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글로벌은 아무나 하는 줄 아나 보네(6)
AAG 빌딩 66층.
펠그리니는 자료들을 들추며 입에 불이라도 뿜을 듯 그리스를 성토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리스 이놈들이 재정적자 폭을 숨겼어요.”
“5%가 아니라 13.6%라고?”
“그렇다니까요. 재정적자 3%가 유럽연합에서 제시한 건데 5%라니까 유럽 국가들이 기겁한 겁니다. 그래서 구제금융을 지원하면 살아날 거라 판단했고요. 근데 사실 13.6%예요.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전 세계가 뒤집힐 겁니다.”
재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머지는 너무 놀라 숨조차 쉬지 못했다.
먼저 의심쟁이 퀴니코가 재준에게 물었다.
“보스, 전에 말한 그리스 디폴트가 이걸 말한 거예요? 도대체 이걸 어떻게 감으로 때려잡아요?”
“매일 신문을 보다 보면…….”
에이, 또 저렇게 말한다.
윌켄이 투덜거리자 뒤이어 다들 한 마디씩 보탰다.
“술에다 뭐 타서 마시는 건 아니죠?”
“그보다 방에 있는 거울을 검사해 봐야 하는 거 아냐? 거울아 거울아 미래를 보여 줘. 뭐 이러는 거 아니냐고.”
“난 펠그리니랑 보스가 짜고 우릴 속인 거라고 봐. 이미 예전에 계산이 끝났는데 보스가 서프라이즈 하려고 숨긴 거야.”
이 사람들이 아주 그냥.
“아니야. 아니라고. 내가 무슨 신인 줄 알아? 그보다 이제 시바타에게 물 먹일 준비나 하자고. 페렐라, 워서스틴. 지금부터 시바타가 진행하는 M&A에 끼어들어. 그리고 가끔 한 번씩 이기도록 도와주고.”
“일부러 이기도록 도와주라고요?”
“응, 그래야. 팀장이 엄청난 성공보수를 받고 회사 내부에서 시기 질투가 무럭무럭 자라잖아.”
일본 직장 문화 같은 곳에선 성공보수가 주는 파괴력이 세다.
누군 하루 8시간을 일하고 누군 하루 2시간 일하는데 오히려 2시간 일하는 사람이 열 배가 넘는 돈을 받는다면 어떨까?
옆에서 지켜보는 동료들의 질투는 의외로 자신을 멍들게 하고 삐딱한 시선으로 타인을 바라보게 한다.
거기다 외국인?
이건 직장 내 왕따 각이다.
“그리고 퀴니코, 블록. 내가 지금부터 말하는 일본 기업 공매도 준비하고.”
“많은가요?”
“그렇게 많진 않아. 소오니, 시메츠화학, MEMD화학, SUMKO, 로네사스, 도시마.”
“알겠습니다. 날짜는요?”
“3월 11일.”
“무슨 날인데요?”
“일본이 무너지는 날.”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나는 날.
공매도하기 딱 좋은 날이지.
재준이 말한 기업들은 전부 쓰나미로 피해를 입은 도호쿠 현에 공장을 두고 있는 업체들로 생산이 20% 이상 차질을 빚는다.
혹시 대지진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게 비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몰라 얘기하는데.
재준은 지금 한국 내에 있는 대부업체를 하나도 남김없이 몰아내려고 열심히 일하는 중이다.
“윌켄, 시바타증권를 포함해서 주요 증권사들 공매도 치세요. 가능하면 많이. 다시 일어나는 데 한참 걸리게.”
“알겠습니다.”
시바타는 내게 손을 내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재준은 마지막으로 핸드폰을 들었다.
“브랜트, 시작할 준비는 다 되었어?”
-네, 3월 11일에 기자회견 잡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아마 TV로 생중계될 겁니다.
“직원들은?”
-3월 11일에 동시에 출근을 거부할 겁니다.
“그럼, 브랜트앤리처드의 첫 작품으로 일본 채권 공매도부터 해 볼까? 지금 바로 시작해.”
-네, 보스.
***
3월 11일 오후 2시 30분.
동일본 대지진 16분 전.
시바타홀딩스.
두두두두두두.
갑자기 흔들리는 건물을 보며 와다나베는 인상을 썼다.
