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9화 꼭 뭘 모르면서 설친다니까(10)
AAG빌딩 66층.
“도련님.”
서형길이 66층에 들어서며 재준을 보자 환하게 웃었다.
“이사장님. 어서 오십시오.”
“앞으로 안 부르시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이렇게 다시 불러주시다니. 아직은 제가 도련님께 쓸모 있는 사람이란 게 자랑스럽습니다.”
“쓸모없다뇨, 아직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훌륭한 능력을 썩히면 안 되죠.”
“하하하. 제가 좀 그런 면이 있죠. 오면서 들었습니다. 버니 핸더슨 상원 의원 대선 출마하게 만드는 작업을 한다고요.”
금융소비자보호청이 연준 산하에서 유명무실해지는 것을 본 버니 핸더슨은 눈이 뒤집혀서 월가를 사정없이 공격한다.
그러기 전에 대선 출마로 길을 인도해 줄 필요가 있다.
“네. 맞습니다. 버니 핸더슨인데 가능하겠습니까?”
“그럼요. 버니는 인간이 아닙니까? 그도 욕심은 있을 겁니다. 언론이야말로 인간의 탐욕을 가장 쉽게 드러내게 만드는 법이죠. 자꾸 이름이 오르내리면 자기가 꼭 뭐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할 겁니다.”
“음. 일리 있어. 역시 선수는 다르다니까.”
“맡겨만 주십시오.”
“뭐, 힐러리 클리프와 비교하면 더욱 확실하게 드러날 겁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하하하.”
힐러리 클리프는 국무부 장관 출신인 보수주의자인 반면, 버니 핸더슨은 자신의 입으로 사회주의자라고 떠들고 다닐 정도로 진보주의자다.
“그리고 여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타이밍이죠.”
“역시 서 실장, 아니 이사장님입니다.”
재준은 서형길을 향해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자신을 알아주는 행동을 보자 신이 났는지,
“이미 이번 정부는 3년이 지났으니 슬슬 국민들 눈에 미운 구석이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과거 버니 핸더슨의 말을 인용해 현 국민이 원하는 구석을 가볍게 긁어주는 거로 시작하겠습니다.”
역시, 역시.
“국민의 반응을 매의 눈으로 살펴보면서 중산층의 지지율이 올랐다고 말한 뒤, 버니 핸더슨 팬덤을 결성, 대선 출마를 부추기면 될 겁니다.”
“지지율이 안 오르면요?”
“아니, 도련님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그냥 올랐다고 하면 되죠. 누가 그런 걸 일일이 따지겠습니까? 올랐다면 올랐구나 하지.”
“오, 그러네. 좋네요. 좋아.”
“버니 핸더슨은 이미 제 손안에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치밀한 계획 정말 맘에 듭니다.”
“감사합니다.”
하하하하하하하.
서형길은 박장대소를 터뜨린 후 멍하게 쳐다보는 박민수와 강호석을 노려봤다.
“다들 긴장하고 있군. 걱정 마. 내가 있으니까. 이미 승리는 우리 것이야.”
뭐라는 거야?
누가 들으면 스파이 영화라도 찍는 줄 알겠네.
“박민수 씨. 힐러리 클리프에 대한 행적을 조사해 주고. 강호석, 버니 핸더슨을 밀착 취재해 봐. 뭐라도 나올 거야.”
벌써 움직이기 시작하는 서형길.
벌써 아니꼽기 시작하는 박민수와 강호석.
“뭐가 나와요? 이미 둘은 유명한 정치인이라 신문에 일거수일투족이 다 실리는데.”
“어허, 그런 안일한 생각이 성공을 그르치는 거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봐야지. 그러기 위해선 직접 자신의 눈으로 봐야 한단 말이야. 나처럼. 지난날 나의 시간을 잘 되돌려 보라고. 분명 배울 만한 것을 찾을 수 있을 거야.”
박민수와 강호석은 아무 말도 못 하고 서형길을 그저 바라만 보았다.
하여튼 저것도 타고나야 해.
재준도 시간을 확인했다.
“전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세 분은 좀 더 이야기 나누세요.”
슬슬 폴 라이레놀을 지원하러 연방상품선물거래위원회로 가 볼까?
***
연방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
환장하겠네.
