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3화 돈이 많으면 무조건 나쁜 놈인가(1)
월스트리트 부근 주코티 공원.
재준은 평소와 다르게 캐주얼한 차림으로 나왔다.
불현듯 한 가지 사건이 머리를 스치자 부리나케 날짜를 확인하고 서형길을 데리고 나왔다.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심각한 표정으로 한산한 공원을 걷는 재준.
여기가 맞는데.
날짜도 맞고.
같이 온 서형길은 알 수 없는 재준의 행동에 궁금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자신이 아는 임재준은 애초에 이런 복장을 즐기지도 않을뿐더러 한가로이 산책을 하려고 공원을 배회하지 않는다.
그런데 평소에 하지 않던 짓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궁금하면 물어봐야지.
“도련님. 왜 이런 복장으로 나오라고 하신 겁니까? 그리고 여긴 어디고요?”
쉿!
“이제부터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잘못하다가는 돌 맞아 죽을 수도 있어요.”
흐익!
“왜요?”
재준은 여전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이제 월가를 점령하라며 사람들이 몰려올 겁니다.”
“네?”
그렇다.
오늘이 바로 Occupy Wall Street(월가를 점령하라)가 시작되는 날이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꾹꾹 눌러 왔던 분노가 결국 3년이 지난 후에 터져버렸다.
2008년엔 안 터지고 왜 지금에서야 터진 걸까?
그건 2008년에 직장을 잘린 고학력 엘리트들이 취업도 안 되고 버티다 버티다 성질이 뻗쳐서 거리로 뛰쳐나온 것이라서 그렇다.
물론 그냥 다들 동시에 나온 건 아니고 Occupy Wall Street(월가를 점령하라)라는 캐나다 온라인 잡지사의 사설 제목에서 시작되었다.
1%를 위해 99%가 손해를 봐야 하는가!
볼커룰이 무산되어 간다.
정부가 실패한 월가의 버릇을 우리가 고쳐주겠다.
꼭 그런 표현을 써야 하겠니?
정부가 실패했으면 의원들한테 몰려가야지 왜 월가로 나온 거야?
그리고 볼커룰 무산이라니 꼭 투마로우를 저격하는 모양새인데.
월가란 말에 재준은 억울한 면이 있었다.
이 시위가 주장하는 것처럼 월가에서 잘못한 일을 정부가 혈세를 동원해 살려주었다.
그런데 살아난 놈들이 살려준 사람보다 월급을 5배 더 받았다.
이건 화가 날 일이 아니라 삿대질 감이지.
근데 재준은 정부의 지원을 받은 적도 없고 월급도 한 푼 받지 않고 일하는데 괜히 월가에 있다는 이유로 욕을 먹는 것 같았다.
아, 월급?
월급을 왜 안 받느냐고?
월급을 왜 받아? 난 주는 사람인데.
그리고 정확히 투마로우 지주 회사를 상장하려다 이 일 저 일이 생겨서 아직 못했거든.
그러니까 아직 98% 주식을 가지고 있단 말이지.
이 말은 투마로우 운영 이익의 98%가 내 거란 소리.
그렇다고 100%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도련님, 근데 이 위험한 곳에 왜 여기 오신 겁니까?”
“구경하려고요. 쌈 구경은 돈 주고도 못 보는 거예요.”
“이건 쌈 구경이 아니잖아요.”
“그게 그거지. 별반 다르겠어요. 피켓 들고 걸어가면서 소리치면 싸우는 거지.”
“도…….”
서형길이 다시 말을 하려는데 주변에서 사람들이 한둘씩 모이더니 각자 가지고 온 텐트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텐트?
“이런, 저걸 안 챙겼네. 이사장님, 어디 주변에 가서 텐트 하나 사 오세요.”
“제가요? 그게, 그러니까. 제가 영어를 잘 못 하는데.”
아.
재준은 서형길을 바라봤다.
사람을 잘못 데리고 왔\네.
박민수나 강호석을 데려왔어야 했는데.
“그럼. 강호석 이사님에게 전화 거세요. 텐트 하나 사 오라고. 여기 주코티 공원이라고 하면 알 거예요.”
“알겠습니다.”
정말 딱 한 가지만 잘하는 서형길이 통화를 시도하고 재준은 분위기를 살폈다.
솔직히 구경이라기보다는 이 시대의 분노를 경험해야 했다.
