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돈이 많으면 무조건 나쁜 놈인가(2)
마이클 모어가 앞으로 나오더니 재준을 거칠게 포옹하였다.
“동지.”
허, 큰일이다.
“당신 같은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겁니다.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는 이 시기에 당신의 용기가 우리를 바꿀 겁니다.”
여기서 끝이면 좋으련만.
“맞습니다.”
와 와 와 와 와 와 와 와.
또 한 사람이 시위대를 뚫고 나오고 있었다.
미친! 슬라예보 지책이다.
동유럽 좌파 철학자 중 가장 가장 가장 훌륭한 인간이다.
이거 도대체 일이 어디까지 번지려고 이러나.
지책이 재준을 보고는 두 손을 맞잡고 거세게 흔들었다.
“진정 인민을 걱정하는 당신을 지지하오.”
인민이라니.
아, 지책 이 사람은 헤겔, 라깡, 마르크스가 주 전공이지.
이어 모어와 지책이 재준의 양쪽으로 오더니 양손을 붙잡고 하늘로 높이 쳐들었다.
월가를 점령하라.
여기서 끝나면 좋겠는데.
갑자기 방송 장비들이 줄지어 도착하더니 재준을 찍기 바빴다.
그뿐인가, 수백 대의 개인 카메라가 재준을 담았다.
내일 아침이면 신문에 도배되는 건 당연지사였다.
정말 큰일인데.
“한 말씀 하시죠. 아까 말하는 걸 보니 이미 많은 걸 연구하신 것 같던데.”
내가?
이러면 내 인생 나가린데.
그런데 입에서 나온 말은 생각과 달랐다.
“네, 그럼.”
나 이제 집에 다 갔다.
“여러분, 월가는 우리에게 무릎 꿇고 사죄를 해도 모자랄 판에 우리의 돈으로 잔치를 벌이고 있습니다. 월가는 당장 소매금융과 도매금융을 분리하고.”
이거 말하면 안 되는데.
“SEC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여 범법자를 색출하는 데 힘을 실어 줘야 합니다. 또한 로비스트의 영향력을 제한하는 법을 제정해야 하며.”
나도 모르겠다.
“저들이 말하는 기업 이익이 국민 이익이라는 기만에 단호히 맞서야 합니다. 거짓말을 그만하라.”
거짓말을 그만하라.
멀리서 지켜보던 서형길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어질어질한 머리를 감쌌다.
도련님 어떻게 수습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선관위는 모든 후보자에게 공정한 방송을 보장하고 일부 인사에게 편중되어 있는 선거자금을 규제하라.”
규제하라.
“학자금 대출로 쪼들리는 학생도 구제하라.”
구제하라.
막 던지는구나. 막 던져.
재준의 한마디 한마디에 모어와 지책은 고개를 끄덕였다.
특히 모어는 자신의 카메라맨에게 이 모든 것을 기록으로 보존할 것을 지시했다.
망했네.
나 이제 다큐멘터리 주인공 되네. 주인공 돼.
이때, 시위대에서 한 명이 소리를 질렀다.
“버피세는 어쩔 겁니까?”
“뭘 어째, 당장 실행해야지. 버피세를 실행하라.”
버피세를 실행하라.
아, 이건 진짜 아닌데.
버피세란 버피헤더웨이 수장 버피가 주장했다고 해서 ‘버피세’라 불리는 부자 증세이다.
어느 날 자신이 내는 세금은 15%인데 자신의 비서가 내는 세금은 25%라는 걸 알고는 정식으로 대통령에게 권고하면서 촉발되었다.
근데 또 이게 공화당의 반대로 버퍼링이 걸려 있었다.
공화당은 버피세가 투자를 촉진하지 않고 일자리 창출에도 부정적이라고 주장했다.
옳소.
난 부자인데 반대다.
근데 내가 지금 이러고 있다.
“버피세를 실행하라.”
버피세를 실행하라.
***
AAG 빌딩 65층.
재준의 팀원들은 모두 대형 TV 앞에 모여 앉아 월가에서 진행하는 시위대를 보고 있었다.
“사람들 많이 모였는데.”
“저만큼 월가를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지.”
“우린 아니잖아. 저들이 주장하는 거에 투마로우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은데.”
“그런 걸 속속들이 아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 대충 다 월가 놈들은 나쁜 놈이라고 낙인 찍는 거지. 거기에 이번 불커롤을 무력화시킨 게 투마로우라고 알고 있으니 더 죽일 놈 된 거지.”
“우리도 적극적으로 홍보를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우리는 해당 없다고.”
