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1화 겁 좀 내면서 일하죠. 그래야 될 것 같은데(3)
재준이 김 의원의 말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퇴장 준비를 했다.
“저, 임 대표님.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어딜 가려고 하십니까?”
“집에 가려고요. 내가 필요한 것 같지도 않네요.”
“김 의원 말씀을 들으셨으면 그에 대한 의견을 해주셔야지요.”
“저 말에 내가 대꾸를 해야 한다고요?”
“당연합니다. 서로 의견을 주고받다 보면 어떤 합의가 도출되는 겁니다.”
합의?
재준이 가운데 있는 위원장을 의아한 듯 쳐다봤다.
“위원장님, 위원장님이라고 부르는 게 맞나? 암튼 내가 이런 개소리를 들을 만큼 한가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내가 질문을 했으면 그때 무슨 말인지 알아 처먹어야 정상 아닌가요? 국민들한테 겁 좀 내면서 일하죠. 그래야 될 것 같은데.”
말투 하고는 정말.
참자.
“김 의원이 한 말이 틀린 겁니까?”
“그럼 맞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딱 들어봐도 대부업체랑 짝짜꿍이 잘 맞으시는 분 같은데. 맞죠? 세상에 대부업체 부실 채권을 국민이 뽑아준 국회의원이 걱정을 다 해 준다고요? 우리나라 대단하네요.”
험, 험.
“아닌가? 아, 그렇구나. 근데 어쩌나. 뭐 아니겠지. 아니죠? 설마 대부업체에 뒷돈을 받은 건 아니죠? 아, 뒷돈이라면 어감이 이상하려나. 정치후원금. 그래, 정치후원금 받으신 건 아니죠?”
순간 정적이 감돌며 놀고 있던 카메라의 빨간불이 일제히 켜졌다.
드디어 터졌다.
찍어.
“아,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 이제부터 내 회사에서는 정치후원금 안 나갑니다. 이야, 39%라니. 국회의원들이 나를 위해 이렇게 열일해 주시는데. 대부업으로 돈 벌면 불우이웃돕기 성금이라도 듬뿍 내야겠는데요.”
-저게 무슨 말이야?
-내 회사라니? 대부업으로 돈을 벌어?
-임재준이 대부업에 진출한 거야?
재준이 위원장을 보며 어깨를 으쓱 들어 올렸다.
“거, 그냥 나가려니 뻘쭘한데 퇴장 명령이라도 내려 주시죠.”
“그게, 거.”
“어서요.”
“아, 네. 임재준 대표. 퇴장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재준이 밖으로 나오자 대다수의 기자들이 뒤를 쫓으며 질문을 쏟아냈다.
-아까 하신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대부업에 진출하실 예정입니까?
-투마로우가 대부업과 어울린다고 생각하십니까?
-한 말씀만 해 주시죠.
잠깐.
재준이 걸음을 멈췄다.
“궁금한 점이 많은 것 같은데 잠깐 짧게 말해줄게요. 조만간 발표하겠지만 이 시간부로 투마로우 산하에 있는 대부업체는 정부가 금리를 정하든 말든 상관없이 연 이자 20%로 대출을 할 겁니다. 대부업체 광고 전면 중단합니다. 꺾기대출 없습니다. 연체 시 복리 없습니다. 2차 대부업체에 부실 채권 팔지 않습니다. 빚을 돌려막기 위한 대출은 해주지 않습니다. 정말 피치 못할 사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대출 나갑니다. 또다시 외환위기 같은 국가 부도 사태는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상.”
대부업이 가진 불량한 수법은 다 걷어 내고 돈 안 갚을 만한 인간에게는 대출을 금한다.
이 기가 막힌 발표 후 재준이 앞으로 걸어가자 기자들이 마이크를 서로 들이밀었다.
-잠시만요. 잠시만요.
-국가 부도 사태라뇨?
-대부업체 이름이라도 알려주세요.
“아, 그러네. 이름은 알려드려야죠. 오리슨, 유프로서비스, 더케이트러스트, SBY, 신와대부 산하 대부업체들입니다. 진짜로 이상.”
네?
-말씀하신 건 일본 대부업체들 아닙니까?
-일본에서 어떤 일이 있었던 겁니까?
-얼마에 인수하신 겁니까?
재준이 다섯 손가락을 쫙 펴고 흔들자 거대한 덩치들이 기자들 앞에 서서 미소를 지었다.
가슴에 검은 늑대 발바닥 상징을 단 채.
