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겁 좀 내면서 일하죠. 그래야 될 것 같은데(1)
보잉 747-8 VIP 안.
재준은 팀원들과 한국으로 가는 중이다.
“보스, 요미우리 신문 1면 기사 읽어 봤어요?”
블록이 영문판 신문을 내밀며 말했다.
[시바타증권 투자은행 몰락. 정부 손 놓고 구경]
일본에서 요미우리 신문은 중도 보수 성향이 강한 신문이다.
보수니까 일본 정부 욕을 잘 안 한다.
근데 오늘 시바타증권 투자은행의 몰락을 세세하게 파헤치면서 안일하게 대응한 정부를 강하게 비판했다.
“응, 저번에 공항에서 나한테 말 걸었던 그 기자가 썼던데.”
“그때 보스가 잘 보고 배우라더니 정말 잘 배웠네요.”
“기자만 배웠지. 정작 배워야 할 놈들은 여전하고. 아시아 국가는 절대 투자은행을 가질 수 없을 거야.”
일본이나 한국에도 투자은행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는 은행은 있지만, 투자은행의 두 분야 중 한 분야인 판매&트레이딩으로 국한되어있다.
판매&트레이딩은 증권사 업무와 비슷하다.
여기에 CDO나 CDS 같은 투자은행 상품을 추가하면 된다.
투자은행의 다른 한 분야는 기업금융이다.
이게 진정한 투자은행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고객을 자본시장과 연결해주는 일.
어렵게 말하면 한없이 어렵지만, 결론은 하나. 돈이다.
-이번에 사업 확장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신주를 발행해 드릴까요?
-주가가 떨어져 그건 안 됩니다.
-담보를 제공하면 대출을 알선해 드리겠습니다.
-담보는 이미 한도가 꽉 찼습니다.
-그러시군요. 그럼 담보에 잡혀 있는 부채로 증권을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수수료와 프리미엄만 조금 부담하시면 됩니다.
-그걸로는 돈이 부족할 거 같은데. 더 좋은 방법은 없소?
-그럼, 혹시 시장에 내놓을 만한 계열사 하나 처리하시죠. 이쁘게 포장해서 지금보다 두 배 금액으로 인수할 기업을 찾아보겠습니다.
-그거 괜찮네. 그렇게 합시다.
대충 이런 식.
안 되면 안 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되게 해야 한다.
없는 것도 만들어서 딜을 성공시키는 일.
그래서 투자은행에서 새로운 금융상품이 계속 만들어지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사모펀드, 헤지펀드, 인덱스 펀드, 적립식 펀드, 유로본드, 리치, CDO, CDS, ABS, MBS, LBO 등등 전부 투자은행에서 만들어졌다.
아시아 은행들은 이걸 가져다 쓸 뿐 새로운 상품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에이 말해 뭐해.
이제 따라잡기도 글렀는데.
“그래도 나중에 한국은 가능하지 않을까요?”
“한국? 글쎄, 힘들지 않을까? 금융은 기술이 아니라 생리잖아. 타고나야지. 배운다고 되지 않아.”
돈에 환장하게 태어나야지.
근데 돈에 환장한 중국은 왜 투자은행을 못하는 걸까?
그거야 벌려고 하지 않고 훔치려니까 그렇지.
중국도 투자은행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하는 말인데.
중국기업을 다른 나라 증시에 IPO(기업공개) 하면서 투자은행이라고 어깨에 힘주는 은행은 있다.
그럼 중국기업 IPO 다하면? 망하는 거지.
그렇게 쪼그라든 은행이 CICC다.
한창 전 세계 증시에 중국기업 상장시키며 세계 1위를 달성하기도 했다.
이제 중국기업 상장이 뜸해지자 존재감조차 없이 순위에서 보이지도 않는다.
아직 있기는 하겠지, 은행인데.
그리고 중국 중산층이라 불리는 인구가 4억 명쯤 있는데 이들이 여윳돈으로 투자상품을 사면서 세가 커진 은행들도 투자은행이라고 목소리 좀 높인다.
중국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크긴 했다.
하지만 다 알겠지만, 중국이 성장세가 둔화하면 다 폭삭 망할 운명인 게 문제다.
중국 투자은행은 운영방식도 기존 시장과 달라서 이들이 무너지면 다른 은행으로 자금 이동이 안 된다.
금융도 짝퉁으로 만들어. 아류라고 해야 하나? 암튼, 기존의 대출형 사모펀드를 자기들 멋대로 신탁회사라고 이름 지어 운영한다.
뭐, 중국 안에서 기업에 투자하는 거니 그러거나 말거나지만.
