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겁 좀 내면서 일하죠. 그래야 될 것 같은데(9)
로운스타.
[투마로우 기존 금액보다 20% 더 주고 외화은행 인수 의사 있다]
스티븐이 신문을 탁자에 던지고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갑자기 투마로우가 왜 튀어나와?
임재준, 일을 왜 이렇게 꼬이게 만드냐, 외화은행에 뭐가 있다고.
이미 진행이 확정된 인수 건이라 일이 틀어질 리는 없다.
투마로우가 인수하려면 금융위원회의 승인이 필요한데 금융위원회가 바보가 아닌 이상 돈 좀 더 받겠다고 국제적인 위신을 모른 척하고 승인해 주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지금에 와서 여론을 부채질하는 것일까.
설마 내가 모르는 구석이 있는 건 아닐까?
윤 이사장에게 연락 한번 해봐야 하나?
그래, 저녁에 한번 연락해 보자.
후.
할 일이 태산인데.
스티븐은 책상에 앉아 오늘 스케줄을 확인했다.
이런, 채권 만기가 얼마 안 남았잖아.
오늘부터는 리파이낸싱 준비를 해야겠는데.
스티븐은 채권 리파이낸싱을 할 투자은행에 통화를 시도했다.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월가의 뱅커란 놈이.
이래서 먹고 살겠어?
딸깍.
-어, 어. 스티븐. 웬일이야?
“낮부터 연애질이냐?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어, 회의, 갑자기 누가 찾아와서. 근데 무슨 일이야?
“만기가 얼마 안 남은 채권이 있어서 리파이낸싱 하려고. 진행은 전에 하던 대로 하고 주간사는…….”
-잠깐, 스티븐. 로운스타 채권 발행은 좀 기다려야겠는데.
뭐? 기다리라고?
“무슨 말이야? 늘 하던 일인데.”
-저, 그게 말이야. 로운스타 신용평가가 내려간다는 소문이 있어.
“우리가?”
스티븐은 직감적으로 뭔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
여긴 별문제가 없는데.
본사 쪽에서 손실이 발생한 건가?
“무슨 일인데?”
-본사에 직접 물어 봐.
“뭔데? 그냥 말해 봐. 알아야 대비를 할 거 아냐?”
-그냥 네가 물어봐. 일단 그렇게 알고. 끊는다.
툭.
스티븐은 멍하게 핸드폰을 바라봤다.
도대체가 일들을 어떻게 한 거야, 손실이 얼마나 크길래 신용평가를 다시 받아.
아, 머리야.
아스피린이 어디 있었지?
스티븐은 본사에 전화를 넣으며 책상 서랍을 뒤졌다.
-스티브, 마침 전화하려던 참이었어.
“조셉, 도대체 본사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그건 내가 너에게 물어봐야 하는 건데.
“저한테라뇨?”
-이번에 펠리컨매니지먼트를 끌어들여 투마로우랑 계약을 체결했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
“네, 맞습니다. 현재증권 주식과 일본과 한국의 대부업체 다섯 군데와 바꾸기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이 계약으로…….”
-정신이 있는 건가?
조셉의 고함에 스티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로운스타 사모펀드의 키매니저인 조셉이 화를 낸다는 것은 자신이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나타내는 것이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월가에서 공공연하게 도는 소문이 있어서 긴가민가했는데 사실이라니 어처구니가 없군. 어떻게 일 처리를 그렇게 하나?
“전 무슨 말씀이신지…….”
-투마로우가 사들인 일본 대부업체 본사 주식은 5천만 달러도 안 돼. 근데 자넨 15억 달러를 주고 계약을 체결한 거야. 이 미친 계약이 월가에 파다하게 퍼져서 신용평가 회사들이 지금까지 한국에서 진행한 사업들을 다 다시 들여다보고 있다고.
“네? 5천만 달러도 안 된다고요?”
-투마로우가 인수한 가격도 알아보지 않고 일을 진행한 건가? 이건 너무 초보적인 실수 아닌가? 자네 미친 거 아냐?
말도 안 돼. 그때의 난 왜 그렇게 멍청하게 행동한 거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야?
신와대부인가? 아니면 현재증권?
왜 무턱대고 현재증권과 교환해야 한다고 생각한 거지?
-일단 목표는 투마로우가 가지고 있는 일본 대부업체를 인수하는 겁니다.
자신과 폴 시그널이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그리고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
그걸 위해 준비한 현재증권 주식 10%.
