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2화 꼭 뭘 모르면서 설친다니까(13)
소렌 상원 의원은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맞네. 만만하게 봤네. 근데 머리가 나쁜 건가? 그 전 대통령은 나한테 도움도 청하고 그랬는데. 이번 대통령은 전화 한 통 없네요. 뭐 말도 안 되는 법이나 만들고. 아, 사실 진심은 아닌 거죠? 뭐 그렇죠. 정치는 표를 얻어야 하니까. 자주 거짓말도 하고 좋은 사람 죽이기도 하고 못된 사람 살리기도 하고 뭐 그런 거죠. 인정해요.”
“월가는 국가를 위험에 빠뜨린 겁니다.”
“진짜요?”
재준은 소렌 상원 의원을 노려봤다.
“진짜 월가입니까? 투마로우가 아니라?”
“월, 월가입니다.”
풋.
재준이 비웃었다.
“웃기고 자빠졌네요. 지나가는 개가 들어도 배를 까뒤집고 웃을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요.”
“뭐요?”
“뭘 놀래는 척합니까? 다시 말하겠습니다. 진짜 투마로우가 아닙니까?”
재준의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당신들 금융이 뭔지는 알아요? 지금까지 벌어진 일이 그냥 생겼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기업과 금융이 다른 걸 모르겠어요? 지금부터 민주당과 전쟁 한번 치를까요? 누가 이기는지? 투마로우 자산이 10조 달러가 넘는데. 금융위기를 당신들이 집권하고 있을 때 일으켜 볼까요?”
“불가능합니다.”
풋.
“정말 모르는구나. 그냥 자리에 앉아서 이리저리 법이나 만들어 통과시키면 국민들이 그러려니 하니까. 진짜 그런가 하는 거야. 맞죠? 자, 그럼 지금 투마로우가 가진 부채에 대해 마진콜을 부르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까요?”
마진콜은 부채에 대해 더 연장할 수 없으니 상환하든지 담보를 더 제공하든지 하라는 채권자의 권리다.
소렌 상원 의원의 눈이 파르르 흔들렸다.
“설마 마진콜을 모르는 건 아니죠? 모르는 거야?”
“압니다.”
“그럼,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겠네요. 금융위기를 민주당도 한번 경험해 볼래요?”
으.
“금융위기는 월가가 만든 게 아니에요. 인간의 탐욕이 만든 거지.”
“그걸 이용한 건 월가입니다.”
“그럼, 당신들은 왜 막지 못했어요? 정치라는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건.”
“이용하려고만 했겠지. 나도 이번에 당신들의 힘을 사용해 봤어요. 큰 권력을 상대하기 힘든 건 집요하기 때문이잖아요. 어떤 것도 뺏길 수 없게 돼 버린 인간의 집념만큼 성실한 건 또 없으니까요. 근데 가지고 있는 힘이 너무 크다는 건 어쩌면 약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당신들은 그 큰 힘을 사용하는 데 서툴더라고요.”
소렌 상원 의원은 ‘힘’이라는 단어에 집중했다.
자신이 착각한 점이 바로 ‘힘’이었다.
미국은 두 개의 힘이 양분되어 있다는 사실.
민주당과 공화당.
상원과 하원.
대통령과 의회.
“왜 그랬어요? 혹시 공화당이 가만히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닐 거고. 자신 있었나? 어쨌든 금융소비자보호부는 앞으로 축소될 거예요. 지금의 십 분의 일 정도?”
“그게 무슨 말이지?”
“월가의 은행을 감독하는 데 2,000명이나 되는 인원이 필요해요? 윌리엄과 상의했는데 200명이면 충분할 거 같던데. 이거 중복기구 아닌가? SEC도 조사 기관인데 굳이 금융소비자보호부까지 있다는 게, 영 돈 낭비 같잖아요.”
“200명?”
마지막 희망인 금융소비자보호부가 축소된다면.
결국 도드프랭크법은 쓰레기가 된다.
“알고 있죠? SEC가 CFTC가 정한 80억 달러의 스왑거래를 인정한 거.”
“SEC가?”
SEC 위원장은 상원이 동의하고 대통령이 임명한 사람인데.
“그뿐이 아니고 CFTC도 등을 돌렸어요. 왜 그런지 아시죠? 아, 모르겠구나. 이게 바로 당신들이 힘을 정확히 사용하지 못한 증거예요. 무조건 지시하고 명령을 내리면 따를 거라는 착각. SEC든 CFTC든 그들 고유의 권한이 있는데. 암튼 이제 금융소비자보호부는 이쯤에서 막을 내릴 겁니다.”
