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3화 꼭 뭘 모르면서 설친다니까(4)
프랑스 엘리제 궁.
“이리 오시죠.”
비서실장의 안내를 받으며 재준은 대통령 집무실로 향했다.
대통령이 사라크에서 올랑도로 바뀌어 내심 걱정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아무 연락도 없는 걸 보면 프랑스 은행 문제는 큰 변화가 없었던 것 같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근데 희소식이 내가 아니라 프랑스에 희소식이면?
혹시 사라크방크 10년 후에 돌려준다고 했는데 정말 돌려달라고 하면 어쩌지.
어쩌긴 뭐 어째.
돌려달라고 하면 돈 달라고 해야지.
그때에 비해 배는 커졌는데.
팔아도 남는 장사긴 하네.
그만한 돈이 있다면.
정말 이상하네.
전에는 왜 십 년이 넘었는데도 돌려달란 말이 없었을까?
지금 그리스 사태 때문에 그럴 정신이 없는 건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데 대통령 집무실 앞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정치인답게 생긴 퉁퉁한 아저씨가 한 손을 들어 올렸다.
“오, 무슈. 어서 오세요. 올랑도입니다.”
“네, 임재준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자, 이리 앉으세요.”
이 아저씨도 만만치 않네.
아유, 눈 밑에 그거 뭐예요?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프랑스도 그리스 때문에 골치 아픈가 보다.
여기 올랑도 대통령의 다크서클이 그 증거다.
누가 보면 웃고 있는 피에로로 여기겠네.
재준은 자리에 앉으며 먼저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리스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십니다.”
“맞습니다. 빨리 해결해야 하는데 차르라스 하는 행동이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습니다.”
에휴.
땅 꺼지겠어요.
내가 얼른 해결해야지 이러다 사람 여럿 죽겠네.
자기가 저질러 놓고 모른 척하는 재준이었다.
“그래서, 제가 좋은 방안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그리스 사태를 해결할 방안입니까?”
“따지고 보면 그런데 그리스 사태를 꼭 해결하지 않아도 됩니다.”
?
올랑도 대통령이 두 눈을 껌뻑거리며 재준을 쳐다봤다.
아니, 이건 무슨 헛소리지?
투마로우 오너라고 들었고 프랑스 은행 문제를 단번에 해결한 사람 맞나?
“그리스 사태를 꼭 해결하지 않아도 된다니요?”
“어차피 그리스는 두 손 들게 되어 있습니다. 버티는 것도 한 3~4년이면 바닥을 드러낼 테니까요.”
“그건 그렇지만, 그동안 은행들이 버티는 게 문제입니다.”
“돈을 안 쓰면 되죠.”
“그건 또 유럽중앙은행이 주는 쪽으로 기울어서 힘듭니다.”
“그럼 유럽중앙은행을 안 주는 쪽으로 기울이면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네?”
“아니, 그게. 지금 유럽중앙은행을 대표하는 게 꼭 독일 같아서 드리는 말인데요. 아, 오해는 마십시오. 독일이 꼴 보기 싫어서 드리는 말은 아닙니다.”
“아, 네.”
재준의 말에 올랑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꼴 보기 싫은 거 맞는데.
도대체가 정이 안 가는 놈들이라니까.
프랑스와 독일.
길게 역사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보불전쟁, 1차 2차 세계대전, 뭐 이 정도만 이야기해도 앙숙인 건 맞다.
“유럽중앙은행이 너무 독일이 몰고 가는 것 같아서 말이죠. 이번이 마지막이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하면서 벌써 몇 번이나 그리스에게 돈을 퍼 주는지. 원, 은행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아주 못마땅합니다.”
“아, 그건 그렇습니다.”
그렇긴 뭘 그래?
그리스에 돈을 퍼 주자고 제일 먼저 주장한 게 프랑스면서.
사실 프랑스가 그리스를 도와주려고 주장한 건 아니다.
독일이 안 주겠다고 하니까 주자고 한 거지.
독일이 주겠다고 했으면 주지 말자고 했을 거면서.
어쨌든,
“그래서 프랑스가 유럽의 돈을 쥐고 흔들면 어떻겠습니까?”
“프랑스가요? 그게 가능합니까?”
“그럼요. 바로.”
재준이 말을 하다 멈추고 올랑도 대통령을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사라크와 산타떼, ABC암로를 합병하는 겁니다.”
“은행 합병?”
