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5화 돈이 많으면 무조건 나쁜 놈인가(3)
이야기를 듣고 있던 블록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거 공금횡령 아닙니까?”
“그건 아니야.”
페렐라가 블록에게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보스가 회삿돈으로 자신의 재산을 늘리지는 않거든. 또 다른 CEO에 비해 활동비가 과한 측면이 있지만 전부 회사를 위해 쓰고 있잖아. 회계 처리도 깔끔하고.”
“횡령은 아니라고 치고 그럼 버피세는 왜 선동하는 걸까요?”
후.
강호석이 심호흡을 한 후 피식 웃었다.
“선동이 아닐 수도 있어.”
강호석의 대답에 블록이 의아해했다.
선동이 아니라고?
저렇게 버젓이 모두가 듣는 앞에서 떠들었는데?
“버피세를 공론화시켰잖아. 찬성과 반대가 나올 거고. 근데 잘 생각해 봐. 버피세라는 게 정확히 부자 증세를 말하는 건 아니야. 자본 투자로 이득을 얻는 사람과 근로로 돈을 버는 사람과의 차이를 말하는 거지.”
“자본과 노동의 문제지요.”
펠그리니가 나섰다.
“결국은 탄력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투자의 위험성이란 소리죠. 투자는 돈을 잃을 확률이 높은 반면 노동은 상대적으로 낮아요. 투자는 세율이 낮고 노동은 세율이 높죠. 하지만 버피세가 실행되면 투자는 줄어들고 고용도 줄어듭니다.”
“이걸 공론화시켜서 다들 알게 하자? 이걸 보스가 노린 거라고요?”
의심쟁이 퀴니코가 펠그리니의 말에 토를 달았다.
“근데 굳이 이런 방법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저 위험한 시위대를 이끌면서?”
후후.
워서스틴이 웃으며 퀴니코를 바라봤다.
“저 방법이 제일 낫지 않아? 국민이 볼 때, 보스 혼자 방송에 나가 떠든다면 부자 한 명이 자기변명이나 지껄이는 거로 생각하겠지만 시위대에서 거론하면 모두가 긍정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잖아.”
저게 나은 방법이라고?
“훨씬 나은 방법이긴 한데요. 그래도 저건 너무 위험하잖아요. 저건 시위대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자살하는 것과 같아요. 시위대에 발각되는 날에는 한 대씩만 맞아도 골로 가요. 그리고 지난번 중국 애들도 있잖아요. 그놈들이 당장 달려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칼침 놓고 갈 수도 있고. 이건 죽고 사는 문젤 수도 있어요. 왜 다 잃어도 상관없는 사람처럼 매번 이래요? 대체 왜? 이런 보스 때문에 내가 제명에 살겠냐고요. 왜 이렇게 사람을 괴롭혀요? 정말 보스는 제정신입니까?”
입에 모터를 달았는지 평소 퀴니코답지 않게 잔소리를 해댔다.
큭큭큭.
“아, 뭐, 보스, 제정신 아닌 거 다 잘 알잖아. 아니 근데 무슨, 랩 하는 줄 알았어. 뭔 말을 그렇게 빨리해? 암튼 좀 지켜봐. 보스잖아.”
“에휴, 보스. 난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얼떨결에 시위대에 휘말린 재준을 모두 고의성이 다분한 행동으로 오해했다.
***
주코티 공원.
재준은 아침에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루하루 늘어나는 텐트의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SNS를 통해 확산된 시위 소식에 미 전역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재준이 알기로는 본래 6,000명 정도였는데 지금 보니 만 명을 훌쩍 넘는 인원이었다.
이게 다 나 때문이지.
누군가 시위대를 이끌고 있으니 주저하던 사람들도 바리바리 짐을 싸 가지고 이곳으로 모인 거야.
왜 있잖아. 비빌 언덕이 생기면 없던 용기도 살아나는 거.
이거, 도망도 못 가고 꼼짝없이 감금당한 신세네.
물론 재준은 언제든 시위대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유유히 떠날 수 있었다.
아니면 밤에 몰래 빠져나갈 수도 있었고.
근데, 저놈의 마이클 모어의 카메라 중 한 대가 24시간 재준을 찍어대고 있었고 시위대에서 자원한 6명이 위원회를 구성해 시위대를 지휘하느라 재준과 붙어 다녔다.
그리고 열기가 점점 달아오르고 있어서 이대로 시위대에서 재준이 빠져버리면 자칫 폭력 시위로 변할 수 있었다.
여러 번 경험했듯이.
시위의 본질이 흐려지면 외부에서 시위와 상관없는 폭도들이 유입되면서 주변 상가를 약탈하고 방화를 일삼는다.