***
[일본계 대부업체 전부 영업 중지 선언. 임재준에게 대놓고 시위]
***
오리슨캐피털 코리아.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쾅.
오리슨캐피털 코리아 오정국 대표가 탁자에 팩스 용지 위를 거칠게 내려쳤다.
며칠 전 재준이 했던 말이 공식 문서로 제작되어 팩스로 전달되었다.
마지막 줄에 커다란 문자로, [하기 싫으면 나가도 됨. 안 말림]이라고 적혀 있었다.
“우리도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유프로서비스 산하 허리앤캐시 유주안 대표가 넥타이를 잡아 풀며 말했다.
“이대로 영업할 수는 없어요.”
“아니, 일본 본사는 무슨 생각으로 주식을 다 넘긴 겁니까?”
“뻔하지 않습니까? 일본 대부업은 정부가 단단히 쥐고 흔들었습니다. 더는 돈이 되는 사업이 아니에요. 거기에 임재준이 한국에 들어가면 휘젓고 다니겠다고 협박을 했을 텐데. 이 기회에 돈 받고 주식을 넘기는 게 남는 장사라고 생각한 거죠.”
일본 대부업체는 돈이 되는 사업으로 만들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방법을 사용했다.
사채를 쓰는 사람에게 생명보험을 들게 하는 관행이 있어서 사채를 쓴 사람이 자살했을 경우 보험금을 사채업자가 받았다.
관행? 이야, 지금까지 이런 일을 관행으로 내버려 둔 일본 정부도 대단하다. 대단해.
2000년대 들어 사채업자들의 폭력과 이로 인한 자살이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일본 정부는 대부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했다.
엄격한 이자제한법을 만들어 최고 이자율을 20%로 낮췄고 대출 한도도 연 소득의 3분의 1 수준으로 제한했다.
특히 2011년 ‘폭력단 배제 조례’를 시행하면서 야쿠자와 관련된 사람은 금융기관과 거래할 수 없게 했다.
그래서 야쿠자의 자본이 한국으로 향한 건데 재준이 일본에서 번 돈으로 기업을 사겠다고 하니 선뜻 내놓을 수밖에.
앞으로 대부업은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사업이니까.
한국에서 고생하느니 목돈 받고 잠수 타는 게 현명했다.
“그냥 임재준이 말한 대로 영업을 하면 어떻습니까? 사실 20%도 적은 이자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제 로비 자금도 필요 없잖아요.”
재준의 의견에 찬성을 던진 사람은 더케이트러스트의 더케이케피탈 박주호 대표였다.
“우리는 상관없습니다. 2차 대부업체, 그놈들이 가만히 물러나겠습니까?”
“후, 도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요?”
“잠깐만요. 저에게 한가지 안이 있는데.”
대부업체 중 가장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신와대부 신성필 대표가 다른 대표들을 주목시켰다.
모두 신성필 대표에게 시선이 고정되자,
“제가 로운스타 한국 법인 대표를 알고 있습니다. 저희가 자금을 대고 임재준으로부터 일본 대부업체를 다시 사들이는 것은 어떨까요?”
“네? 로운스타 한국 법인 대표를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알고 있는데.”
“그는 스티븐 킴이고 실질적인 업무를 담당합니다. 하지만 엄연히 대표는 국책은행 부총재보와 자산관리공사 부사장을 지낸 최광수란 분입니다. 제가 자산관리공사 출신 아닙니까? 그때 제 상사셨습니다. 한번 부탁드려 볼까 합니다.”
“임재준이 안 팔면 그만 아닙니까?”
“로운스타라면 팔게 만드는 방법을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지금까지 일본 눈치 보며 일했는데 그럴 필요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위기가 기회가 된 셈이군요.”
“일단 만나 보겠습니다. 다들 실탄이나 챙겨두시죠. 언제든지 가동할 수 있게.”
“알겠습니다.”
허허허.
모두 갑자기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일본 본사를 집어삼키고 정부에 적당히 로비를 하면 44%의 이자를 굳힐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로운스타 한국 법인.
“어서 오게. 자, 앉아.”
로운스타 한국 법인 최광수 대표가 신와대부 신성필 대표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그럼, 자네는 어떤가?”
“대부업체가 그렇죠. 뭐.”
“대부업체 대표로 갔다고 들었는데 얼굴이 말이 아니야.”
“들으셔서 알고 계시겠지만 투마로우 때문에 영업도 못 하고 있습니다.”
“임재준 때문이겠지.”
“맞습니다.”
에잉. 쯧쯧쯧.