“보스 오면 한번 진지하게 말해 보자.”
“근데 보스는 어디 간 거야? 66층에 없던데.”
“그러게. 어 저 사람 뭐야?”
대화를 나누던 퀴니코와 블록은 TV를 가리켰다.
시위 상황이 갑자기 매우 급하게 돌아갔다.
처음에는 구심점 없이 어중이떠중이들이 행진만 했는데 어떤 동전으로 분장하고 입에 피 묻은 돈을 문 사람이 메가폰을 잡고 나오더니 시위대를 일사불란하게 통제하는 게 아닌가.
윌켄이 시위 장면을 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미국 역사에서 이런 경우는 매우 드문데.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아. 그리고 저 사람 아무리 봐도 타짠데. 안 그래, 박민수? 넌 한국인이라 시위에 대해서 우리보다는 잘 알잖아.”
박민수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난 중학교부터 미국으로 유학 온 케이스라 잘 몰라. 데모는 여기 강 이사님이 잘 알지. 어때요, 이사님.”
강호석은 TV를 뚫어지게 쳐다보느라 박민수의 말을 듣지 못했다.
“이사님?”
“…….”
이. 사. 님.
그제야 정신을 번뜩 차리고,
“응? 아, 데모? 뭐? 나한테 뭐?”
“아니요. 저기 가운데 메가폰 잡은 사람 시위 많이 해본 사람 같지 않냐고요.”
“그, 그러니까. 그게.”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한 강호석은 생각했다.
익숙하다.
메가폰을 잡은 저 손.
저 벌린 다리의 각도.
어디선가 보았던 아주 익숙한 자태.
그리고 번뜩 서형길의 통화가 귓가에 울렸다.
-강호석, 도련님이 텐트 하나 사 가지고 주코티 공원으로 오라는데.
설마,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지.
진짜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런 짓을 저지르는 게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라는 걸 알 텐데.
월가 사람이 월가를 타도하는 시위에 참가할 리가 없지.
아니, 근데 지금까지 멀쩡한 정신이었던 적은 있었나?
자기 국가에 소송을 거는 인간인데?
그건 그렇다 치고, 진짜 임 대표라면 저긴 왜 간 거야?
강호석이 박민수의 질문에 여전히 대답을 못 하자 윌켄이 나섰다.
“강호석,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 거야? 옛날 생각나서 그래? 너도 시위를 꽤 했나 봐.”
윌켄에게 고개를 돌리는 강호석.
“그게 아니고. 그게 그러니까. 저기 저 사람, 아니 저, 저, 저기 저 임 대표. 왜 저기 있는 거지?”
뭐?
모두 잠시 생각이란 걸 멈췄다.
임 대표? 보스? 진짜?
제일 먼저 블록이 TV 앞으로 달려가서 자세히 쳐다봤다.
“아닌 것 같은데. 아닌가? 이게 TV라 외형을 정확히 알 수가 없긴 한데. 이 사람이 보스인 걸 어떻게 알아요?”
“난 알아.”
“그러니까 어떻게.”
강호석은 손으로 메가폰을 잡는 시늉을 했다.
“이 포즈. 임 대표는 한국에 있을 때 메가폰을 자주 들었거든. 그때 모습과 너무도 똑같아. 그리고 저기.”
강호석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들이 집중되었다.
재준이 연설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기둥 뒤에 잡힌 사람.
“서형길?”
“맞네. 미스터 서.”
“근데 저기서 뭐해?”
“설마 진짜, 보스?”
서형길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는 하지만 시선은 재준에게서 뗄 줄을 몰랐다.
페렐라가 강호석에게 다가왔다.
“아니, 보스가 왜 저기에 있는 겁니까? 아니, 저기 있는 게 문제가 아니지. 지금 시위대를 지휘하고 있는 거 아닌가? 맞죠.”
“내 경험으로는 맞아. 옆에 모어와 지책도 임 대표를 거들고 있고.”
“왜? 왜 우리를 죽이려는 시위대를 지휘하고 있는 건데요?”
“낸들 알아.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인간인데.”
큭큭큭.
푸하하하하.
워서스틴이 TV를 보며 웃음을 참지 못하고 뒹굴기 시작했다.
“워서스틴, 지금이 웃을 때야?”
“아, 미안. 그런데 어떻게 안 웃을 수가 있어. 보스는 또 무슨 생각으로 저기에 있는 거야. 그리고 왜 저기서 보스가 돼 있는 거냐고. 어딜 가나 보스가 아니면 안 되는 병이라도 걸린 건가?”