기회는 이때다 싶어 한 몫 챙기는 놈들 많아.
뭐, 폭도로 변하든 말든 내가 책임질 일은 아닌데.
혹시 나중에라도 내 존재가 밝혀지면 아주 곤란해.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이니까.
특히 저거, 저거, 저 카메라.
족쇄야. 족쇄.
하지만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닌데 오히려 잘 됐다.
버피세.
이걸 무마시키기 위해 시위 현장 분위기를 살피고, 돌아가 투마로우가 시위대를 지원해서 정부를 압박하고, 공화당과 민주당 싸움 붙이고, 결국 버피세를 의회에서 표류하게 만드는 게 원래 계획이었다.
이걸 왜 막냐고?
세금을 더 많이 내야 하잖아.
나 말고 할아버지.
미국도 그렇지만 한국이 버피세를 어쭙잖게 흉내 내서 고소득층에게 세금을 부과하려 시도하거든.
그냥 지나갈 수도 있지만 어렵게 공화당과 손을 잡았는데 일은 마저 끝내야 깔끔하지.
“저 여기. 아침.”
버피세를 어떻게 쓰레기통에 처박을까 고민을 하던 재준 앞에 불쑥 빵 하나와 우유 한 개가 들이밀어졌다.
재준은 아침이라는 이름을 붙인 음식을 내민 주인공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들었다.
슬라예보 지책.
저 아저씨 교수잖아.
결혼 안 했나?
아니, 그보다 대학에서 아이들 안 가르쳐요?
지책은 빵과 우유를 건네 후 재준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잘 잤어요?”
“저야 익숙하니까요.”
익숙하긴 뭐가 익숙해, 죽을 맛이구만.
그리고 왜 익숙하다고 한 거지?
꼭 노숙이 생활화된 사람 같잖아.
“방황하는 철학자라…….”
그거 아니라니까.
나 투마로우 오너야, 오너.
“페니, 하나 약속해 줄 수 있어요?”
페니는 재준의 애칭이다.
얼굴 분장을 동전 모양으로 해서 페니라 불렸다.
“뭔데요?”
“우리 이 시위. 이 시위가 끝나고 다시 생활로 돌아가면. 성공하든 실패하든. 수십 년 후 맥주나 홀짝이면서 ‘그때 나는 순수하고 아름다웠다’라고 말하지 않았으면 해요.”
후후.
“지책, 난 낭만적이지 않아요. 순수하지도 않고요. 물론 아름답지도 않죠. 난 지극히 속물입니다. ‘그때’라는 표현도 하고 싶지 않고요. 지금 하나라도 이루고 수십 년 후에 맥주나 홀짝일 거예요.”
“하하하. 역시 다르다니까. 그럼 됐습니다. 난 그거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철학자 아니랄까 봐 말도 더럽게 어렵게 하네.
앙.
재준이 빵을 한입 크게 베어 물고 우유를 들이켰다.
맛있는데.
오랜만에 먹으니까 맛있어.
근데 이걸로 하루를 버티라는 건 아니겠지?
설마.
설마는 무슨. 이런 시위를 후원하는 기업이 있을 턱이 없지.
이 정도 시위면 지금쯤 사방에서 후원이 들어와야 하는데 서민들 주머니 턴 쥐꼬리만 한 후원밖에 없었다.
내 기억으론 돈 많은 빌 머시기 인간이랑 마크 주커 머시기 인간이 강력하게 지지한 거로 아는데.
지지만 하고 돈 한 푼 안 보내네.
윌켄에게 전화해서 먹을 거 좀 후원하라고 해야겠어.
물론 투마로우 이름으로.
투마로우 이름이 거론되면 여기저기 말이 좀 나올 테지만.
뭐, 어때, 내 맘이지.
맘대로 생각하라지.
난 절대 빵이랑 우유로는 버티지 못해.
으라차차.
아침을 빵과 우유로 때운 시위대가 준비가 다 되었는지 의지를 다졌다.
자 오늘도 해 보자.
출발!
주코티 공원에서 출발한 시위대는 리버티 스트리트를 따라 행진했다.
주코티 공원에서 일직선으로 네 블록을 가면 월 스트리트가 나오고 오른쪽으로 꺾어 네 블록을 지나면 브로드 스트리트가 나온다.
이 거리는 대각선으로 이어져서 행진하고 나면 다시 주코티 공원이 나온다.
즉, 시위대는 삼각형 모양으로 월스트리트 전체를 4시간마다 한 번씩 뺑뺑 도는 것이다.
재준과 6인, 지책은 나란히 시위대를 이끌고 나갔고 마이클 모어는 이 모든 상황을 카메라에 담았다.
으이구 저놈의 카메라.
절반 정도 왔을까, 시책이 재준에게 물었다.
