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겁 좀 내면서 일하죠. 그래야 될 것 같은데(11)
조용~~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오정국 대표가 일을 맡긴 제2대부업체에서 그런대로 주먹 좀 쓴다는 애들을 대기 시켰는데.
어째 반응이 싸했다.
쩝.
재준이 좌우로 눈알을 굴리는 오정국을 향해 떫은 입맛을 다셨다.
“오정국 사장님. 대단하시네요. 내가 살다 살다 이런 인간을 두 번씩이나 겪다니. 예전에 대한 그룹 박 회장이 그러던데. 오 사장님도 액션 느와르 정말 좋아하시나 봐요. 좋아하는 건 그렇다 치고, 실제로 느와르를 찍겠단 생각은 어떻게 할 수 있는 겁니까?”
여기.
재준이 핸드폰에서 사진 하나를 띄워서 오정국에게 보여줬다.
무지막지한 장면을 연출하고 서 있는 천 실장이 보였다.
대략 17대 1을 거뜬히 해결한 듯.
“사진 몇 장이 더 있는데. 오우, 그쪽은 블랙워터 애들이 사고 친 장면이라. 특전단 무기가 장난이 아니라 오정국 사장님 아이들 상태가 아유, 끔찍해. 아마 평생 뭐에 의존해서 살아갈 것 같은데. 공기 탁한 곳 들어갔다 나오시면 애들 좀 잘 돌봐 주세요.”
오정국의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고 입까지 벌린 상태로 재준을 쳐다봤다.
“내가 충고 하나 하는데. 투자든 싸움이든 좀 알아보고, 응, 연구하고, 세심하게 계획이란 걸 짜서 덤비면 좋겠는데. 너무 막무가내야.”
쯧쯧.
재준이 혀를 차며 오정국을 스쳐 가자 지켜보던 대부업체 사장들은 고개를 푹 숙였다.
재준은 그들을 지나쳐 스티븐 앞에 섰다.
“얘기는 다 들었지? 외화은행 주식부터 카드 회사 부실채권 1조 6천억 원, 역삼동 L타워, 여의도 부동증권 빌딩, SKQ 빌딩, 그리고 한강여신 등등 잘 정리해서 가져와. 오늘 중으로. 발표는 내일 아침 우리가 할게. 당분간 신용등급이 하락한 채로 고생 좀 하고. 이게 다 자업자득이잖아. 아, 한국 고사성어를 모르려나?”
말을 마친 재준은 두리번거리며 폴 시그널을 찾았다.
어라? 이놈 어디 갔어?
“폴 시그널 벌써 튄 거야?”
“조셉과 통화 중일 때. 이미.”
“와, 역시 얍삽하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구나. 월가에서 웬만하면 마주치지 말라고 전해 주고. 그러게 믿지 말라니까. 아니면 돈이 많든가.”
재준이 돌아서서 가려는데 스티븐이 붙잡듯 입을 열었다.
“하나…….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재준이 돌아서서 궁금한 표정을 지었다.
“뭔데?”
“어디서부터 알고 있었습니까?”
“2003년.”
“말도 안 됩니다. 그때는 인수의향만 있었고 아무런 계획이 없었습니다.”
네 경우에는 그렇지.
넌 키매니저가 아니니까.
“과연 조셉에게도? 조셉이 왜 지금 나랑 통화하면서 한국 자산을 포기했는지 알아? 그까짓 10억 달러 어떻게든 마련할 수 있는데 말야. 안 그래? 로우스타 자산이 얼만데.”
“신용등급 하락을 감수할 만큼 임재준 당신이 무서운 건가요?”
“에이, 거, 말도 안 되는 소릴. 내가 왜 무서워. 하지만 조셉이 두려워하는 건 하나 있지. 퍼시픽 골프 클럽.”
오우, 이거 때문에 퀴니코 정말 개고생했어.
“그게 무슨 소리죠? 퍼시픽 골프 클럽은 2005년에 로운스타가 지분 65%를 사들인 벨기에 법인일 뿐입니다.”
“2005년. 그렇지. 너는 그렇게 알고 있지. 근데 조셉은 다르게 알고 있거든. 2003년 로운스타는 이미 퍼시픽 골프 클럽을 소유하고 있어서 산업자본으로 분류돼 있었어. 그래서 한국에서 외화은행 인수 승인이 나지 않았던 거야. 근데 2003년에 금감원이 대주주의 자격을 인정하네. 신기하지. 그리고 네가 알고 있는 것처럼 2005년에 퍼시픽 골프 클럽을 사들였다네. 이게 무슨 해괴한 소리야. 이미 보유하고 있던 걸 다시 사들인다는 게. 신기하지 않아?”