“다시 정부 기구로 돌려놓을 겁니다.”
“정말요?”
재준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멍청하네. 생각보다 더. 여기 연준이에요. 정부가 어쩌지 못하는 곳이잖아요. 투마로우도 어쩌지 못하는 곳이기도 하고. 사실 민주당도 투마로우가 건드리지 못할 거란 이유로 연준 안으로 욱여넣은 거잖아요. 연준도 그런 의미로 받아들인 거고. 근데 다시 가져가겠다고요? 연준 허락도 없이?”
“연준.”
미처 다시 꺼내 오는 방법은 생각 못 했다.
오직 투마로우와 밀착되지 않게 하려고 연준을 선택한 건데.
아니, 그런 생각을 할 이유가 없었잖아.
재준은 양손을 들었다.
“자, 이제 이야기는 대충 마무리했으니 각자 자기 잇속을 챙기죠. 포기할 건 포기하고 얻어갈 건 얻어가야죠. 안 그래요?”
“우리가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왜 없어요. 기껏 만들어 줬더니.”
“뭘 만들어 줬다고.”
“버니 핸더슨. 요즘 인기 급상승하고 있잖아요. 여기에 돈 많이 들었어요. 훌륭한 인재도 투입했고.”
“버니…….”
설마.
어쩐지 갑자기 핸더슨 의원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했더니.
소렌 상원 의원은 허탈했다.
이 모든 게 저놈의 손바닥에서 놀아난 거라니.
어쩐지 진행은 안 되고 점점 막혀가는 느낌이 들더니.
어떻게 민주당 전체가 저놈 하나에 당할 수가 있는 거지?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죠? 지금부터 나한테 신경 쓸 시간에 힐러리 클리프를 끝장내고 버니 핸더슨을 대통령으로 만들 계획이나 짜세요. 아, 그 전에 현 대통령 재임 선거도 이겨야 하고. 할 일 많네. 굳이 나랑 싸울 생각하지 말고.”
부르르.
소렌 상원 의원은 두 손이 떨렸다.
억울해서가 아니었다.
저놈이 하는 말이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이다.
지금 섣불리 다시 싸움을 건다면 패하는 건 민주당이다.
지금까지 당했으니까.
차라리 여기서 물러나고 대통령 재임, 그리고 차기 대통령을 만드는 데 집중하는 게 더 이익이다.
“이대로 끝나진 않습니다. 다음에는 기필코.”
소렌 상원 의원은 재준의 말을 듣지도 않고 돌아섰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윌리엄을 쳐다봤다.
너도.
“가지.”
비서에게 한마디 하고는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윌리엄이 멀어지는 소렌 상원 의원을 보며 재준 옆으로 왔다.
“괜찮겠어요?”
“정치인이잖아요. 머리는 빠르게 돌아가네. 질 싸움은 빨리 털어버릴 겁니다.”
“근데 버니 핸더슨은 왜 작업한 겁니까?”
“중심이 흔들리면 나머진 알아서 흩어지는 게 권력이니까요.”
“저러다 진짜 차기 대통령이 되면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그런 무서운 소릴?
하지만 힐러리 클리프한테도 지니까.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싶다면 지는 싸움도 최선을 다 해봐야 깨닫는 게 있을 겁니다.
너무나 당연한 듯이 말하는 재준을 보며 윌리엄은 피식 웃었다.
뭐 그렇다면 그런 거지.
***
뉴욕 프랑스 레스토랑.
“만약 도드프랭크법이 원안대로 입법됐다면 보스는 어떻게 했을 거예요?”
페렐라가 재준에게 정말 궁금해서 물었다.
“짐 싸서 다른 나라 가야지. 투자은행이 활동하기 최악의 동네가 됐을 테니까.”
“다른 나라 어디요?”
“글쎄. 러시아나 중국? 아니면 일본?”
“한국은 왜 안 가요? 보스 고향이 한국인데.”
“먹을 게 없잖아.”
“한국에요? 많던데.”
“먹을 게 없다는 게 그 없다는 게 아니고 내가 할아버지랑 싸울 수 없단 말이야.”
아, 이해됐다.
“그리고 잘 해결됐으니까 월가에 계속 있어야지.”
프랑스 코스 요리가 나오고 모두 즐겁게 식사를 하는데 유독 두 명만 오만 인상을 쓰고 있었다.
푹.
박민수는 두꺼운 스테이크를 포크로 사정없이 찌른 뒤 크게 한입 베어 물고는 재준을 노려보며 우적우적 씹었다.