연방상품선물거래위원회(CFTC)의 위원장 니콜라스는 오만 인상을 쓴 채 자신의 책상에 놓인 서류에 사인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독립적인 연방 정부 기관인 CFTC는 파생 상품 시장을 통제하고 악의적인 행위를 규제하는 역할을 했다.
그런데 도드프랭크법 때문에 CFTC가 해야 할 일이 무려 8배나 늘게 생겼다.
왜?
“1억 달러 이상 스왑거래를 하는 기업을 모두 규제 대상으로 집어넣으라니 이놈의 정치인들은 정말 거래를 알고는 있는 거야?”
CFTC는 선물거래에서 스왑, 즉 선물 거래 시 손실을 보존하기 위해 걸어 놓는 일종의 보험 상품을 거래하는 모든 기업 특히 은행을 감독하는 업무가 폭증했다.
금융위기 전에는 100억 달러 이상 스왑거래하는 투자은행만 감독하면 됐는데 도드프랭크법이 실행되면서 스왑거래 규제 하한선을 더 낮추라고 압박했다.
‘1억 달러 어떻습니까?’
민주당 상원 의원의 말이었다.
미친놈. 알고나 지껄인 건지.
뭐? 1억 달러?
어쨌든 지금 니콜라스가 사인만 하면 규정이 위원회에 전달되고 위원회의 협의도 필요 없이 바로 시행될 것이다.
위원회도 니콜라스에게 모든 결정을 미루고 뒤로 한발 물러서 있는 상태.
책임지기 싫다 이거지.
“빌어먹을 정치인들 때문에 우리만 죽어나잖아.”
여기도 금융소비자보호청과 마찬가지로 인력난이 해소되지 않았다.
아니, 그보다 더했다.
모든 게 그 빌어먹을 예산인데…….
예산이 얼마나 증액이 되고 그에 맞춰 증원할 인력을 추리하면 스왑거래를 규제할 금액이 나온다.
하지만,
아직은 규제할 금액이 어느 정도가 적당한지 감이 안 와.
톡톡톡톡.
서류 위를 펜으로 두드리며 사인을 미루고 있는데,
“폴 라이레놀 하원 의장이 도착했습니다.”
“어, 벌써? 얼른 들어오시라고 해요.”
일주일 전 하원 의장에게 예산 문제로 상의할 일이 있다고 전화가 왔었다.
니콜라스에게 단비와 같은 소식이었다.
그래, 예산이 먼저지.
예산을 증액하고 규제 하한선을 정해도 늦지는 않아.
그런데,
벌컥.
“니콜라스 위원장, 의회를 얼마나 무시했으면 세금을 이렇게 낭비할 수 있습니까?”
들어오자마자 목소리를 높이는 하원 의장.
“의장님 무슨 말씀입니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셔야지, 다짜고짜 그렇게 말씀하시면…….”
“여기 보세요.”
하원 의장은 앉을 생각도 않고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바로 퀴니코가 정성스럽게 파헤쳐서 하원 의장에게 건네준 올 한 해 CFTC 자금 집행 내역이 나열되어 있었다.
니콜라스는 죽 훑어보고는,
매년 보고했던 건데.
“별문제 없어 보이는데요?”
“뭐라고요? 내가 보기에는 돈이 줄줄 새는 게 보이는데 위원장님 눈에는 안 보인단 말입니까?”
“어느 부분이 그렇다는 겁니까?”
예산삭감론자의 대표주자인 폴 라이레놀이 니콜라스의 대답에 기가 찬 표정을 지었다.
“지금 도드프랭크법에 보면 임직원 스톡옵션 폐지와 보너스 지급절차를 투명하게 밝히라고 했습니다. 근데 제가 보기에 CFTC는 보너스 지급이 투명하지 않은 것 같은데요.”
보너스?
“어디가 문제입니까?”
여기.
하원 의장이 손가락으로 서류를 가리켰다.
“니콜라스 위원장. 다른 기관에 비해 보너스가 과한 거 아닙니까?”
하원 의장의 말에 니콜라스는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 왜 이러십니까? 저희는 법으로 정한 범위 내에서 임금과 보너스를 지급하고 있습니다.”
“정말이요?”
하!
뻔뻔하기는.
“법? 어디 그 법을 보여주세요. 정말 보너스를 1,200%까지 지급해도 된다고 나와 있는지. 어딨습니까, 그 법.”
“그건, 규정에 나와 있듯이 저의 재량으로…….”