이 정도는 양호하고 WMP(Wealth Management Product)라는 실적배당형 상품이 있는데 예전에 망했던 종금사 투자 방식을 사용한다.
투자자가 돈을 맡기면 1년 만기나 3개월 미만의 초단기 구조인데 투자는 장기 고위험 대출을 하고 있다.
망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아니지, 이미 2건이나 만기에 배당을 못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리고 더 위험한 상품이 자그마치 중국 전역에 1만 개나 퍼져 있다.
바로 LGFV(Local Goverment Financing Vehicle).
영어에서 볼 수 있지만, 지방자치단체가 만든 특수 금융기구다.
말이 금융기구지 은행에서 저리로 대출을 받아 자기 맘대로 투자하는 단체다.
다리나 도로를 만드는 기본 인프라 사업에도 투자하고 지역에 있는 잘나가는 기업에도 투자하고 지역에서 다 쓰러져가는 기업에도 투자하고 기준이 없다.
그저 지역 발전이 목적인 금융기구다.
자, 위에 있는 투자은행이나 상품들의 특징이 하나 있는데.
기가 막히게 어디에 투자하는지 알려주지 않는 게 특징이다.
문제는 고객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
진짜 망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아니지, 아직 CDB(중국개발은행)이랑 풀어야 할 문제가 있구나.
이런, 이런, 중국 짝퉁 금융 이야길 너무 길게 했네.
재준이네 이야기로 돌아와서.
“블록, 중국에 있으면서 한국은 가봤어?”
“아니요? 전 돈 벌러 중국에 간 거지 관광하러 간 건 아니니까요. 근데 대부업체들을 왜 바리바리 싸 오신 거예요? 증권사나 은행을 인수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은데.”
“응, 할 일이 생겨서.”
내가 웬만해서는 남의 일에 신경을 쓰는 성격이 아닌데 대부업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야.
대부업도 좋게 자리를 잡을 수 있는데 일본에서 아주 못된 것만 배웠다.
이 기회에 아주 뿌리부터 바꿔 놔야지.
일본 증권사를 공매도하고 벌어들인 돈으로 오리슨, 유프로서비스, 더케이트러스트, SBY, 신와대부를 샀다.
저걸 다 샀다고? 하고 놀라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은행이나 증권사에 비하면 구멍가게인데 놀라는 게 더 이상하지.
투마로우가 관방장관을 쥐고 흔들었다는 루머도 있고.
이제 대부업으로 큰돈을 만지긴 틀렸다고 생각한 야쿠자들이 재준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팔았다.
만화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이다.
일본은 2011년 ‘폭력단 배제 조례’를 시행한다.
이 법으로 야쿠자와 관련된 사람은 금융기관과 거래할 수 없게 됐다.
이제 일본 대부업체는 정상적인 영업을 해야 하는데 국민에게 쓰레기란 인식이 각인되어 있었다.
욕은 먹어도 돈은 벌어야 하는데 돈도 못 벌고 욕만 먹으면 누가 이 짓을 계속하고 싶을까?
아직은 이 짓을 할 놈들이 있지만, 이미 사장 사업인 건 확실했다.
그래서 야쿠자들 돈 싸 들고 한국에 왔잖아. 대부업 한다고.
한국에서 홀라당 다 털리고 빈털터리로 돌아가야, 아, 그때 내가 잘못했구나! 반성하지.
“한국에 진출한 일본 대부업체들 교육 좀 시키려고.”
“보스, 한국 대부업체들을 전부 폐업시킬 겁니까?”
“아니, 왜? 대부업도 나름 시장에서 제 기능을 발휘하는데. 굳이 시장을 혼란하게 만들 필요가 있나?”
“교육시켜서 뭐하게요?”
“대부업도 순기능을 하게 만들려고.”
사실 대부업의 인식이 나쁜 원인은 1차 대부업체보다는 1차에서 대출금을 갚지 못한 불량채권이 2차 대부업체에 넘어가면서 생긴다.
바로 불법 추심하는 놈들.
근데 의외로 불법 추심이 조폭과 연관이 거의 없다.
조폭은 ‘나 여기 폭력 좀 씁니다’ 하고 불법을 저지르진 않는다.
그랬다간 검찰한테 ‘나 잡아가세요’ 하는 것과 똑같으니까.
불법 추심하는 놈들은 정말 정신이 어떻게 된 막장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조폭도 못 되는 동네 양아치.
불량 채권을 2차 대부업체에 넘기지만 않아도 불법 추심은 거의 사라진다.
“그게 순기능이 되겠습니까?”
“당연하지. 법 있잖아. 법.”