옆에서 강호석도 똑같이 포크로 생선 요리를 들고 질겅질겅 씹었다.
재준은 미안한 마음으로 진정하고 예쁘게 식사하라는 의미에서 와인 잔을 들어 보였다.
거, 사람들.
좀 참으면 될 것을 꼭 티를 내요. 티를.
그나저나.
“이사장님. 버니 핸더슨은 어때요? 거 이상한 단체도 만들었던데.”
“아, 버닝소셜이요? 잘나가고 있습니다. 예상외로 버니가 적극적이라. 진짜로 인기가 있더라고요. 하하. 거 참 별일이라니까. 사회주의자면 북한이나 중공 아닌가? 그런 빨갱이를 미국 사람들이 의외로 좋아하다니.”
“당분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세요. 이사장님이 빠져도 잘 돌아갈 때까지.”
“네. 근데 도련님. 버니는 왜 도와주는 겁니까? 이미 도드프랭크법인가 뭔가는 알맹이 빠진 빈 껍데긴데. 돈만 더 들어가고 실속이 없을 것 같은데.”
“이번 기회에 정치인을 알아보려고요.”
“왜요?”
“버니 말고 누구를 밀어줘야 할 것 같아서요.”
“누구요?”
“요즘 TV에 나와서 인기 끌고 있는 CEO 있잖아요? 유어 파이어! 하는 사람.”
띵. 띵. 띵.
모두의 머리에 종이 세 번 울렸다.
오직 서형길만 모르는 눈치였다.
역시나 이런 말에 제일 먼저 반응하는 건 윌켄.
“보스, 제정신입니까? 그 폭주 기관차 같은 인간은 왜요? 기업을 벌써 네 번이나 말아 먹은 인간인데. 절대 안 됩니다. 그 사람한테 무얼 맡기시려고 그러는지 모르지만. 투자하시면 절대 안 됩니다.”
“투자하려는 게 아니에요.”
“그럼 은행을 맡기려고요? 그것도 절대 안 됩니다.”
“은행도 아니에요.”
“그럼요?”
“차기 대통령으로 만들려고요.”
대통령?
우르르르 쾅쾅.
쨍그랑.
페렐라가 먼저 머릿속에서 우렁찬 뇌성이 울리더니 결국 들고 있던 포크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키득 키득 키득.
워서스틴은 혼자 상상하면서 키득키득 웃고, 퀴니코는 와인을 내려놓고 위스키를 병째 나발을 불었다.
“보스, 그 사람 계산이 안 되는 사람이에요. 대통령을 어떻게 만들어요.”
펠그리니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우와! 이 요리 끝내주네.”
절대 재준의 말을 듣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요리에 집중하는 블록.
이 상황을 전혀 모르는 서형길은 강호석에게 물었다.
“도날드 뭐 그 사람 뭐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반응이 과격한 거지?”
강호석은 손가락으로 서형길을 가리키며, 유어 파이어(넌 해고야)를 시전해 주었다.
“요즘 가장 핫한 유행어를 만든 사람입니다. 전직은 기업인인데 호텔이나 카지노를 운영했죠. 지금까지 네 개나 말아 먹었지만.”
“근데 그 사람이 왜 유행어를 만들어. 코미디언으로 전업한 거야?”
“전업은 아닌데 쇼에 나와요. 거기서 일 못 하는 직원을 해고하면서 유행어를 만들었어요.”
“그래? 근데 왜 반응이 이래?”
“음. 뭐랄까? 대통령이 되면 안 되는 사람?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실장님이 회장님 자리에 앉는 모습?”
“이런 망령된 놈. 감히 나를 회장님과 비교하다니.”
바로 그거.
강호석은 손가락으로 서형길을 가리켰다.
“딱 그 느낌. 그런 느낌입니다.”
아. 그려지네.
“그럼, 정말 이상하네. 왜 도련님이 그런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려는 거지?”
음.
“그건 임재준이니까. 아닐까요? 전 세계에서 가장 미친놈을 꼽으라면 당연히 임재준일 겁니다. 아니, 실장님?”
“이사장이라고 불러.”
“실장님이 편해요. 이사장 뭔가 안 맞아요.”
“암튼. 왜?”
“이번에 버니 핸더슨 키우면서 유세에 대해서 많이 배웠죠?”
“뭐, 얼추?”
짝.
강호석이 손바닥과 주먹을 맞잡았다.
“그럼 이 기회에 임재준을 대통령으로 만드는 건 어때요?”
뭐?
그럼 난 대통령 비서실장?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서형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