스티븐의 눈빛이 게슴츠레하게 변했다.
이게 뭔 소리지?
2003년에 사 놓고 2005년에 또 샀다고?
주식이라면 공지 시스템이 있기 때문에 2년 늦게 공지하는 건 불가능한데.
그럼.
재준은 스티븐의 표정에서 뭔가 알아차린 걸 눈치챘다.
“그래, 이제 알겠지? 2003년에 퍼시픽 골프 클럽 소유주가 바뀐 거야. 로운스타는 이 사실을 숨겨온 거고. 그리고 2003년 외화은행 인수 승인이 나자 2005년에 다시 사들이지. 2년간 누가 퍼시픽 골프 클럽을 가지고 있었을까? 자그마치 자산규모 3조 7천억짜리 기업을.”
“누굽니까?”
“그건 나도 모르지. 하지만 65%의 주식을 인수했으니까. 2조 4천억의 돈을 누군가에게 헌납했다는 건 알지.”
“외화은행이 그만한 가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럼, 궁금하지.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자, 그럼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온갖 모순투성이를 보여주면서 로비를 통해 억지로 인수를 강행한다면. 그리고 누군가는 그 모순을 지적한다면 인수는 늘어질 테고. 어쩌면 실패할 수도 있어. 스티븐, 어떻게 생각해? 조셉이 노린 게 이건데.”
“무슨 소립니까? 실패를 왜 노려요?”
“이런 덜떨어진 놈. 우린 윌가의 뱅커라니까. 우리 같은 투자은행에겐 ISDS가 있다고? 한낱 기업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 수 있잖아. 그럼 국가는 중재를 기다리다 결과를 얻는 게 나을까, 중간에 협상하고 대략 50% 승리를 하는 게 나을까?”
“만약 패소했을 때를 대비한다면 절반의 돈을 주고 협상을 하는 게 나을 겁니다.”
“그렇지. 바로 그거.”
“그럼 조셉이 한국을 상대로 ISDS를 실행한다고요? 로비와 주가조작 같은 비열한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며?”
“뭐라는 거야? 넌 월가 뱅커 아냐? 뭘 새삼스럽게 그래? 그런데 조셉이 나를 두려운 게 무얼까?”
“투마로우의 자금력 아닙니까? 적대적 인수를 단행할 수도 있으니까요.”
“아니, 아니야. 그럼 월가의 하이에나들이 주가를 더 올리기 위해서 내 돈을 다 뜯어 먹을 거라고 그런 멍청한 짓을 내가 왜 해? 그보다 방금 말했잖아. ISDS.”
“투마로우가 한국에 ISDS를 진행해 봐야 로운스타는 타격이 없습니다. 당사자가 아니잖아요?”
“누가 한국에게 ISDS를 건대. 로운스타가 있는 나라에 걸어야지.”
“설마. 미국을 건드리는 겁니까?”
“맞아. 그 정도는 돼야지. 난 미국을 상대로 ISDS를 걸 거야. 물론 난 지겠지. 소송비용 1억 달러 정도 날려도 상관없지, 뭐. 하지만 시간은 끌 수 있어. 그리고 미국의 시스템을 낱낱이 공개할 수도 있고. 그럼, 이 단초를 제공한 조셉이 월가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임재준!
누구나 머릿속으로 생각한 걸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는다.
지나가는 사람이 맘에 안 들어서 한 대 때리고 싶다고 직접 주먹을 휘두르는 멍청이는 없단 말이다.
미국을 상대로 ISDS를 거는 무모한 놈은 없다.
하지만 임재준은 마치 당연히 할 것 같은 표정으로 스티븐을 쳐다봤다.
“조셉의 생각이 그래. 난 블록을 통해 조셉에게 경고한 거고. 내가 미국을 상대로 ISDS를 걸면 연준부터 재무부까지 나서서 로운스타를 갈기갈기 찢어 버릴 거라고.”
물론 솔직히 이 아이디어는 블록이 낸 거다.
진정한 진흙탕에서 살아남으려면 물을 더 거세게 흔들어야 한다고.
잔잔한 호수에 흙 한 줌 던진다고 흙탕물이 되지 않는다.
저 밑바닥을 마구 휘저어야 한 군데 남김없이 진흙탕 싸움이 시작된다고.
“알겠니, 스티븐.”
“미친놈.”
“내가 아니라 조셉이라니까. 난 아직 시작도 안 했어.”