“그럼 독일이 더 이상 나대지, 아니, 유럽중앙은행이 자기 것인 양 나서지 못할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올랑도 대통령은 미간을 좁히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지금 말한 은행들은 전부 각 나라 대표은행이고.
이들이 뭉치면 거대 은행이 탄생한다.
그리고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가 하나가 되어 힘을 발휘한다?
하나가 되어?
이건 정말 탐나는 제안인데.
하지만 꼭 프랑스 말을 듣는다는 보장은 없잖아.
“좋긴 한데. 은행장이 셋이나 있고 나라마다 사정이 있을 겁니다. 의견을 하나로 뭉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 그건 염려 마세요. 세 은행이 합병하면 투마로우가 지분을 가장 많이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올랑도는 다음 말에 마른 침을 꼴딱 삼켰다.
그리고 뭐?
“투마로우가 프랑스랑 친하잖아요. 하하하.”
우리랑 친하다고?
“저, 꼭 못 믿는다는 표정을 지으시네요.”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대통령님, 아시겠지만 프랑스에 투마로우 자산이 꽤 많이 있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농장들도 꽤 많고. 나쇼날파리은행 지분도 가지고 있는 거로 알고 있습니다.”
“네, 근데 스페인이나 네덜란드에는 저희 자산이 별로 없습니다. 그럼, 제가 지켜야 하는 곳은 프랑스 아니겠습니까? 프랑스가 휘청이는 것은 바로 투마로우가 휘청이는 겁니다. 전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음.
고개를 끄덕이는 올랑도 대통령은 마지막 한 가지가 맘에 걸렸다.
“혹시 프랑스 자산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건 아닐지…….”
“네? 그걸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 반대죠. 유럽 각국의 자산이 프랑스로 들어오겠죠. 유럽연합 화폐는 유로입니다. 유럽 어디로든 흐름이 자연스럽죠. 그럼, 한 가지만 묻죠. 대통령님은 돈을 맡기실 때 어디다 맡기실 겁니까? 큰 은행? 작은 은행?”
“아.”
이해됐다.
각국의 국민뿐 아니라 기업들과 국가들도 믿음이 가는 은행으로 돈을 맡길 것이다.
“이제 세 은행의 합병이 프랑스에 왜 필요한지 아셨지요.”
“알겠습니다. 합병에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하하하하.
웃음이 절로 나오는 걸 참지 못한 올랑도 대통령이었다.
지금까지 독일이 주도하던 유럽은 프랑스가 주도하게 될 것이다.
재준은 올랑도 대통령의 흡족한 미소를 보고 빙글 웃었다.
좋단다.
자, 이렇게 되면 전문 투자은행 자리가 비잖아.
여기다 클레이스를 슬쩍 끼워 넣으면 완벽한 은행이 탄생하는 거지.
얼반 그룹이나 DSBC보다 더 큰 은행이.
이거 이제 난 쉬어도 되는 거 아냐?
그럴 리가.
띠리리링.
“응, 퀴니코.”
-언제 오십니까? 폴 라이레놀이 보스를 기다립니다.
“이야기가 잘됐나 보네.”
-제가 누굽니까? 연방상품선물거래위원회(CFCT)를 전부 뒤져서 예산 낭비 흔적을 찾아 라이레놀에게 보여줬죠. 노발대발하던데요.
“좋아, 이제 네덜란드랑 영국을 들렀다 갈 테니. CFCT에 같이 들어가자고 해.”
-알겠습니다.
“그리고 공화당 클라우드 상원 의원에게 내 말 좀 전해줘.”
-알겠습니다.
재준은 퀴니코에게 클라우드 상원 의원에게 전할 말을 들려주고 통화를 끝냈다.
당분간 공화당이 붙들고 있을 거고.
유럽 일을 빨리 처리해야겠는데.
***
금융소비자보호청.
민주당이 야심 차게 만든 새로운 기관.
엘리자베스 소렌 민주당 상원 의원이 신설을 주장했으며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로 탄생했다.
목적은 하나 ‘타도 월스트리트’다.
도드프랭크법을 위반하는지 눈에 불을 켜고 밤낮으로 월가를 감시하는 기관.
“투마로우만 잡으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힘이 듭니까?”
소렌 상원 의원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회의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나이를 짐작하게 하는 백발과 코 위에 얹힌 은테안경이 매서움을 더했다.
“투마로우가 아직은 도드프랭크법을 위반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투자은행 전체가 조용합니다.”