“내가 알기론 이번에 신설된 금융소비자보호청은 보너스가 300%라고 알고 있는데. 여기도 그 정도로 내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왜 여기만 예산을 낭비합니까.”
“저희는 독립기관으로…….”
“이번 예산안에서 33%를 삭감할 겁니다.”
네?
일은 8배가 늘었는데 오히려 예산을 33%를 삭감한다고?
“왜 이러십니까? 의원님. 지금 저희는 어느 때보다 예산이 더 필요한 시점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삭감이라니요.”
이런 제길. 도드프랭크법 불똥이 왜 여기까지 튀는 거야?
이때,
“위원장님, 투마로우에서 왔습니다.”
뭐?
하원 의장은 놀라는 니콜라스를 보며 시큰둥하게 말했다.
“제가 불렀습니다.”
“누구를요?”
“임재준이요.”
‘의장님, 금융 거래에 대해선 투마로우의 조언이 필요할 겁니다. 저희 보스가 도움을 드리겠다고 하는데 한번 만나보시겠습니까?’
하원 의장은 퀴니코의 조언으로 예산 삭감을 해결하기 위해 재준에게 도움을 청했다.
벌컥.
“안녕들 하셨어요? 여긴 왜 이렇게 들어오는 절차가 까다롭습니까?”
“보안이 생명인 곳이라.”
“아,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돈을 펑펑 낭비하시는군요?”
오자마자 뭐라는 거야?
니콜라스 머릿속이 하얗게 바래는 느낌이었다.
어째 오는 놈들마다 돈 얘기만 하는 건지.
우리가 하는 일이 얼마나 고된 일인데.
예산은 듬뿍 주지도 않으면서.
“일단 앉으시죠. 앉아서 이야기합시다.”
진정하라는 의미에서 니콜라스는 자리를 권했다.
흥.
못마땅한 라이레놀과 빙글 웃는 재준이 자리에 앉았다.
“의장님. 정말 하시고 싶은 말을 해 주십시오. 예산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하는 건 낭비되는 세금만큼 예산을 삭감하는 겁니다. 그 이외에는 없습니다.”
아 미치겠네.
니콜라스가 깊게 숨을 내쉬자 재준이 나섰다.
“그렇게 힘들어하지 마세요. 서로 간의 합의점의 찾고자 제가 왔잖아요.”
“합의점이요?”
“네.”
합의점은 스왑거래 규제 기준을 80억 달러로 올리는 것.
80억 달러는 투마로우가 1년에 거래하는 금액.
규제 기준을 80억 달러로 올리면 투마로우뿐만 아니라 월가는 활기를 되찾을 수 있다.
그뿐인가. 80억 아래로 거래하는 금융기관은 규제에서 제외되고 이들에게는 도드프랭크법이 무용지물이 된다.
재준은 라이레놀 의장을 보며 말했다.
“의장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해요. 낭비되는 예산은 삭감하는 게 맞고요.”
“먼저 확실히 해 주십시오. 퀴니코의 말을 들었습니다. 예산 삭감에 찬성한다 했는데 맞습니까?”
“당연하죠. CFTC가 중요한 일을 하고 힘든 일인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과도한 보너스는 시정되어야지요.”
니콜라스가 어이가 없다는 듯 재준을 향했다.
“투마로우는 사기업 아닙니까? 이 자리에서 예산을 논할 자격은 없습니다.”
“에헤이, 이러니까 국민들이 손가락질하는 거지. 예산이라는 게 다 국민의 혈세인데 그걸 꼭 의회나 기관에서 결정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죠. 그리고 내가 내는 세금이 얼만 줄 아세요? 아마 CFTC 일 년 운영 자금보다 많을걸요? 이렇게 거액의 세금을 성실하게 내는 납세자가 하는 말을 고깝게 들으면 안 되죠.”
“맞는 말입니다.”
하원 의장이 재준의 말을 거들며 말을 이었다.
“CFTC는 왜 다른 기관보다 보너스가 많은지 설명해 보세요. 납득이 불가능하다면 예산 감축은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아, 그게…….”
니콜라스는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이걸 어떻게 납득시키냐고.
빌어먹을 도드프랭크법.
거기에 왜 스톡옵션과 보너스를 거론해서.
월가가 보너스 잔치를 한 거지 국가 기관이 한 건가?
곤란한 표정을 한 니콜라스를 보며 재준은 빙그레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