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돈이 많으면 무조건 나쁜 놈인가(4)
둘 중 하나와 손을 잡긴 해야 하는데.
“자, 현 정국은 이렇게 정리가 되나요? 민주당은 중산층을 대변하고 공화당은 기업을 대변한다. 맞아요?”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음. 우린 당신들이 대변하는 사람이 아니란 거죠. 중산층도 아니고 기업을 운영하지도 않아요. 한심하죠. 내가 봐도 참 한심한 인생입니다.”
말이 입에 착착 감기는데.
“당신들이 중산층도 못 되는 우리를 대변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정치 후원금도 못 내고 만약 우리를 대변한다면 24시간 365일 동안 당신들을 붙잡고 징징거릴 겁니다. 하찮은 내 얘기 좀 들어달라고.”
흠, 흠.
“귀찮죠? 정말 중요한 일들이 엄청 많은데 우리 같은 나부랭이들에게 시간을 할애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잖아요. 그저 정치적으로 이용만 하려는 걸 텐데.”
우우우우우.
재준의 말이 시위대를 흥분시켰다.
핸더슨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불만이 있다는 거. 하지만 불만을 해소하려고 저희가 있는 겁니다. 한 번에 다는 아니지만, 차근차근 이야기하다 보면…….”
이때,
끼이이익.
검은 리무진 몇 대가 도착했다.
모두의 시선이 리무진에 멈췄다.
벌컥.
경호원들이 멈춰 선 리무진 주위를 둘러쌌고, 차 문이 열리며 익숙한 발이 땅에 내딛어졌다.
대통령이 왔다.
이 사태를 책임질 진짜 주인공이 등장했다.
이로써 현 정국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다 모였다.
대통령이 다가오자 폴 라이레놀과 버니 핸더슨이 가볍게 목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이 상황에서 악수라도 했다가는 시위대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까.
재준이 앞으로 나섰다.
“대통령님?”
“수고들이 많습니다.”
한차례 인사들을 나누고,
“여기는 어쩐 일로 오셨어요?”
“저희 정부도 시위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열려고 했지만 직접 찾아오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원래 역사에서는 대통령이 시위를 지지하는 기자회견을 했는데, 기자회견은 하지 않고 직접 찾아왔다?
아니면 내가 모르는 역사가 또 있나?
암튼 대통령은 이 시위를 지지했다.
난 대통령을 지지하지 않지만.
수십 대의 카메라가 대통령과 재준을 찍어댔다.
“굳이 대통령님이 저희를 지지하지 않아도 되는데요.”
일단, 정치와 선을 긋는다.
흠, 흠.
대통령이 재준의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한 발 걸치기 시작했다.
“시위 과정에서 자잘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저희가 나서서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요.”
뭐요?
“불미스러운 일이 뭡니까?”
감히 라이레놀이 재준과 대통령 대화에 끼어들었다.
민주당이야 대통령이 대변하지만, 공화당은 이 대화에서 들러리 병풍으로 있지는 않겠다는 의지.
“물었으니 대답은 해드리죠. 도로 점거, 건물 외관 손상, 경찰과 사소한 말다툼, 자해, 뭐, 그 정도인데요.”
공화당 폴 라이레놀이 과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불미스러운 일이……. 저희 공화당이 진짜 참으려고 그랬는데. 시위대가 뻔뻔하기가 그지없습니다. 시위대 문제야 저희도 인지하고 있으니까. 시위 마친 후에 확실히 문제 삼을 겁니다. 그 전에 문제의 핵심을 바로 짚고 넘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야, 라이레놀.
끼어들면 안 돼.
멀찍이 떨어져 있어.
내 마음의 소리가 들리지 않니?
재준이 나서기 전 대통령이 나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핵심이라뇨.”
“솔직히 월가가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문제 아닙니까? 일은 정부가 다 저질러 놓고 모르쇠로 일관하다가, 시위가 벌어지니 지지한다고요? 뭔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정말 시위를 지지하는 거 맞습니까? 지지하기 위해 시위를 벌인 거 아닙니까? 제가 알기론, 시위대 롤 모델이 ‘아랍의 봄’이라 들었습니다. 몇 해 전 911 테러의 아픔이 채 가시지도 않았는데 무슬림을 본받다니, 정말. 참, 대통령님, 무슬림이시죠. 이 시위 정부가 조장한 거 아닙니까?”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평소에 침착한 대통령이 노기를 부렸다.
아랍의 봄은 2010년에 시작된 아랍권의 빈부격차에 대한 시위다.