항상 같은 패턴의 움직임.
한 번도 이 패턴을 의심하지 않았다.
이게 투자은행의 포트폴리오라고 부르는 독자적인 행보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수습하겠습니다.”
-반드시 해결해야 해. 해결하지 않으면 너 혼자 끝나지 않아. 로운스타 전체가 리파이낸싱에 웃돈을 얹어서 발행해야 해. 손실이 1~2억으로 끝나지 않아.
“네.”
멍.
전화를 끊고 멍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저 시선을 고정한 채 무엇이든 생각해 내려고 했다.
똑똑.
“스티븐, 왜 그러고 있는 거야? 한국에서 실연이라도 당했나?”
폴 시그널이 들어오며 상태 안 좋은 스티븐에게 농담을 던졌다.
“폴. 큰일 났습니다.”
“무슨 일인데? 신용등급이라도 떨어졌어?”
월가에서 가장 무서운 일.
신용등급 하락.
금리뿐 아니라 채권 발행에서부터 대출까지 줄줄이 영향을 미친다.
기존 발행된 채권은 정크 본드가 된다.
“맞아요. 아니, 그럴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말을 해봐.”
“그게, 임재준, 그 새끼가 우릴 완전히 가지고 놀았어요. 그 자식이 일본에서 대부업 다섯 개를 겨우 5천만 달러에 샀다고 합니다.”
“뭐? 5천만 달러?”
“당장 계약을 취소해야겠습니다. 소송을 당하는 한이 있어도 취소해야 해요.”
“진정해. 스티븐. 소송으로 끝나는 문제가 아니라고. 월가에서 신용은 생명이야. 일방적인 계약 취소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 줄 알아? 정신 차려.”
“하지만…….”
계약을 취소하면 소송도 당하고 이후 월가에서 투명인간 취급 당한다.
당장은 신용등급이 내려가지 않지만, 신용 없는 투자은행에 일을 의뢰할 기업은 없다.
그렇다고 계약을 취소하지 않으면 월가의 조롱거리가 된다.
5천만 달러를 15억 달러를 주고 샀으니 자그마치 30배를 주고 산 것이다.
이건 투자은행의 수치이며 신용등급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야 한다.
“뭐가 내 손에 쥐여 있는지 먼저 살피라고. 계약을 취소하면 우리 손에 현재증권 주식이 남아. 다시 임재준과 딜을 할 수 있지. 그리고 계약을 진행하면 대부업이 남아. 임재준에게 복수할 기회가 생기는 거야.”
“당장 채권 만기인데 리파이낸싱을 할 수가 없어요. 로운스타가 무너질 수도 있습니다.”
“스티븐, 로운스타에 너밖에 없나? 너보다 월등히 뛰어난 조셉이 있다고. 그 사람에게 미뤄. 그가 해결할 거야. 그리고 넌 대부업으로 한국을 무너뜨리고 다시 부활하는 거지. 역경을 뛰어넘은 인물로 말이야.”
“저보고 로운스타를 등지란 말입니까?”
“그게 뭐? 로운스타가 중요한 게 아니라니까. 로운스타가 쓰러져도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나를 봐. 내가 있던 헤지펀드가 사라지고 나 혼자 펠리컨매니지먼트를 세워 여기까지 왔잖아. 뭐가 그렇게 두려운데?”
후, 후.
막상 로운스타를 버린다고 생각하자 스티븐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로운스타가 이 사실을 알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스티븐, 아직 너의 손엔 부실채권 1조 6천억 원, L타워, 부동증권 빌딩, SKQ 빌딩, 한강여신이 있어. 왜 그렇게 쫄아 있는 거야? 한국 내 자산을 돌려받기 전에는 너를 건드릴 수 없다고.”
음.
100% 장담은 하지 못하지만 50% 이상은 가능성이 있다.
시간이 많지 않지만 3년 안에 시그널과 국가 부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손해를 만회할 만큼 한국을 흔들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내가 옆에서 도와준다니까. 이번 거래를 펠리컨 이름으로 했잖아. 로운스타도 일단 어쩌지 못할 거라고.”
그렇지. 펠리컨 이름으로 계약했지.
스티븐은 거래 당사자 이야기가 나오자 살짝 시그널을 의심했다가 풀었다.
맞아. 당연한걸. 로운스타 이름으로 했다가 자칫 다 성공해 놓고 과거 죄를 물어 내쫓기는 수가 있지.
