역을 증권사에 흘려.”
“그렇게 되면 우리를 따라 월가가 움직일 텐데요.”
“응, 그걸 노리려고.”
월가의 돈이 전부 빠져나가 봐야 정신을 차리지.
재준은 투마로우가 어떻게 돈을 버는지 언론에 노출시키려 한다.
모든 금융규제는 투자은행에는 전혀 쓸모없는 행위란 걸 보여주려고.
NDF(Non-Deliverable Forward)는 역외선물환이라고 부른다.
달러가 자국 통화로 쓰이지 않는 나라에서 달러로 선물을 거래하는 파생 상품.
단, 차익만 주고받는다.
한국에서 원화로 달러를 거래하는 것이다.
태국이면 바트로, 필리핀이면 페소로.
이렇게 얘기하면 뭐라는 건지 모르니,
아주 간단히 이야기하면,
환율이 1달러에 1,000원일 때 A가 B에게 만 달러를 사기로 NDF 계약을 체결했다.
물론 선물환이니까 지불은 3개월 후.
자, 3개월이 지났다.
환율이 1달러당 1,100원이 되었다.
그럼, A가 차익 100원에 해당하는 돈을 달러로 바꿔서 B에게 지불하면 된다.
아니면 1달러당 900원이면 A가 B에게 100에 해당하는 돈을 달러를 받으면 된다.
차익 외에 만 달러를 시장에서 사든 말든 아무 상관도 없다.
오직 차익 거래만 하는 것이 NDF다.
아니 이딴 걸 왜 하는 거야?
달러를 사고 싶으면 그냥 사면 되지.
하지만 상품이 나오는 이유는 다 있게 마련이다.
NDF는 원래 무역에서 자금을 결제할 때 사용되었다.
한국에서 물건을 사고 달러를 결제하면 물건이 배에 실려 태평양을 건너 장장 2개월에 걸쳐 미국에 도착한다.
그럼 돈이 2개월간 묶이게 된다.
이 얼마나 억울해.
쓰지도 못하는 돈이 바다에 묶여 있는 꼴인데.
그래서 2개월을 푼돈이나 벌어보려고 NDF 계약을 한다.
원래는 이런 푼돈을 벌려는 순수한 목적이었는데 역시 우리의 투자은행은 이걸 투기로 만들었다.
무역이고 나발이고 다 필요 없고 현지 통화로 증권사들과 계약을 해서 차익을 가지고 돈을 벌었다.
또 의문이 들지.
굳이 이딴 걸 해야 하나?
NDF가 아주 중요한 이유는 또 하나 있다.
거래 통화는 국제화되지 않은 통화이기 때문에 금융규제에서 제외되어 있다.
그리고 아예 산정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각국의 중앙은행은 NDF로 인한 환율 급등락을 막을 도리가 없다.
“그럼 우리는 펠그리니의 예측을 통해 각 나라로 날아가 거래를 하는 겁니까?”
“그렇지. 이제 손발이 착착 맞네.”
이때,
띠리리링.
재준의 핸드폰 벨이 울렸다.
“천 실장님, 누가 도발이라도 했습니까?”
-도발은 아닌데 도촬을 하고 있습니다.
도촬? 어떤 변태야?
“누군지 아시겠어요?”
-알아볼까요?
헉! 이 사람 또 누구 하나 작살 내려고.
“아니요. 그냥 두세요. 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면 상관없어요.”
-네, 알겠습니다.
나를 스토킹하다니.
누구지 뻔하긴 해.
가만, 그럼. 내 정체를 알게 된다면?
이건 재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