최광수는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그놈은 왜 법으로 정한 이자를 자기 맘대로 한다는 거야? 예전부터 정부를 아주 우습게 생각한다니까.”
“저희들 수익이 줄어드는 건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2차 대부업체들까지 일거리가 줄어들면 그놈들 사회에 나가 무슨 짓을 할지 걱정입니다.”
“그렇기도 하겠어.”
“그래서 말씀드리는데, 로운스타가 투마로우에서 일본 대부업체를 다시 사 올 수 있을까요?”
“다시 산다고?”
“네.”
최광수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로운스타는 한국 내 카드 회사로부터 부실 채권 1조 6,000억 원어치를 보유 중이고 역삼동 L타워, 여의도 부동증권 빌딩, SKQ 빌딩도 사들였다.
최근엔 한강여신을 사들이며 금융업에도 관심을 두었다.
이 과정에서 정부 고위 관료들과 자주 접촉을 했는데 하나같이 임재준의 횡포에 치를 떨었다.
“가만있어 봐.”
최광수는 사내전화 버튼을 누르더니,
“스티븐, 소개해 줄 사람이 있는데 바쁘지 않으면 올라오게.”
-네.
잠시 후 검은 머리를 기름으로 발라 넘기고 짙은 청색 넥타이에 하얀 와이셔츠를 입은 30대 중반의 남자가 등장했다.
“인사하게. 여긴 이곳의 실세인 스티븐 킴이야. 이쪽은 신와대부 대표 신성필로 예전 자산관리공사에서 같이 일하던 후배야.”
서로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아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스티븐, 임재준 알고 있지?”
“그럼요. 제 우상이기도 합니다.”
우상이라는 말에 신성필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이거 영 시작이 좋지 않은데.
말을 아낄 필요가 있겠어.
신성필이 경청의 자세를 취하자 최광수의 말이 이어졌다.
“혹시 이번에 투마로우가 다수의 일본 대부업체를 인수한 건 알고 있나?”
“네. 알고 있습니다. 좀 의외이긴 했지만, 신문에 나온 기사를 보니 이해는 했습니다.”
“자네 생각은 어떤가?”
후후.
스티븐 킴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제가 감히 임재준의 태도를 비판할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는 실망입니다. 그러나 임재준은 끝까지 가서 봐야 하는 인물이라 속단할 생각은 없습니다.”
“음, 그런가.”
최광수는 신성필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봐 스티븐. 우리가 꼭 투마로우에게서 일본 대부업체를 가져와야 한다면 어떻게 할 건가?”
“우리가요?”
“그렇네.”
스티븐은 신성필을 봤다.
그래, 저 사람이 신와대부 대표라고 했지.
임재준에게서 신와대부를 사들이려고?
“불가능합니다.”
“왜?”
“저는 그의 적수가 못 되니까요. 오히려 저희가 인수당할 겁니다. 겨우 신와대부 하나 사들이려고 그런 모험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신성필이 모욕을 당한 듯 이빨을 꽉 물었다.
겨우라니.
“하나가 아닙니다. 다섯입니다.”
드디어 참지 못하고 신성필이 입을 열자 스티븐의 고개가 돌아갔다.
“다섯이 전부 찬성한 겁니까?”
“그렇습니다.”
다섯 모두라…….
“다섯이라면 생각이 달라지는군요.”
“왜 하나는 안되고 다섯이면 가능한 거죠?”
“다섯을 다 인수하면 일본과 한국 바닥 경제를 손에 넣는 거니까요. 아마 임재준도 거기까지 생각했을 겁니다. 단순히 한국인들을 위한다고 보지 않습니다.”
“나서 주시겠습니까? 돈은 저희가 최대한 만들어 보겠습니다.”
“검토해 보죠.”
이후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치고 신성필이 자리를 떴다.
선싱필이 사라지는 뒷모습을 향해 스티븐의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최광수도 스티븐의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
“스티븐, 다른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대표님, 저 일본 대부업 저희가 가져야겠습니다.”
“왜?”
“어제 임재준이 한 말에 뼈가 있었거든요.”
“그게 뭔가?”
“국가 부도 사태요.”
일반인이라면 그냥 스쳐 지나갈 말이지만 윌가의 뱅커라면 누구나 귀가 쫑긋할 만한 말이었다.
“하지만 로운스타로는 임재준을 이길 수 없습니다. 펠리컨매니지먼트 폴 시그널을 부르겠습니다.”
임재준이 얼마나 대단한지 직접 겪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