그게 최악의 경우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급적 빠른 시간 안에 임재준과 계약을 마무리 지어야겠습니다.”
“좋아, 내가 임재준과 계약 이행을 앞당겨 볼게.”
스티븐과 폴 시그널이 사그라드는 불꽃에 의욕이라는 기름을 부었다.
***
현재증권.
“그러니까 오늘 현재증권 주식과 대부업 주식을 맞바꾸러 온단 말이지?”
임병달은 현재증권 주식을 다시 찾아온다는 말에 약간 들뜬 억양으로 말했다.
“그렇다네요. 아직 정해진 날짜가 남았는데 빨리 가도 되냐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죠. 변호사가 계약서도 다시 다 정리했고요.”
“그놈들 급한 모양이구나.”
“급하죠. 망하게 생겼는데.”
망한다고? 갑자기 왜 망해?
갑자기 망하는 건.
“너 또 상대에게 무슨 짓을 했구나.”
“제가요? 아니에요. 제가 아니라 블록인데요. 그리고 월가에 이번 일을 사실대로 말했다고 했는데. 사실대로. 30배 이득을 봤다. 뭐 그렇게. 좀 과하게 여러 군데 떠들고 다니긴 했지만.”
“30배 이득? 지금 우리가 30배나 이득을 보는 거냐? 그걸 저쪽은 몰랐고?”
“안 물어보길래 말 안 했죠. 그렇잖아요. 그리고 그걸 내가 먼저 말하는 것도 우습잖아요. 자꾸 대부업체를 교환하자고만 하니 그런가 보다 한 거죠. 대부업으로 뭘 하려나 보네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하, 이걸 또 믿어야 한다니.
“그래? 그럼, 그렇겠지. 그런데 정말 30배씩이나 주고 대부업을 가져가면서 뭘 하려는 걸까?”
“뭐, 대단한 거 하겠죠. 30배 이득보다 훨씬 이득이 많은 거요.”
“음, 이야기를 좀 들어봐야겠는데. 역시 월가 놈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겠지.”
“그럼요. 월가인데.”
임병달은 하나는 정리했고 다른 하나가 문득 떠올랐다.
“정 행장이 이번에 외화은행 인수한다고? 너무 뜬금없는 말이던데. 무슨 생각으로 정 행장에게 일을 시킨 거냐?”
“그게…….”
재준이 은밀한 이야기를 하려고 임병달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게 한국 정부를 고소하려고요.”
“뭐? 고소?”
이제 하다 하다 자기 나라도 고소를 하네.
“자꾸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요. 외화은행이 왜 찍혔는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매각된다는 게 좀 찜찜해요.”
“그건 윤헌재 이사장이 짜놓은 덫에 걸린 거라고 알고 있다.”
“네? 누구요?”
윤헌재?
예전 초대 금감원장으로 나한테 바삭하게 털린 그 윤헌재!
이건 몰랐네. 윤헌재가 아직도 영향력이 있을 줄이야.
원래는 금감원을 잘 이끌고 2004년에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장관을 역임해야 했다.
하지만 재준이 금감원 임기 끝나기도 전에 몰락시켜서 그대로 정치 인생은 끝났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래, 윤헌재, 네가 없는 동안 윤헌재가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었다. 경제관료들을 규합한 거지. 재무부 출신들과 금감원 출신들을 기업과 경제계 곳곳에 추천하면서 이제는 거대한 하나의 세력을 넘은 흐름을 만들어 냈어. 독한 놈이었지.”
“이럴 수가.”
이건 생각 못 했다.
독한 놈이 되었다고?
나 때문인가?
이놈의 모피아, 금피아는 없어지질 않아.
아닌가? 이번엔 하나로 합쳐진 건가?
하여튼 돈 있는 곳에선 어떤 세력이든 기생하기 마련이니까.
“몰랐냐? 네가 모르는 것도 있구나.”
“전 또 금감원이 나선 줄 알았죠. 로운스타가 외화은행을 인수할 대상이 아닌데 금감원이 예외로 대주주를 허락한 거잖아요.”
“그렇지. 금감원 뒤엔 윤헌재가 있다. 하지만 너 때문인지 우리와는 상당한 거리를 두더라. 아예 말도 걸지 않아. 우리 자회사나 계열사에 그쪽 사람들은 청탁도 안 한다.”
“그건 잘됐네요.”
이때,
“로운스타와 펠리컨매니지먼트 도착했습니다.”
“그래요? 회의실로 안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