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4화 꼭 뭘 모르면서 설친다니까(5)
AAG 빌딩 61층.
한국 요릿집.
박민수와 강호석은 심각한 표정으로 마주 앉아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유럽이 저 난리인데 꼭 거대 은행, 그것도 셋이나 합병을 진행한다고?”
“넷이라니까요.”
“아, 맞다. 클레이스까지 넷. 어쨌든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 200명의 실사팀을 이끌고 스페인을 거쳐 프랑스, 네덜란드, 아, 영국까지 돌아라. 이 말이지?”
“지금까지 힘든 역경이 있었는데. 가장 힘든 일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희 둘이라면 어찌해볼 텐데. 200명을 데리고. 하, 벌써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습니다.”
강호석이 한 병에 3만 6천 원 하는 소주를 들어 잔에 따라주었다.
쫄쫄쫄쫄.
“아니, 근데 여긴 왜 소주가 30달러나 합니까?”
“겨우 30달러지. 임 대표 10만 달러짜리 위스키 먹던데.”
“하긴, 돈 많으면 뭐합니까? 써야 돈이지.”
“맞아. 일 많으면 뭐해. 휴일이 있어야 일이지.”
갑자기 술맛이 도네.
건배.
강호석과 박민수가 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들이켰다.
“요즘 정부 살벌하던데.”
“이해해야죠. 선거 때 월가를 잡겠다고 큰소리는 빵빵 치고 말도 안 되는 법은 만들었는데 실적은 안 나오고 있잖아요.”
“미국이나 한국이나 정치인들은 참 쓸데없는 데 목숨을 걸어. 그 시간에 국민들 어떻게 사나 살펴보면 좋을 텐데.”
“에이, 그러면 아무도 안 알아줘요. 뭔가 빵빵 터뜨려야죠. 임팩트 있게. 지난 대통령은 전쟁 일으켜서 역사에 한 페이지 턱 하니 장식했잖아요. 그러니 이번 대통령도 뭐라도 해야겠지요.”
“흑인이라 당선부터가 역사에 기록될 만한데 뭘 또 하겠다고. 저러다 역풍 맞아서 한 방에 가는 수 있어.”
“그건 그래요.”
다시, 건배.
“그리고, 이사님. 요즘 언론에 온통 우리 투마로우 얘기뿐이던데. 좀 심하지 않나 싶어요.”
“그러게 특히 ISDS에서 변호사들이 외화은행 합병 과정에서 로운스타와 한국 정부 밀착 관계를 낱낱이 공개해서 여간 시끄러운 게 아니야. 이거 임 대표가 너무 무리수를 두는 거 같은데.”
“그러게요. 그리고 우리 유럽에 가면 더 시끄러울 것 같아요. 자그마치 유럽 최고의 은행 넷을 합병하잖아요. 이게 정말 대형 사건인데.”
“이거 터지면 한 달은 언론에서 투마로우 얘기 밖에 안 나온다.”
“문제는 따로 있잖아요. 임 대표가 그리스 아예 지도에서 지우려는 것 같던데. 그 있잖아요. 자기 돈 안 갚으면 지옥까지 몰고 가서 유황불에 빠뜨리는 거. 아르헨티나 봐요. 얼마나 데였으면 지금도 꼬박꼬박 이자 물고 있는 거.”
“그리스 큰일이야. 큰일. 근데 이상하지 않아. 나만 그런가? 그리스 저렇게 만든 게 꼭 임 대표 작품인 거 같단 말이야.”
“에이, 말을 해도. 설마 그렇게까지 했겠어요.”
“아니야, 내 촉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저거 임 대표가 한 거 맞아.”
“아, 아, 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고 술이나 하죠.”
“그래.”
자, 건배.
쨍,
카.
“그 도드프랭크법 말이에요. 의외로 실적이 없는 거 같지 않아요?”
“아이고, 다른 은행은 보지도 않아. 오직 우리만 잡겠다고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실적이 나오겠어? 다른 은행을 우리같이 뚫어져라 쳐다봤으면 벌써 몇 건은 올렸겠다.”
“거 참, 왜 투마로우를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인지 원.”
“근데 임재준이 정부에 고분고분 구는 것도 말이 안 돼. 그림이 안 그려지잖아. 그림이.”
