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2화 꼭 뭘 모르면서 설친다니까(3)
산타떼은행.
에밀리아노는 부쩍 수척해진 얼굴로 재준을 맞았다.
“어서 오세요. 임재준.”
“아, 예.”
어유, 사람이 확 달라졌는데.
“끼니는 잘 챙겨 먹고 있는 겁니까? 아무리 그리스가 날뛴다고 해도 산타떼가 무너지기야 하겠어요?”
“그리스…….”
아이고.
에밀리아노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뒷못을 잡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리스만 생각하면 떠오르는 놈이 하나 더 있어요.”
그리스보다 더 죽이고 싶은 놈들이 일본놈들이야.
에밀리아노는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 같이 주먹을 쥐고는,
“글쎄, 그 일본 놈들이 뒷돈을 대준 시리자 정당이 제1야당이 됐습니다. 여당과 득표율이 1%밖에 차이가 나지 않았어요. 이게 말이 됩니까. 일본을 가만두지 않겠습니다. 이번 사태만 진정되면 필히 책임을 물어 국제 사회에서 매장해버릴 겁니다.”
“어우, 진정하세요. 아직 할 일이 태산인데 너무 힘 빼시는 거 아니에요?”
스페인 사람들이 열정적이라더니.
화도 열정적으로 내네.
“그리스 발행 채권 만기 연장이 도대체 몇 번인지 모르겠다니까요. 거기다 유럽중앙은행이 나서서 부채를 50% 탕감해 줘야 한다고 난립니다, 난리. 나 원 참.”
“탕감이요?”
“그렇다니까요.”
탕감은 안 돼.
빌려준 돈은 끝까지 받아내야지.
“유럽중앙은행이라……. 에밀리아노, 유럽중앙은행에 큰소리 좀 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 그리스 채무를 탕감해 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당연하지요. 안 됩니다.”
좋아, 좋아.
짝.
재준이 손과 손을 맞잡았다.
“이 기회에 산타떼와 사라크를 합치죠.”
“네? 합치자면, 합병을 하잔 말입니까?”
“네, 거기에 ABC암로는 덤으로 끼워 넣고.”
“ABC암로까지?”
“생각해 보세요. 유럽중앙은행 각국의 출자를 보면 독일이 21.5%, 프랑스가 16.6% 스페인이 9.6%, 네덜란드가 4.7%잖아요.”
아!
에밀리아노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보이시죠. 힘의 균형이 무너지는 소리가.”
“합병하고 각국의 중앙은행에 목소리를 높인다. 이거군요.”
“그렇죠. 그리고 초거대 유럽은행의 탄생은 각국에서 지금보다 더 큰 보호를 받게 될 겁니다. 부도라도 나면 그 여파가 그리스 국가 부도보다 더 클 테니까요.”
“오호.”
이거야말로 기발한 해결책이다.
프랑스의 사라크방크는 여신이 최대이고 산타떼는 유럽 시총 1위이다.
거기에 60여 개국에 지점이 있는 ABC암로가 합쳐지면 국가를 위협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다.
이 정도면 유럽중앙은행에서 그리스에 대한 강력한 개혁안은 물론 부채 탕감은 언감생심 꿈도 못 꾸게 할 수 있다.
그뿐인가? 일본에 대한 천문학적인 손해배상 소송도 가능하다.
그러나 과연 누가 초대 행장을 하느냐인데…….
내가 하면 안 될까?
“총재는 각 은행장이 3년씩 번갈아 하는 게 합리적이겠지요.”
합병을 많이 해본 이라 다르군.
금방 핵심을 집고 들어와.
하지만, 문제가 없지는 않은데.
“에밀리아노, 먼저 3년 하세요. 얼굴에 다 쓰여있어요.”
흠, 흠.
“이거 쑥스럽네.”
그리고 또 걱정이 되는 건,
“내분이 일어나진 않을까요?”
“그럴 일이 없게 만들어야죠.”
“어떻게?”
“합병은행 주식 45%는 투마로우가 보유합니다. 그리고 세 은행이 지분만큼 투마로우 지분 30%를 나누어 확보하는 겁니다. 그러면 은행 안 내부 세력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은행 세 곳의 크기가 투마로우 한 개보다 못하단 말씀입니까?”