“넌 정말 미친놈이야. 조셉은 겁을 먹은 거야. 그래서 한국 자산을 포기한 거고. 넌 진짜 할 거니까. 당연하게도.”
“그럼, 이제 의문이 해소된 건가?”
스티븐은 재준을 노려봤다.
“아무리 내가 물었지만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해 주는 이유가 뭐지?”
“뭐겠어, 뻔하잖아. 포기하라고. 너 따위는 나한테 적수가 되지 않는다고. 알겠니?”
“언젠간 조셉이 너를 칠 수도 있어.”
“하하하, 하라 그래. 해야지 재밌지 않겠어? 하지만 지금은 너희는 벌벌 떨고 있잖아. 미래의 싸움으로 서로 위안이나 삼으라고.”
재준은 스티븐의 어깨를 두드리고는 변호사와 함께 회의장을 떠났다.
혼자 남겨진 스티븐은 재준이 남겨놓은 말을 곱씹었다.
***
며칠 후.
한국 국민들은 신문에 난 기사를 보고 기겁을 했다.
[투마로우는 외화은행 인수 과정에서 한국 정부가 절차를 무시하는 법 집행으로 손해를 입었다며 세계은행에 중재를 요청했다]
-이게 뭐야?
-뭐긴 뭐야. 신문에 나왔잖아. 세계은행에 한국을 고발한 거야?
-고발? 여긴 중재라고 나와 있는데.
-중재가 고발이야. 국가를 고발한다고 하면 좀 그렇잖아. 표현을 완화한 거지. 하지만 고발한 게 맞아.
-아니, 왜 자기 나라를 고발해?
-야, 임재준이 그냥 고발했겠냐? 무언가 구린 냄새가 나니까, 한국 법원은 믿지 못하겠으니까 고발한 거지.
-이상하잖아. 외화은행은 로운스타에게 샀으면서 갑자기 한국은 왜 고발해?
-거 참, 거기 나와 있다니까. 로운스타 대표 최광수 외화카드 주가조작 사건을 대충대충 해치웠다고. 그리고 원래 로운스타는 외화은행 인수 자격이 없는데 금감원이 대주주 자격을 주었다잖아. 이걸 국내 법원에 소송을 걸면 똑바로 하겠냐고.
-야, 이거 무서워서 기업 하는 일에 정부가 나서겠나?
-똑바로 하라는 거지. 똑바로. 그리고 이거 봐.
[투마로우는 산하 대부업 대표 횡령과 배임 협의로 금감원 조사 의뢰. 협의가 드러나면 검찰에 사건을 송치한다고 발표]
-임재준은 정말 자기 식구라고 봐주지 않아.
-그러게, 가차 없이 잘라버리네.
-투마로우 이름에 흠집이 나든 말든 감추는 법이 없어.
-이것도 그런 거네.
[투마로우는 로운스타로부터 인수한 카드 회사 부실채권 1조 7천억 원으로 카드 회사에 경고]
-그렇지. 1년 안에 안 갚으면 회사 임원진들 다 잘라버리고 다른 카드 회사와 합병해 버린다잖아.
-카드 회사 살 떨리겠네.
-그러게. 정부가 현금서비스 한도를 폐지하고 신용카드 소득공제 제도 해 준다는 이유로 인구 5천만인 나라에 상환능력도 없는 인간들한테 1억 장 넘게 카드를 발급해 주겠냐고.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와 똑같네.
-그렇지, 그러니 임재준이 열 받아 안 받아.
-그나저나 법원도 법원이지만 금감원 난리 났겠는데.
***
금융감독원 원장실.
바른금융실천협의회 윤헌재 이사장이 상석에 앉아 각 금융기관의 장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의자 모서리를 탁탁탁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우리 변호인단은 구성이 되었습니까?”
“네, 국제변호사 자격을 가진 이들로…….”
“잠깐, 전부 한국인인가요?”
“미국 로펌도 알아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저 자신의 말에 로봇처럼 대답만 하는 게 못마땅했다.
“잘 들어요. 임재준 지금까지 상대한 그 누구보다 독한 놈입니다. 예전엔 머리 좋은 놈이었지만 이제 자금력도 갖췄습니다. 대충대충 할 생각을 버리세요.”
“네, 알겠습니다.”
또.
“앵무새같이 말만 하지 말고. 만약 이번에 변호인단에게 로비나 뒷돈 받은 사람은 내가 장담하건대 평생 이 바닥에 발도 못 붙이게 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런 빌어먹을 놈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