“그렇긴 해요. 페렐라하고 워서스틴이 줄소송을 걸던데. 저러다 진짜 도드프랭크법 핫바지 되는 거 아닌가 몰라요.”
“이미 끝났어. 투마로우가 슬슬 움직이니까. 월가가 은연중 동조하고 있잖아.”
“동조요? 무슨 동조. 아무것도 안 하던데.”
“그게 도와주는 거지.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바로 동조하는 거야.”
“아, 그렇긴 하네요. 그리고 이제 공화당이 움직일 때가 됐죠? 윌켄이 그쪽을 자기 집으로 착각할 만큼 드나든다고 하던데.”
“아마, 지금쯤 뭔가 꺼내 들 때가 됐지.”
“시원한 거 한 방 먹이고 빨리 끝냈으면 좋겠네요.”
“박 실장, 그건 아니야. 이번에 임 대표가 도드프랭크법 무력화시키면 그 뒤로 우린 일에 치여 죽어.”
“헉, 그러네. 그렇다고 저쪽 이기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
아.
자, 마셔.
***
공화당 소회의실.
“지금 입법을 추진하자는 겁니까?”
아론 상원 의원이 심슨의 주장에 어이가 없는 듯 쳐다봤다.
“생각해 보세요. 도드프랭크법이 정말 국익을 위해서 만들어진 법이라 생각하십니까? 금융위기를 이용해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한 자들입니다. 이것저것 다 가져다 붙인 법인데 제대로 작동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민주당이 만든 법을 폐기할 수도 없습니다. 정치적 부담이 너무 크니까요. 그러니 저건 그냥 놔두고 각 조항을 무력화시킬 대항마를 만들자는 겁니다.”
딱, 딱.
베네틱트 상원 의원이 손가락을 튕기며 심슨을 응원하기 위해 나섰다.
“맞아요. 지금 월가도 엉망이고 기업들도 엉망입니다. 서로 힘들다고 난리예요. 그런데도 정신 못 차리고 세금만 낭비하고 있잖아요. 어떤 정신 나간 작자가 2,300페이지에 달하는 법안을 만듭니까? 지금이 무슨 독립선언문 만드는 시대냔 말입니다.”
어허.
자그마치 7선의 클라우드 상원 의원이 모두 목소리가 격앙되는 게 걱정이 됐는지 두 손을 들어 진정시켰다.
“모두 진정하세요. 지금 우리 현안은 곧 다가올 예산안에 대한 청문회입니다. 월가를 감시하는 감독기구들에 대한 예산안을 삭감하는 일이 가장 심도 있게 다루어야 할 주제입니다. 무얼 주고 무얼 받을지 모두 의견을 내 보시기 바랍니다.”
저기,
심슨이 클라우드에게 고개를 숙여 경의를 표한 뒤 모두에게 시선을 뿌렸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투마로우가 저에게 제안한 내용이 있습니다.”
음, 투마로우.
모두 짐작은 했지만, 자기들 입으로 꺼내려니 찝찝했다.
“이번 재무회계기준위원회(FASB) 표결에서 로비스트들을 한 번은 마주했을 겁니다. 그들은 모두 투마로우에서 보낸 사람들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근데 정말 의외였습니다. 왜 투마로우가 자신에게 불리한 회계 기준을 지지한 겁니까?”
“이번 회계 표결은 민주당에 보낸 메시지라고 보시면 됩니다. 공화당과 손을 잡는다. 뭐 이런 정도. 그리고 투마로우가 원하는 건 하나. ‘볼커룰을 없애달라’ 이겁니다. 지원도 아끼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잠깐.
클라우드가 심각한 얼굴을 했다.
“임재준이 정치를 하려는 건가요?”
“그렇진 않습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지금 민주당이 말로는 월가 개혁을 외치지만 실제로는 투마로우에 모든 화살이 겨누어져 있습니다. 투마로우를 자신들의 발아래 두겠다는 거죠. 그래서 이번 예산 법안 청문회 때 우리가 투마로우와 손을 잡았다는 인상을 강하게 심어 줘야 합니다.”
음.
클라우드가 콧수염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며 신음을 냈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이번 예산안에 우리가 가장 심하게 반대하려는 게 금융소비자보호청 예산 증액입니다. 이걸 주고 볼커롤을 지워 버립시다.”
“민주당이 받아들일까요?”