“페니, 시위대가 점점 불어나면 공화당이 당신을 가만 안 둘 텐데. 괜찮겠어요?”
공화당?
공화당은 저랑 친한데요.
하원 의장 폴 라이레놀과 작업도 같이했는데.
그리고 지금까지 재준이 사람들에게 말한 이야기를 잘 들어 보면 공화당보다는 정부를 까고 있었다.
“공화당보단 정부가 문제겠죠.”
“어째서 그렇지? 정부는 이번 시위를 지지할 텐데.”
“지지요? 순수한 건 내가 아니라 지책이네요. 우리가 지금 계속 말한 건 전부 정부가 의지를 가지고 노력해야 하는 거예요. 공화당은 반론만 제시하고 있고요. 하지만 정부는 그럴 의지가 별로 없어요.”
음.
지책은 재준의 말을 이해는 했다.
지금은 대통령은 민주당.
상원을 장악한 건 민주당, 하원을 장악한 건 공화당이었다.
국정을 운영할 때 필요한 사항들은 상원이 동의하고 대통령이 실행한다.
즉, 하원의 동의가 그렇게 필요하지 않았다.
하원의 동의가 필요할 때는 돈 문제, 세금이나 예산에서였다.
이러니 지금 시위는 월가에 대한 불만이었지만 정확하게는 현 정부에게 시민의 불만을 해소해 달라는 거였다.
하원의 동의가 필요 없는 것만 꼽아보면.
소매은행과 투자은행을 분리하라든가.
월가의 범죄자를 기소하라든가.
선거자금의 기부를 제한하라든가.
SEC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라든가 등등.
근데 정부가 시위대의 요구안을 들어주려면 자신들에게도 해가 되는 것이 많았다.
특히 선거자금 기부 제한은 특히 그렇다.
아무리 공화당이 기업을 대변하고 민주당이 중산층을 대변한다고 해도 세계 갑부의 절반은 민주당에 후원을 했다.
전에 말한 버피 해서웨이의 버피라든가 빌 머시기라든가 마크 주 머시기라든가.
암튼.
“정부는 그동안 기업으로부터 받아 처먹은 꿀값을 갚으려면 나를 잡아다 바쳐야 해요. 근데 지금까지 이게 답이 안 나왔을 거고요. 내가 공개적으로 정부를 강하게 밀어붙였으니, 내 털끝 하나라도 다치는 날엔 정부가 강하게 의심받을 테니까요. 그땐 시위도 폭력으로 변질될 우려도 있어요. 뉴욕에서 폭력 시위라니 말이 안 되죠. 아마 정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겁니다.”
“꿀값이요? 하긴, 어디든 로비는 있으니 일리 있는 말이군요.”
“할 수 있는 게, 또 무슨 법을 만든다고 하겠죠?”
“또 법이요?”
하하하하.
자조적인 웃음이 지책의 입에서 나왔다.
법. 그놈의 법.
이게 다 우리가 만든 업보겠지.
자책하기는…….
일이나 합시다.
재준은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버피세를 실행하라.
버피세를 실행하라.
부자 감세 폐지하라.
부자 감세 폐지하라.
월가 범죄자 기소하라.
월가 범죄자 기소하라.
금융감독기관 종사자 이전 직장 재취업 금지하라.
재취업 금지하라.
시위대가 월가를 한 바퀴 돌고 주코티 공원에 막 들어서려는데 공원 입구에 두 무리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재준이 가까이 가서 보니,
허거덕!
저 사람들이 여기가 어디라고 온 거야?
공화당 폴 라이레놀 하원 의장과 민주당 버니 핸더슨 상원 의원이 대치하고 있었다.
시위대는 수군대며 재준의 뒤에 정지하자마자 소리쳤다.
당장 꺼져라.
당신들이 올 곳이 아니야.
대통령을 불러.
이 사람들이.
모르고 소리치는 것이니 뭐라 그럴 수는 없지만, 너무 몰아붙이면 물어요.
어쨌든.
상황이 아주 아름답게 만들어졌다.
한 사람만 더 오면 딱인데.
나타날 리가 없지.
핸더슨이 먼저 재준에게 다가왔다.
“민주당은 시위대를 도울 것입니다.”
“필요 없습니다.”
어라? 그러면?
라이레놀이 번개같이 다가왔다.
“공화당과 얘기를 해 봅시다.”
“그쪽도 필요 없습니다.”
둘 다 싫다?
핸더슨이 무척 궁금하단 표정을 지었다.
“정치적으로 해결할 생각이 없습니까?”
“아니요. 국가에서 일어난 일을 정치 없이 어떻게 해결합니까?”
“그럼 둘 중 하나는 손을 잡아야 하는 게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