“정확하게 그렇진 않죠. 이미 사라크는 투마로우 계열 은행입니다. ABC암로 주식의 30%도 투마로우가 보유하고 있고요.”
“프랑스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야 프랑스 가서 해결해야죠.”
사라크방크는 프랑스의 손에서 떠난다.
그리고 꼭 이게 프랑스의 손실은 아니다.
어차피 통화는 유로로 통일되어 있으니까.
언제든 이용할 수 있다.
음.
다 좋다.
에밀리아노는 머리로는 이보다 좋을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은행이 사라지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뭐 또 고민거리가 있으십니까?”
“고민이라기보단 안타까움이라고 할 수 있겠죠. 역사 속으로 사라지니까.”
하, 이거 내가 제일 싫어하는 걸 해야 하네.
“좋아요. 그럼 이름을 남기시죠. 산타떼사라크암로은행으로.”
이야 내가 말하고도 짜증이 확 난다.
이름이 저게 뭐야?
근데 저거 사라크 대통령 이름이 가운데 턱 하니 있으면 기분 나빠하지 않으려나.
하하하.
재준의 말에 에밀리아노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
자, 이제 프랑스로 가 볼까.
***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
페렐라와 위서스틴은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 회장 앤서니 진스버그와 마주 앉아 있었다.
도드프랭크법이 금융권만 강타한 건 아니었다.
진스버그도 많이 지쳐 보였다.
“도드프랭크법 때문에 저희도 골치를 썩고 있습니다.”
은행 투자가 자유롭지 못하니 기업들도 투자은행 이용에 애로사항이 많았다.
기업들은 자금이 부족할 때 채권이나 신주를 발행해야 한다.
특히 채권 언더라이팅은 기업 입장에서 꼭 필요한 사항이었다.
투자은행의 채권 언더라이팅은 주로 프롭 트레이딩으로 이루어지니 자기자본 3% 안에선 도저히 불가능했다.
언더라이팅은 투자은행이 채권을 발행해 주고 발행한 채권을 사서 만기까지 가지고 있다가 약간의 수수료(스프레드)를 붙여 돌려주는 것이다.
근데, 프롭 트레이딩이 묶여버렸다.
은행 자산이 100억 달러라면 3%인 3억 달러 안에서 언더라이팅을 해주어야 한다.
이 정도 금액이면 중견 기업 하나 언더라이팅 해 주면 자금이 바닥나 버린다.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에 속해 있는 미국 200대 기업들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정부가 규제를 해도 너무 과도하게 하고 있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상황.
이런 때에 투마로우에서 찾아왔으니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투마로우에서 나서겠습니다.”
이렇게 말해 주니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
“말만 하십시오. 저희가 적극 돕겠습니다.”
“일단 도드프랭크법 중 두 개 조항을 사라지게 할 겁니다.”
“두 개 조항이 뭡니까?”
“소액주주들의 사외이사 추천권과 포지션리미트입니다.”
“아하, 저도 기업을 경영하지만, 소액주주들의 사외이사 추천권이란 정말…….”
기가 차지.
사외이사란 다들 알겠지만, 주주총회 때 의사를 결정하는 이사회의 이사를 회사 외부에서 선임한 사람들이다.
원래 대표자 포함 이사 3인 이상인 법인이 선임 할 수 있다.
사외이사는 경영진의 독단을 막고 내부거래를 감시해서 주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을 한다.
근데 사외이사는 좋은데 그 앞에 ‘소액주주’란 말이 거슬린다.
소액주주들이 사외이사를 추천한다고?
좋다. 뭐 훌륭한 인사를 추천하면 좋지.
근데 폴 시그널 같은 놈을 추천하면 어쩌려고?
주주들을 위해 기업을 홀라당 벗겨 먹을 텐데.
배당 왕창 받아 챙기고 주식까지 팔고 떠나면 그땐 어떡하냐고.
그리고 소액주주들이 어떤 기준으로 사외이사를 추천하냐고.
그 기준에 해당 기업이 관여는 할 수도 없을 텐데.
후.
진스버그가 깊은 한숨을 쉬자, 워서스틴이 거들었다.
“은행 입장에선 포지션리미트가 더 심각합니다.”
여기서 포지션리미트는 원자재 시장에서 25% 이상 점유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 조항이다.