“임재준 어디 있는데요?”
“유럽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유럽 어디?”
“거기까진 아직 모르겠습니다.”
후.
흘러내린 안경테를 손가락으로 밀어 올린 소렌 상원 의원은 금융소비자보호청장 로버트를 노려봤다.
노려본다고 모르는 걸 알게 되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속이 풀리지 않았다.
“프랑스와 영국이 이미 임재준의 계열사들이 즐비한 곳으로 변했는데 미국만 감시한다고 투마로우가 잡힐 것 같습니까? 돈이 영국으로 흘러가고 거기서 프롭 트레이딩을 한다면 우린 그냥 구경만 해야 하느냔 말입니다.”
“해외 송금까지는 저희가 어쩌지 못합니다.”
이. 멍청이.
“내 말이 그게 아니잖아요.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미국에 투자은행 행위를 하면 어쩔 겁니까?. 미리 손을 써야 하는 거 아닙니까?”
“의원님, 솔직히 지금 인원으로는 손이 모자랍니다.”
“그럼, 사람을 더 뽑으면 되잖아요. 널린 게 사람 아닙니까?”
“그게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지금 예산으로는 정말 빠듯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예산?”
소렌 상원 의원은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접니다.”
-네. 의원님.
“이번 예산안에 금융소비자보호청 예산을 100% 증액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뭐가 이리 쉬울까?
이때 금융소비자보호청에 대한 정부의 의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물론 대통령 직속인 예산관리처가 예산을 작성해서 올린다고 의회에서 통과된다는 보장은 없다.
아, 미국에서 예산에 대한 작성과 집행은 정부가 제출한다고 해도 법적 효력이 없다.
반드시 의회의 승인이 필요하다.
어쨌든 지금은 민주당 세상이니까 우격다짐을 하든 딜을 하든 해서 예산을 통과시킬 자신이 있었다.
“됐습니까?”
소렌 상원 의원의 차가운 목소리에,
“네.”
대답은 했지만, 청장의 얼굴에 그늘이 가시진 않았다.
저게 의회를 거쳐서 여기까지 오려면 5개월은 걸릴 텐데.
이때, 소렌 상원 의원 사람 하나가 들어오더니 귀에 대고 무언가 속삭였다.
“뭐? 재무회계기준위원회(FASB)안이 받아들여졌단 말입니까?”
“네, 공화당 전체가 똘똘 뭉쳤고 민주당 다수 의원이 찬성표를 던졌답니다. 87대 7, 기원 6으로 마무리되었습니다.”
이제부터 기업 CEO의 스톡옵션이 회계 처리되게 되었다.
“이건 또 무슨 일이지?”
뭔가 이상하다.
이건 공화당 내에서도 반대하던 일인데.
민주당이 ‘타도 월스트리트’를 부르짖고 있으니 공화당은 당연히 친기업 성향을 띄어야 맞다.
근데 반기업 성향의 회계 처리 기준을 찬성했다?
“공화당 쪽에서 주도한 사람이 누굽니까?”
“앨런 심슨입니다.”
앨런 심슨이라니.
15년 전 자신의 기업을 인수당하고 정치인이 되어 기업 잘되는 일이라면 민주당, 공화당을 떠나 초당적으로 반대하는 상원 의원.
“하, 참나. 그 사람이 민주당을 다 도와줄 때가 있네요.”
“근데 의원님.”
“네.”
“앨런 심슨이 윌켄을 자주 만났다고 합니다. 그 이후로 공화당 쪽에 로비가 시작되었고. 결국, 이런 결과를 만들었다고 합니다.”
“뭐요? 윌켄? 그럼 투마로우가 나섰다는 말이네요.”
“그렇게 봐야 하지 않을까요.”
소렌 상원 의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로비를 왜 그쪽에다…….
설마, 교환하자고 하는 건가?
아니면 민주당에 손을 내미는 건가?
“윌켄 외 임재준의 다른 팀원들, 뭐 하는지 조사해 볼 수 있을까요?”
“의원님, 그건 좀…….”
주변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아, 사람들.
“아닙니다. 그냥 두세요.”
말은 하고 눈빛은 밖으로 향했다.
무언가를 지시하는 듯.
가서 알아보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네.”
소렌 상원 의원은 약간 찜찜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떨쳐 냈다.
임재준. 무슨 속셈인지 모르지만, 기업인과 정치인은 달라.
투마로우는 정부에 고개를 숙여야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