“우리가 먼저 금융소비자보호청을 구석으로 몰아가면 됩니다. 지금까지 실적이 없잖아요. 당장 없애자고 하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가 은행 몇 개 따로 조사해서 도드프랭크법에 위반 여부를 내놓으면 됩니다. 우리도 찾은 걸 저들은 못 찾았다. 어때요?”
“오, 그거 괜찮겠습니다.”
클라우드는 다른 상원들의 반응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임재준, 타고난 놈이긴 해.
전해준 말대로 흘러가고 있어.
정치판에 들어오지만 않는다면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겠는데.
클라우드는 며칠 전 퀴니코가 전해준 재준의 말을 듣고 긴가민가했다.
물론 심슨이 이미 윌켄과 여러 차례 일을 도모하면서 투마로우를 도우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 공화당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 건 또 다른 이야기였다.
원래 공화당이 살길은 민주당의 무리한 의료보험 정책을 막는 것이었는데 임재준의 말은 달랐다.
-전 국민을 상대로 싸우지 마세요.
그렇지, 잠시 눈이 어두웠어.
기업에 관심을 두는 게 훨씬 득이 많지.
“그리고 심슨, 우리가 예산 청문회로 시간을 끄는 사이 대항법안을 따로 준비하세요. 생각해 둔 것은 있습니까?”
“네.”
윌켄이 조언한 내용.
“도드프랭크법 중에 금융위기 시 정부의 신속 개입과정인 청산권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부분을 기존 연방파산법을 개정해서 금융기관에 자율적으로 법원에 파산보호신청을 하여 채권채무관계를 정산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할 것입니다.”
“정부의 강압보다는 금융기관의 자율에 맡기자는 말이군요.”
“그렇습니다. 강압과 자율. 당연히 민주주의인 나라에서 자율에 힘을 실어주지 않겠습니까? 저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의 자율을 주장하면 충분히 승리하리라 생각합니다.”
“괜찮군요. 또 다른 의견은 없습니까?”
“굉장히 중요한 안건이 있습니다.”
심슨이 살짝 손을 들어 모두를 집중시켰다.
“금융소비자보호청의 수장을 끌어내리고 저희 쪽 인사를 앉히는 건 어떻습니까?”
“그게 가능합니까?”
“방금 말씀하셨잖습니까. 지금 청장은 무능력합니다. 끌어내리는 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 누굴 앉히려는 겁니까?”
벌컥.
“제가 그 자리에 가겠습니다.”
누구?
윌리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윌리엄을 본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신이 여길 어디라고 들어오는 겁니까?
-당장 나가세요.
-아니 이게 어찌 된 영문입니까?
심슨이 뒤돌아 두 팔을 벌렸다.
“자, 모두 진정하세요. 윌리엄은 제가 불렀습니다. 자, 자. 다들 자리에 앉으세요.”
허, 거 참.
일단 앉으라니 다들 앉기는 했지만 정말 이해하기 힘든 광경이 벌어졌다.
윌리엄이 누군가.
현재 정권의 재무장관이며 금융개혁의 선봉장에서 월가를 감시하는 사람인데.
그럼, 민주당 사람이라는 소리고, 여긴 공화당이다.
윌리엄이 이 자리에 있는 게 말이 안 되는 상황이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먼저 심슨이 정리를 해줄 필요가 있었다.
“다들 놀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윌리엄은 현 정권의 재무장관이니까요. 하지만.”
잠시.
윌리엄이 심슨을 제지하며 나섰다.
“제가 말을 하는 게 나을 겁니다.”
“아, 네.”
심슨이 그게 낫겠다는 듯 뒤로 빠졌다.
“저를 아시는 분들이 꽤 계실 겁니다. 하지만 제가 그 전에 어디 있었는지는 모르실 겁니다.”
-모르긴 왜 모릅니까? 뉴욕연방준비은행 출신으로 연준 회장을 지낸 거 아닙니까?
-당적도 민주당이고.
-지금 재무장관이잖아요.
“맞습니다. 그럼 제가 뉴욕연방준비은행에 있을 때 벌어진 사건은 아십니까?”
그건…….
“혹시, 뱅크 오브 에이스가 투마로우에 인수되는 걸 아십니까?”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습니까?
-당연히 알지요.
“그럼, 그때 중재를 맡은 사람이 저라는 것도 아십니까?”
뭐요?
그럼, 임재준 사람이란 말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