석유나 사탕수수 같은 원자재를 대량 매집해서 가격을 올리는 봉이 김선달식 사업을 하지 말라는 의미다.
사실 이건 매우 합리적인 조항이지만 이걸 상품선물에도 적용한다는 게 문제이다.
선물은 숫자에 불과한데 여기에 왜 제한을 두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럼, 정말 평온한 옵션 시장이 온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때, 비즈니스 라운드 테이블을 대표하는 변호사 유진 스캘리아가 도착했다.
“좀 늦었습니다.”
“어서 오세요. 연방대법원 판사 아드님을 보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투마로우와 일을 하게 되어서 기쁩니다.”
진스버그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투마로우가 온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월가에서 잔뼈가 굳은 유진 스캘리아에게 연락을 취했다.
모두 한 차례씩 악수를 하고 앉았다.
“투마로우 입장을 알려드리겠습니다.”
페렐라가 지금까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두 조항을 폐기하잔 말이군요. 저희도 나름 조사하겠지만 인수 가격 산정의 천재 페렐라라면 생각해 주신 것이 있을 것 같은데요?”
페렐라가 무엇인가 계산을 하더니,
“제가 생각하는 것은 소액주주들의 사외이사 추천권은 기업들에 효용 대비 과도한 비용을 안기는 자의적인 조항으로 몰아붙이면 어떨까 싶습니다.”
“괜찮은 생각입니다.”
만약 임시주총이 열리지 않고 정기주주총회만 열린다면, 1년에 한 번 출석하는 이사회에게 매달 자문료를 지급하는 건 좀 불합리하긴 하다.
다른 은행이면 몰라도 미국 200대 기업에 들어있는 투자은행들의 자문료는 형평성을 고려해 기존 자문들과 비용을 맞추어야 하는데.
말도 안 되지.
꼴 보기 싫은 놈들에게 매달 최소 10만 달러는 지불해야 할 텐데.
진스버그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할 일을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소송을 준비하는 동안에 우린 연방증권거래위원회(SEC)를 만나 시간을 끌겠습니다. 최소한 18개월 이상은 가능할 겁니다.”
윗선에 로비를 하겠단 말이다.
“그 정도 시간이면 저희 변호사들에게 충분할 것 같습니다.”
소액주주들의 사외이사 추천권은 연방증권거래위원회(SEC)에서 각 은행에 전달하고 시행을 감독해야 한다.
진스버그는 페렐라와 변호사가 공격을 준비할 시간을 벌어줘야 했다.
소송 전에 이사를 추천해 버리면 빼도 박도 못한다.
만약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그만 나가 달라고 할 수도 없고 월급을 안 줄 수도 없고.
이사 월급이 한두 푼도 아니고.
“이사회 추천권은 기업에 손실을 입히니까 그 점을 공격하면 되지만, 문제는 포지션리미트는 기업에 손실을 입히는 조항이 아니라는 겁니다. 오히려 큰 손실을 막아 줄 수 있는 장점도 있습니다.”
스캘리아 변호사의 말에 워서스틴이 받았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연방선물거래위원회(CFTC)에 이 규제의 필요성에 대한 결정적인 증거를 제시하라고 몰고 가는 건 어떨까요?”
어라?
“그거 괜찮네요. 우리가 오히려 대답을 듣는단 말이죠?”
“그렇죠. 그리고 은행들과 연합하여 부채부담보증권(CDO)가 볼커룰에 적용이 되는 건지 물어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오, 그것도 괜찮네요.”
볼커롤은 프롭 트레이딩, 즉 은행 자산을 이용한 매매를 금하는 조항이다.
그리고 부채담보부증권은 은행의 BIS 부담을 줄이기 위해 만들어졌다.
기억나는가?
SS전자에게 1억의 부채를 발생시키고 혹시 SS전자가 부도가 나면 부채를 은행에 대신 갚아주는 증권.
가격은 1억의 8%인 800만 원.
그러니까 CDO는 은행 부채 회피 상품으로 은행은 꼭 필요한 상품인데 고객의 돈으로 사고팔 수 없으니 프롭 트레이딩으로 하겠다는 의미다.
아마 이것만 하더라도 족히 2년은 법정 싸움으로 몰고 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