퀴니코가 눈매를 가늘게 하고 윌켄을 쳐다봤다.
“윌켄, 이제 어쩌죠?”
“나도 모르지. 그냥 기다릴 수밖에. 아니지, 강호석. 서형길에게 전화해 봐. 사실 여부를 확실하게 알아야 하잖아.”
맞아.
강호석이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누르자,
TV 속의 서형길이 핸드폰을 받았다.
일단 서형길인 건 확실하고.
“실장님. 지금 시위대에 있어요?”
-이사장이라니까.
“대답이나 하세요. 급해요.”
-응. 시위대랑 같이 있어. 아유, 떨려 미칠 것 같아.
“저, 사실대로 말하세요.”
-뭘?
“저 시위대에서 메가폰 잡고 있는 사람. 임 대표죠?”
-응? 그게.
“빨리 대답하세요. 급하다고요.”
-휴, 맞아. 도련님이야.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모르겠지만. 맞아.
강호석은 모두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와, 미친다.
이거 실화냐?
아니, 왜?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모르지, 보스잖아.
강호석은 서형길이 카메라에 너무 적나라하게 잡히는 걸 지적했다.
“실장님, 지금 실장님 TV에 나오고 있어요. 다른 곳으로 피하세요.”
-뭐? 내가?
“나중에 비디오 분석에 잡힐 수 있어요. 장소 이동하세요.”
-알았어. 끊어.
모두 잠시 서로를 쳐다보며 침묵을 지켰다.
강호석이 먼저 침묵을 깼다.
“자, 우선 시위 이후에 대해 한마디씩 해봅시다.”
“다음 해에 대통령 선거가 있습니다. 이 시위로 인해 공화당이 크게 곤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공화당은 부자 증세를 반대해 왔으니까.
“성난 시민을 잠재우려면 경기를 부양해야 하는데 금융위기로 연준의 금리 정책을 믿지 않으니 양적 완화 카드를 꺼내지 않을까요?”
역시 펠그리니였다.
지금까지 한마디도 안 했지만 경기 예측에서는 탁월한 대답이었다.
양적 완화는 정부가 시장에 돈을 푸는 것이다.
예전 케인즈 시대에는 정부가 대규모 건설을 주도해서 돈을 풀었다.
하지만 지금은 21세기다.
그런 무식한 방법은 동원할 수 없다.
지금 건설한 대규모 공사가 뭐가 있을까? 없다.
그럼 21세기에는 어떻게 양적 완화를 시행할까.
그건 은행이 발행하는 채권을 정부가 한도 없이 사들이는 것으로 대신한다.
어쨌든 시장에 돈이 풀리는 건 마찬가지니까.
“양적 완화가 시작되면 은행에 돈이 넘쳐 저금리 대출과 기업 투자가 늘어날 겁니다. 연준이 금리 인하하는 효과를 가져올 거예요.”
“너무 과하면 안 되니까 조만간 정부는 테이퍼링을 시작하겠죠.”
테이퍼링은 양적 완화를 서서히 줄여나가는 것이다.
금융위기를 겪으며 돈에 관한 기술이 점점 좋아지고 있다.
윌켄은 모두 한마디씩 하는 걸 듣고만 있다 손을 들었다.
“그런 건 지금 시위와 크게 상관없는 일이야. 그것보다는 버피세에 대해서 말해야지. 과연 실행할까 말까. 내 생각엔 지금 보스가 이 문제로 저기에 있는 것 같단 말이지.”
“버피세 때문에? 근데 지금 시위대를 선동하고 있잖아요. 버피세를 실행하라고.”
“그러게 근데 뭔가 의심스럽단 말이지. 분명 버피세를 막으려 할 텐데. 왜 저러고 있을까. 설마 버피세를 지지하는 건 아니겠지?”
에이, 말도 안 돼.
모두 윌켄의 말에 난색을 표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혹시’라는 물음표를 그렸다.
“근데 투마로우가 버피세를 지지하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뭐? 지지한다고?
윌켄이 멍하니 페렐라를 쳐다보았다.
“그럼, 버피세를 지지하면 어떻게 되는지 한마디씩 해봐.”
지지하면?
“우린 세금을 많이 내야겠죠.”
“버피의 주장대로면 일 년에 100만 달러 이상 버는 사람에게 세율의 하한선을 적용하자는 건데. 우리 모두는 일단 해당되고. 보스는 해당되나?”
엥? 보스는?
“보스 급여가 없잖아요.”
설마 이걸 노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