기록된 사건과 실제 사건을 냉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
그래야 애먼 돌이 투마로우에 날아오는 걸 막지.
유명한 경제학자가 말했다.
특정 지역 실업률이 30%를 넘으면 폭동이 일어난 확률이 증가한다고.
지금 미국의 실업률은 9%대였다.
청년 실업률은 17%대.
대략 1,000만 개의 일자리가 금융위기로 사라졌다.
이러니 젊은이들이 화가 나 안 나.
버니 핸더슨이 인기를 끄는 이유가 다 있었다니까.
일부는 버니 핸더슨을 따르고 또 일부는 여기 모이고.
근데 정부는 월가를 때려잡는다고 난리 치다 헛손질만 하고.
쯧쯧.
재준이 혀를 차는데 옆으로 지나가던 두 사람의 대화가 들렸다.
“야, 이번에 투마로우가 볼커롤 무력화시켰다며?”
“그러게. 저러니 투마로우가 욕먹는 거야.”
우리가 언제 욕을 먹었니?
“이제 월가를 무슨 수로 점령하냐?”
“무력으로 해야지. 이번엔 용서 없어.”
이런 용병으로 나가면 성공할 놈들.
어디 블랙워터에 자리라도 잡아 줄까?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은 분리 해야 해.”
“맞아, 돈이 너무 몰려서 허튼짓을 하는 거라니까?”
뭐 알고는 하는 소리니?
그럼, 시대를 역행하는 거야.
투마로우는 털 빠진 닭 신세가 되는 거고.
투마로우와 상관은 없지만(?) 현 상황을 파악하고 시위에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냥 분위기에 휩쓸려서 시위에 참가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서형길이 다급하게 다가와서 마치 스파이라도 되는 듯 속삭였다.
“도련님. 강호석이 미친 짓 하지 말고 들어오라는데요.”
“아니, 이야기를 어떻게 했길래.”
“그냥 텐트 하나 사 오라고 한 게 다인데.”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요. 아주 긴박하게 간절하게 말했어야지.”
둘이 옥신각신하는데,
“저, 얘기를 들어보니 텐트가 없으신 것 같은데. 우리가 하나 여유가 있는데 빌려드릴까요?”
헉! 당신 뭐야?
얼굴에 검은 분장을 하고 입에 피를 잔뜩 묻힌 이가 다가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재준과 서형길이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가슴에는 We are 99%라는 문구를 시뻘건 페인트로 그렸다.
글을 얼마나 삐뚤빼뚤 못 썼는지.
미국 사람들 손글씨가 엉망이라던데, 정말이었다.
그리고 재준이 분장한 사람을 빤히 쳐다봤다.
분장?
“혹시 페인트 더 없나요?”
“네?”
“그거.”
손으로 얼굴을 흩어 내리며,
“바디 페인트요.”
“아, 역시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지난번 금융위기 때 회사에서 잘리신 거죠? 혹시 가족이 보면 안 되는 절절한 사연이 있으신 분이라는 걸 단박에 알아봤습니다. 한심한 인생이죠.”
빠득!
내가 그렇게 보이냐?
그래도 말은,
“아, 네. 제가 좀 험난한 삶을 살았지요. 다시 태어나는 기분으로 월가 놈들을 다 때려잡고 싶습니다.”
꽉!
주먹을 쥐어 보이며,
“이리 따라오십시오. 제 텐트에 완벽한 장비가 있습니다.”
재준이 따라가면서 서형길에게 훠이훠이 손을 흔들었다.
이사장님은 그냥 들어가세요.
그래도…….
서형길은 갑자기 발생한 돌발상황에 어리둥절해서 당분간 지켜보기로 했다.
도련님의 안위는 내가 담당한다.
이대로 지켜볼 수만은 없지.
자칫 잘못해서 투마로우 보스라는 신분이 들통난다면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벌떼처럼 달려들 거야.
서형길은 블랙워터를 향한 통화 버튼을 눌렀다.
“헬로, 마이 보스 댄저로우스, 오케이. 후딱 컴온. 시큐릿 가드. 시큐릿 가드.”
-OK.
오, 이것 봐라.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거잖아.
미국에 몇 번 왔다 갔다 했더니 영어가 쑥쑥 느는데.
이러면 도련님 팀원들과 대화 할 날도 머지않았어.
영어에 대한 자신감이 뿜뿜 하는 서형길이었다.