당시 결과만 보면 아랍권의 대부분의 국가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추출되고 민주화가 달성되었다.
나중엔 선거를 통해 근본주의자들이 당선되고 다시 인권탄압이 발생했지만.
역시 정치는 변하지 않아.
아니, 인간이 변하지 않는 건가.
암튼, 지금 공화당 라이레놀이 대통령을 몰아세웠다.
와! 이건 병풍이 아니라 대감 자리를 차지했네.
정부를 시위의 주범으로 몰다니.
근데 왜 이런 무리수를 두는 걸까.
아! 카메라. 바로 생중계.
정식 언론에 이런 음모론을 드러낸다면 그냥 웃고 넘어갈 해프닝에 불과하다.
활자가 가지는 태생적 장점이자 단점.
읽으면서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
하지만 이런 생생한 생중계에서는 사람들은 놀라기부터 한다.
이제 내일부터 대통령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것이고 이것저것 다 파헤쳐질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길 왜 여기서 꺼내는 거야?
이야기가 옆으로 새려 하잖아.
재준이 라이레놀에게 손을 들어 제지했다.
“저희 시위에 관계된 이야기만 하시죠.”
흥.
라이레놀이 고개를 돌리자 대통령이 재준에게 물었다.
“시위대가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니, 이걸 왜 나한테 묻는 거야?
재준은 뒤에 있는 시위대를 돌아보았다.
모두 주먹을 불끈 쥐고 재준을 응원했다.
블러드 페니, 얘기해요. 우리가 원하는걸.
페니, 뒤에 우리가 있어요.
시위대가 재준을 응원해 줬지만,
하나도 든든하지 않아 이 사람들아.
내가 왜 시위대를 대표해야 하냐고.
근데 이 사람이 더 꼴 보기 싫어.
“지금 다시 말하는 건 입만 아프고. 이미 12개의 요구 사항을 발표했으니 신문을 보면 되잖아요.”
“신문이요?”
“네. 신문. 여러 번 났을 텐데요.”
대통령 비서실장이 다가와 무언가 속삭였다.
“아, 그렇다는군요. 요구 사항을 최대한 담아 행정명령으로 만들고 있는 중입니다.”
이런 멍충이.
“행정명령이요? 이제 임기 1년 남으셨는데요?”
행정명령은 대통령이 바뀌면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행정명령이라는 말에 라이레놀이 또 나섰다.
“이미 하원에서 법안을 발의하기 위해 준비 중입니다. 행정명령이라니 이렇게 무능한 티를 내도 되는 겁니까?”
어허, 이 사람은 말끝마다 싸우려고 하네.
“서로 감정적으로 몰아가지 마시죠.”
“법안은 공화당이 할 겁니다. 정부는 나서지 마세요.”
대통령은 피식 웃었다.
“그럼, 공화당이 만드세요. 저희는 검수하도록 하죠. 시위대가 내놓은 요구 사항을 담았다니 나쁜 의도야 있을 수 없겠지요.”
“나쁜 의도가 정확히 뭡니까? 말에 가시가 있습니다.”
“없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너무 정부와 척을 지려 하지 맙시다. 능력 있으신 분들이 더 값진 일에 능력 발휘들 하셔야죠?”
푸훗.
재준이 입을 틀어막고 웃자 모두 시선이 쏠렸다.
왜 웃지? 아니, 비웃은 거 같은데.
지금까지 나서지 않던 버니 핸더슨이 재준에게 의아한 듯 물었다.
“왜 웃는 겁니까?”
“그렇잖아요. 법을 만든다는 게. 어떻게 만들어요? 그냥, 잘? 그것도 대통령씩이나 되는 사람과 하원 의장씩이나 되는 사람이 내 앞에서, 아니 시위대 앞에서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요? 법을 만든다…….”
재준이 시위대를 향해 돌아서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큰소리로 외쳤다.
“헤이, 브로. 정치인들이 우리를 위해 법을 만든다는데!”
하하하하하하하하.
일순 시위대가 배를 잡고 웃었다.
재준이 돌아서며 정치인들을 보며 썩은 미소를 지었다.
“이 앞에서 법을 들먹이기에 우리가 너무 어른이지 않나? 그런 소린 이제 갓 학교에 발을 들인 아이에게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뭐라고요?
촤라라라라라라라.
카메라 돌아가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낯빛이 어둡게 변한 대통령을 앞에 두고 재준의 말이 시작되었다.