“애초에 법을 지킬 놈들이라면 대부업을 하겠습니까?”
“꼭 법이 국가에서 시행하는 법만 있는 건 아니잖아. 회사 내규도 당연히 큰 의미에서 법인데. 회사 내규를 만들어야지.”
“그럼 불량 채권은 어떻게 합니까? 갈수록 회계장부에 손실이 불어날 겁니다.”
“아, 그거? 일본 애들이 대신 메울 거야.”
“네? 일본 대부업체에서 번 돈을 한국 손실을 채운다고요? 그러다 일본 대부업체 부실해지면요.”
“일본이? 에이, 일본 대부업체 애들 잘해. 아주 쥐어짜서라도 다 받아낼걸. 우린 그 돈을 쓰면 돼. 그러다 정 안 되면 일본은 폐업하지 뭐.”
일본 바닥 경제가 흔들리든 말든 내가 알 바 아니잖아.
“그걸 말이라고…….”
블록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지금까지 일본을 건드린 건 시작에 불과하구나.
일본은 보스 말 들은 걸 두고두고 뼛속 깊이 후회할 거야.
블록이 고개를 떨구고 절레절레 젓자 페렐라가 토닥여줬다.
블록, 다른 건 생각하지 말고 너만 생각해.
“보스, 투마로우의 모체가 현재증권이죠? 보스 할아버지가 있는.”
“오, 그런 건 또 언제 조사를 했대.”
“근데 왜 현재증권을 투마로우 지주회사로 만들지 않는 겁니까?”
“안 돼. 현재증권은 가만히 놔둬야 해. 지주회사로 만들었다가 할아버지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 지금도 바쁘셔서 날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시는데.”
“바쁘시다고요? 그럼 우리는요?”
페렐라, 마지막 말투가 이상하다?
너희는 젊잖아.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던데.
내가 이제 돈은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할 때까지 같이 가야지.
하늘을 보고 한숨을 쉬는 페렐라의 어깨를 워서스틴이 토닥였다.
“보스, 스페인은 언제 치고 들어갑니까?”
“아직 좀 두고 봐야겠지. 그리스가 정신 못 차리고 난리 치잖아. 아마 조만간 구제금융을 받냐 안 받냐를 두고 국민투표를 할 거야.”
“그걸 정말 한다고요? 그러다 진짜 반대표가 더 많으면 어쩌려고요.”
“당연히 반대표가 많겠지.”
“네? 그걸 어떻게 알아요? 어느 미친놈이 구제금융을 반대해요. 그건 자살이나 마찬가진데.”
자살 맞다.
모든 금융거래는 끊어지고 초인플레이션이 덮칠 게 뻔하다.
그러나 그리스 국민은 뭔가에 홀린 듯 구제금융을 거절하는 데 표를 던졌다.
“근데 그 미친 짓을 저질러.”
“보스, 진짜 미래를 보는 능력이 있는 겁니까?”
“그렇다니까. 내가 능력이 좀 있어.”
“이제 숨기지도 않고 거짓말을 하는군요. 그 기자회견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고생을 한 줄 알아요? 전 세계 언론사에서 24시간 내내 전화가 왔다고요.”
맞아.
그랬지.
제기랄.
생각만 해도.
모두 한마디씩 하며 재준을 노려봤지만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리스 국민투표가 끝나면 유럽연합은 구제금융을 동결시킬 거고 그리스는 유럽 각국에 채무를 상환하지 않을 거야. 유럽 전체 은행이 부실해지는 거지. 그때 인수하면 돼.”
아니, 뭐가 이렇게 쉬워.
아무리 그래도 산타떼는 유럽 최대 시총 은행인데.
“전에 영국 브랜트앤리처드와 통화하는 거 보니까. 여기저기 소문내라고 하던데.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당연하지. 아무도 모르는 데서 혼자만 일 잘하는 거랑 일 못 하는 거랑 뭐가 달라. 다들 관심 좀 가지라는 거지. 그리고 ‘내가 이제부터 공격한다’와 ‘내가 언젠가는 공격한다’의 차이도 있고.”
하하하.
갑자기 윌켄이 재준의 말에 호탕하게 웃었다.
“하여튼, 보스는 상대 괴롭히는 데 뭐 있다니까.”
“아니 내가 뭐?”
“산타떼 진을 빼려는 거잖아요. 투마로우에 인수당하지 않으려면 자사주라도 잔뜩 사들여야 하는데 현재 그리스 때문에 BIS 맞추려면 예수금을 쌓기도 버거울 테고. 돈은 없고 걱정은 늘고. 어깨에 힘은 잔뜩 들어가고. 아닙니까?”
“대충 맞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