잠시 후,
주코티 공원은 월가를 점령하겠다는 의지로 똘똘 뭉친 이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리고,
드디어 재준이 얼굴을 동전 모양으로 분장을 한 채 입에 피 묻은 달러를 물고 등장했다.
사람들의 이목이 단숨에 집중될 만한 분장이었다.
거울을 보고 아주 흡족해진 재준은 가슴을 쫙 펴고 시위대에 섞였다.
시위대는 천천히 월가를 행진하기 시작하더니 각자 가지고 온 피켓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글래스-스티걸법 부활시켜라.
정치적 민주주의 실현하라.
부자 감세 철폐하라.
버피룰 당장 시행하라.
우리는 1%를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재준은 이들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지만, 한국의 시위와 비교하면 아쉬운 점이 많았다.
근데 구심점도 없고, 지원되는 자금도 없고, 뚜렷한 주장도 없네.
이런 식이면 의지가 금방 사라질 텐데.
사실 그랬다.
다들 중구난방으로 떠들 뿐 어디로 가는지 어디서 모이는지 모른 채 일직선으로 놓인 월가를 걸어가면서 소리만 지를 뿐이었다.
이때, 행진하는 시위대 중 가면을 쓴 사람이 월가의 건물 위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들이다. 저들이 우리를 조롱한다.”
모두의 시선이 그가 가리킨 손가락을 따라갔다.
재준도 시선을 위로 향했는데,
저거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미친 거 아냐?
잘 차려입은 남녀 십여 명이 손에 샴페인을 들고 시위대를 보며 웃어대는 게 아닌가?
재준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어서 들어가라고 뒤에서 앞으로 흔들었다.
야, 이 멍청이들아. 들어가, 들어가라고.
불타는 시위대에 기름 부을 일 있니?
근데 내가 흔드는 손이 그렇게 보였나?
옆에 있던 사람이 재준에게 메가폰을 턱 하니 쥐었다.
뭐하니?
이걸 왜 나한테?
“당신을 지지합니다. 한 말씀 하세요.”
내가?
나 월가 대빵인데?
재준이 흔드는 손이 마치 뭔가 가져오라는 신호로 느낀 걸까?
아니면 소심한 놈이 메가폰을 들고 오긴 했는데 재준에게 자신의 짐을 떠넘기기로 작정을 한 것일까?
암튼 메가폰이 손에 쥐어졌고 잠시 바라봤다.
이거 오랜만이네.
뭐 할 수 없지.
일단 저지르고 나면 뭐라도 나오겠지.
에에에에에에엥.
재준은 메가폰을 켜며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시위대의 시선이 재준에게로 향했다.
재준은 서서히 대중들 사이로 걸어 나갔다.
마침내 빌딩 계단 위로 올라가 서서 좌중을 죽 한번 둘러봤다.
그리고,
“거기 샴페인 먹는 새끼 내려와. 우리가 너희의 종이냐?”
우리가 너희의 종이냐?
사람들이 재준의 말을 따라 외쳤다.
어라? 이럴 의도가 아닌데.
에라 모르겠다.
기억을 더듬어 그 당시 시카고 시위대의 열두 가지 요구를 떠올렸다.
그래도 투마로우에 불리한 몇 가지는 빼고.
“부자 감세 폐지하라.”
부자 감세 폐지하라.
“월가 범죄자 기소하라.”
월가 범죄자 기소하라.
“금융감독기관 종사자 이전 직장 재취업 금지하라.”
재취업 금지하라.
이것들이 기니까 잘라먹네.
근데 하고 보니 열두 가지인데 할 말이 세 개밖에 없네.
와 와 와 와 와 와.
재준의 선창을 따라 한 시위대는 기운을 얻은 듯 함성을 질러댔다.
이러다 내가 대장 되는 거 아냐?
이러면 상당히 피곤해지는데.
내 뜻은 아니지만 내가 공화당을 도왔잖아.
근데 이놈들은 공화당이라면 돌무더기를 만들어도 부족하다 할 놈들인데.
지금까지 읽었으면 알 것이다.
공화당은 기업 편, 민주당은 서민 편.
그리고,
여러분 나 투마로우 보스라고.
이때, 정말 큰일이 벌어졌다.
와 와 와 와 와 와 와.
마이클 모어. 마이클 모어.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아주 아주 아주 유명한 마이클 모어가 앞으로 나오고 있었다.
이거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