“요즘 들어 부쩍 여진이 심하군. 제길 본사를 해외로 옮기든지 해야지. 불안해서 살 수가 없잖아.”
이틀 전 동일본 대지진의 전진이 있었지만 9.1의 후진이 온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당연히 지진이란 일본인에게는 생활의 일부였으니까.
벌컥.
지진만큼이나 강하게 문이 열렸다.
와다나베는 씩씩대며 들어오는 노무라를 봤다.
“왜 그래? 노무라, 요즘 팀장 교체하고 나서 실적도 좋던데.”
“그거 말고 기분이 더러워. 아주 이상해. 느낌이 좋지 않아.”
“무슨 일인데?”
“투마로우에서 시바타증권을 공매도하고 있었거든. 처음엔 수량이 적어 그러려니 했는데. 점점 양이 늘어나더니 지금은 30%가 넘었어.”
“허, 주가 더 떨어지겠네.”
“이게 다가 아냐. 일본 증권사, 기업까지 가리지 않고 공매도를 치고 있어.”
“공매도가 뭐? 투자은행이 늘 하는 일 아냐? 특히나 지금처럼 유럽이 위태로울 때는 더욱더. 크게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주가는 내려갔다 다시 올라가는 거니까. 우리가 부도가 나지 않는 이상 공매도야 자기들끼리 주고받는 건데 우리랑 크게 상관없잖아.”
“그리고 브랜드앤리처드라고 예전 핸리스미스브라더스와 그랜드월 CEO 둘이 뭉쳐 영국에 만든 회사가 있거든. 이것도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투마로우와 연관이 있는 것 같아.”
“투마로우와 연관이 있든 말든 무슨 상관이야?”
“일본 채권을 대량으로 공매도하고 있거든.”
“또 공매도라……. 전부 화살이 일본을 향하고 있다는 거지?”
와다나베는 뭔가 하나의 흐름이 있는 것 같은 예감을 받았다.
그리고, 벌컥, 또다시 심하게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야?”
“TV 좀 틀어 보세요. 지금 그리스가 난리 났습니다.”
“뭐?”
노무라가 TV를 켰다.
[저희 시리자당은 국민의 염원인 유로존 탈퇴와 디폴트만이 그리스를 살리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뭔 소리야? 저 새끼 미친놈 아니야?”
이제 슬슬 발동을 거는가 보군.
노무라는 와다나베에게도 그리스 일을 숨겼다.
“놔둬, 총선에서 표를 얻으려는 속셈이잖아. 실제 유로존을 탈퇴하는 순간 그리스는 파르테논 신전 같은 돌멩이만 빼고 채권국에게 다 팔리는데 진짜 하겠어?”
“근데 그리스는 사회당과 신민주당이 반반씩 나눠 먹는 거 아냐? 저런 존재감도 없는 당이 왜 전 세계로 인터뷰를 하는 거야?”
그러게?
저건 나도 모르는 일인데.
전 세계 생중계라니.
겨우 지지율 1%짜리 좌파정당한테
브라운이 그리스에 남아서 일을 처리한다더니 의외로 능력 있네.
노무라는 차르라스의 딱딱한 모습이 맘에 들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탈퇴와 디폴트는 유럽연합을 긴장하게 하겠지.
흐흐.
시간을 끄는 데 유로존 탈퇴와 디폴드 선언만큼 확실한 전략은 없다.
채권자와 채무자가 개인이라면 법으로 정리할 수 있지만, 국가라면 서로 으르렁거리며 대치 국면을 장기전으로 끌고 갈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어쨌든 그리스는 전국 시위가 끊이지 않겠는걸. 제길, 당장 그리스에서 우리도 철수를 지시해야겠어.”
“내가 할게.”
노무라는 그리스 시바타 사업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신호가 한참이나 울리도록 전화를 받지 않았다.
뭐지?
브라운에게 통화를 시도했다.
역시 전화를 받지 않았다.
어라?
그리스와 일본의 시차는 6시간.
지금 일본이 2시면 그리스는 오전 8시.
출근했을 시간인데.
지각인가?
회사로 직접 전화를 걸었다.
“료타, 본부장 출근했나?”
-저, 그게…….
“뭐야? 왜 말을 못 해?”
-그게 아니라 서양인들은 한 명도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출근을 안 해? 무슨 소리야?”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빠가야로.”