“2008년 금융위기가 있었어요. 도드프랭크법을 만든다고 설치시더니 지금 4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입법이 안 되고 있네요. 내 생각에는요, 그 법 아마 시장이 호황기일 때 나올 겁니다. 그럼, 시대에 안 맞겠죠? 그때 가서 도드프랭크법으로 발목이 묶인 월가를 위해 또 다른 법을 만드시겠죠. 기업들에게 욕을 바가지로 먹으면서. 뭐 그 법도 호시절 다 지난 다음에 나오겠지만.”
대통령은 낯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
“법이라는 거 우리 같은 서민에게는 그닥 와 닿지 않아요.”
“법은 항상 거시적으로 봐야 합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르는 일에 대비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대비하세요. 우린 그동안 다 굶어 죽을 테니까. 혹시 하루 끼니를 걱정해 보신 적 있나요? 여기 있는 사람들이 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아침도 빵 하나에 우유 하나로 때우고 이러는데. 아침 메뉴는 뭐 드셨습니까? 뭐 일이 바빠서 안 먹은 건 아닐 테고.”
후.
대통령의 한숨에 재준이 말을 이었다.
“눈에 보이는 걸 해야죠.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 그걸 원하는 겁니다. 최소한 책임자 처벌은 있어야 하지 않나요?”
“월가의 책임자는 전부 회사에서 정리했습니다.”
“웃기는 소리 하고 있네요.”
“뭐라고요?”
“왜 월가만 책임을 집니까? 그 당시 월가는 벌어들인 돈에 대한 충분한 세금을 냈어요. 그 당시 엄청난 세금을 거두어들이지 않았나요? 그럼 그 세금으로 돈 잔치를 벌인 정치인들은 아무런 고통 분담 없이 돈만 꼬박꼬박 받아먹고 나 몰라라 하겠단 말입니까? 정말 보너스 잔치는 월가만 했냐고요? 우리가 분노하는 건 바로 그겁니다. 월가를 앞세워 놓고 자신들은 다 숨어 버린 거.”
“…….”
“그리고 월가를 살리겠다고 8,000억 달러가 공적자금으로 쓰였어요. 그런데 왜 그 세금을 낸 국민한테는 1센트도 안 나오는 거죠? 우리한텐 왜 공적자금을 사용하면 안 되는 건가요?”
“그때는 월가가 더 급해서.”
“아니겠죠. 우리는 그 1%가 아니었던 거죠. 우린 월가 뱅커도 아니고 기업인도 아닌 거죠. 우린 무시해도 되는 존재였을 뿐입니다.”
맞다.
우린 99%일 뿐이었다.
우우우우우우.
재준의 말에 시위대가 들끓었다.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그 1%에는 여기 정치인도 포함된다는 거 모르나요? ‘타도 월가’를 내세워서 대통령이 됐으면 가시적인 뭔가를 보여야지. 말로만 법이네, 명령이네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잖아요. 안 그래요? 당신들도 똑같아요.”
재준이 라이레놀과 헨더슨에게 매서운 시선을 돌렸다.
대통령은 할 말이 없었다.
비서가 다가와 속삭였다.
“더는 정치적 부담이 됩니다. 지금 카메라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음.
“한마디만 하죠. 지켜봐 주세요. 제가 바꾸겠습니다.”
“그러세요. 그러라고 우리가 지금 개고생하고 있는 건데.”
재준은 어깨를 으쓱하며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대통령이 가자 라이레놀과 핸더슨이 재준과 대치했다.
핸더슨이 피식 웃었다.
“대단합니다. 대통령 앞에서 막말을 하다니.”
풋.
“이걸 막말로 들었다면 버니 당신도 생각을 바꿔야 할 겁니다. 지금 끌고 있는 인기. 그거 순식간에 사라지거든요. 뭐, 정치를 오래 했으면 알 텐데요.”
“압니다. 무슨 말인지.”
“그리고 잘하세요. 또 하나.”
재준이 핸더슨에게 다가가 라이레놀이 듣지 못하게 속삭였다.
“내가 버닝소셜과도 관계가 있는데.”
뭐요?
핸더슨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나중에 다시 이야기합시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핸더슨도 뒤돌아 떠났다.
라이레놀이 마지막까지 재준을 노려보고는 차에 올랐다.
탁!
차 문이 닫히자 라이레놀이 비서에게 말했다.
“저 사람 누군지 알아봐. 말투가 꽤 익숙해.”
어디서 들었더라.
저 말투, 저 행동들.
“네, 알겠습니다.”
라이레놀의 차가 출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