이것들이 조직적으로.
할 일이 없으니 어디서 아침부터 술이라도 마시고 있는 게 분명해.
“노무라 왜 그래?”
“그리스 사업체 인간들이 전부 출근을 하지 않았대.”
“그리스 시위가 여간 거센 게 아닌가 보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집단행동 같은데.”
“설마 파업을 했다고? 월급을 밀린 적이 있나?”
“시바타증권 먹칠할 일은 하지 않았어. 돈은 정해진 날짜에 정확히 송금되었다고.”
설마 전부 유럽 다른 나라로?
이것들이 정말.
다른 나라에는 시바타 사업체가 없다고 생각하는 건가?
전 세계에 우리의 눈과 귀가 있는데 다른 곳에 취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착각이다.
이 양키들.
노무라가 붉으락푸르락하자 와다나베가 진정시켰다.
“잘 된 건지도 몰라. 어차피 그리스는 정리할 생각이었으니 이 기회에 정리할 사업부는 정리하자고. 사실 유럽이 심상치 않아.”
“그렇긴 해.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우릴 얕잡아 보게 돼 있어. 갈 데는 뻔해. 프랑스나 영국이겠지.”
노무라는 핸드폰을 들어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역시 개인 전화는 받지 않았다.
이놈은 또 왜 이래?
제길.
노무라는 사업부로 전화를 걸었다.
“히로시, 나 노무란데.”
-네에, 부사장님…….
“본부장 바꿔봐.”
-저어, 지금 6시라 제가 출근 전이긴 한데요.
“아, 그래?”
-근데 사실은 본부장이 며칠 전부터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뭐? 왜?”
-이유는 모릅니다. 미국에서 건너온 팀원 전부 출근하지 않고 있습니다.
“근데 왜 그걸 지금까지 나한테 이야기 안 한 거야?”
-카즈마 대리님이 본부장을 만나서 이야기해 본다고 해서…….
“알았어. 끊어.”
알 듯 말 듯한 두려움이 든다.
아주 안 좋은 예감이 든다.
노무라는 프랑스 사업부로 바로 전화를 걸었다.
“와타루, 사실대로 말해. 지금 출근한 사람 없지. 아니 거기도 미국에서 온 놈들 출근 안 하고 있나?”
-아, 네. 네. 그렇습니다.
이건 뭐지?
가만…… 브랜트앤리처드?
영국.
아니겠지.
아닐 거야.
“노무라, 뭐야? 왜 이상한 소리를 하는 거야? 출근을 안 하다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말해 봐.”
“그게, 그러니까.”
두두두두두두.
거대한 흔들림에 와다나베와 노무라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다다다닥.
둘은 익숙한 몸놀림으로 재빨리 기어서 책상 밑으로 들어갔다.
“뭐야? 이거 보통 지진이 아닌 것 같은데.”
다시,
두두두두두두두.
더 강한 흔들림에,
와장창.
쨍그랑.
벽에 걸린 액자들이 떨어져서 박살 나고 책상 위에 있던 기물들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리모컨.
노무라는 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리모컨을 향해 기어갔다.
리모컨을 손에 넣은 노무라는 TV를 틀었다.
이놈의 지진.
[9.1의 대지진이 일본 동부 산리쿠 연안에서 발생했습니다. 진도 9.1의 강진입니다. 대해일 경보가 발령되었습니다. 이와테현, 미야기현, 후쿠시마현, 이바라키현, 치바현 쿠주쿠리•소토보, 아오모리현의 거주민은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알려드립니다…….]
뭐야, 저건.
“노무라, 어서 이 건물을 빠져나가야 해.”
“여긴 나고야야. 건물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라고. 이대로 나가다 사람에 쓸려 죽을 수도 있어.”
“이게 웬 날벼락이지?”
“그게 문제가 아냐.”
“이 상황에 무슨 소리야?”
이 상황.
이 상황인데 말이야.
어떻게 이 상황을 예측하고 우리를 공격한 거지?
임재준, 말로만 들었는데 정말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이라도 있는 건가.
미치겠네.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라니.
후자케루(지랄 같네).
노모라(아둔한 놈).
10여 분이 지나자 자잘한 여진 외에 큰 흔들림은 사라졌다.
그리고 TV에서 나오는 장면에 둘은 망연자실했다.
일본이 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