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글로벌은 아무나 하는 줄 아나 보네(5)
시바타홀딩스.
“머저리 같은 놈들. 머리 좋다는 놈들을 죄다 모아놨는데도 인수 가격 하나 제대로 계산하지 못하고.”
“노무라, 너무 몰아세우지 마. 다 경험이 적어서 벌어진 일이잖아.”
“알아. 하지만 답답해서 그래. 답답해서.”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거야.”
“더 답답한 게 뭔지 알아? M&A 팀 전체가 자신들이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는 거야. 참 내. 이걸 내가 일일이 가르쳐 줄 수도 없고.”
“그러지 말고 유럽팀에서 M&A팀을 꾸리는 건 어때?”
“안 돼. 그쪽도 유럽 전역을 상대하느라 바빠. 지금 몰아치지 않으면 자리를 잡을 수 없어.”
“자, 자, 이럴 게 아니라 나가서 술이라고 한잔할까?”
“그래, 사케라도 마시자고.”
와다나베는 노무라를 위로해주고 싶었다.
밤낮으로 뛰어다니는데 팀이 받쳐주질 못하니 불만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언제쯤 알아서들 할까?
야쿠타다즈(쓸모없는 놈).
“이번에 단골 세쿠캬바의 주인이 바뀌었어. 주인 하나 바뀌었다고 분위기가 아주 달라졌더라고.”
주인이 바뀌었다고?
노무라가 옷을 걸치다 말고 동작을 멈췄다.
“와다나베, 바로 그거야. 주인.”
“무슨 말이야? 갑자기 주인이라니.”
“우리 M&A팀 말이야. 팀장을 유럽 애들로 채우면 해결되지 않을까? 팀 전체를 꾸리는 것보다 못하지만 팀장 하나만 바꿔도 많은 도움이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좋은 생각인데.”
“그래 바로 그거야. 경험이 부족하면 경험이 풍부한 사람을 위에 앉혀 놓으면 되는 것을. 이렇게 간단한 일을 지금까지 생각 못 하고.”
아주 좋은 생각이다.
재준이 원하는 대로 잘 놀아나고 있다.
물론 팀장이 중요하다.
단 팀원이 받쳐 준다면.
그리고 미국 문화와 일본 문화가 뒤섞이면 팀이 잘 돌아갈 리가 없다.
일단 의사소통은 어떻게 할 건데.
팀원이 전부 영어에 능통한 것도 아니고.
일본은 세계에서 영어 발음을 가장 못 하는 문화구조로 되어있는데.
여러 가지가 있지만 다 말하면 글이 길어지고 하나만.
일본인은 어렸을 때부터 집단생활에 어긋나는 행동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
드라마나 애니를 보면 주변 눈치를 보면서 말하는 걸 자주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나대는 걸 못한다.
영어 회화를 잘하려면 말을 많이 해야 하는데 일본인들은 어릴 때부터 주입된 집단생활 때문에 이걸 못한다.
아마 팀장으로 미국 뱅커가 오면 한마디도 안 할걸.
“그런데 유럽에서 누굴 데려오지?”
“지금 1,100억 유로 구제금융을 받은 그리스에서 팀을 철수시키는 건 어떤가?”
“그렇지. 거기는 있어 봐야 밥만 축내는 놈들이니까.”
“자, 자. 이제 고민을 해결했으니 술이나 하러 가자고.”
하하하하.
***
그리스는 다 아는 대로 답이 없는 나라였다.
산업은 1차 농업과 3차 관광으로 구성되었고 2차가 없는 구조.
그렇다고 아르헨티나처럼 지하자원이 풍부하지도 않고.
프랑스처럼 자급자족이 가능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있는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것도 없는 백수.
아, 풍부한 게 하나 있다. 올리브.
이제 유럽연합이 도와주지 않으면 삼시 세끼를 올리브만 먹고 살아야 할 지경이었다.
유럽연합이 부채 50% 탕감과 2차 금융 지원을 하겠다고 나섰지만, 지원을 받는 동시에 긴축 재정을 요구했다.
바로 시민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독일 총리를 나치라고 비난했고 대통령과 관료들을 반역자라고 불렀다.
곳곳에서 시위가 벌어지고 점점 수위가 폭력으로 물들었다.
결국 유럽연합은 2차 금융 지원을 취소했다.
유럽 증시는 버틸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기 직전이고 미국과 아시아 증시도 영향을 받았다.
전 세계가 그리스를 걱정하는 수준을 넘어서 쌍욕을 날렸다.
***
그리스 시바타 팀.
점심 후 휴게실에서 두 명의 남자가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찰리, 브랜트 문자 받았지.”
“응, 이번에 영국에서 회사 차린다고 하던데. 리처드도 함께라며?”
“이야, 한때 월가의 황제였던 두 명이 뭉쳐서 회사 만들었는데 가야 하는 거지?”
“당연히 가야지. 시바타도 나쁘진 않은데. 뭔가 부족해. 너무 정적이라고 할까. 꼭 지시한 것만 처리해야 하고. 파이팅이 없어.”
“맞아.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면 뭐해, 결재가 안 떨어지는데.”
“그러니까 가야지. 예전처럼 쉴 새 없이 몰아쳐야 투자은행이라 할 수 있지. 브랜트와 리처드면 진짜 투자은행같이 일할 것 같은데.”
“거기다 투마로우가 돈을 댄다니까 자금도 부족하지 않을 거고.”
“어째 투마로우가 브랜트와 리처드에게 기회를 주는 느낌인데. 그렇지 않아?”
“미국에서 끈 떨어졌으니 유럽에서 다시 이어붙이라는 거야.”
“더 잘된 거지. 아무튼 이 거지 같은 그리스 좀 탈출하자.”
“오랜만에 설레는 기분인데.”
시바타에 근무하는 예전 헨리스미스브라더스와 그랜드월 직원들에게 문자가 날아갔다.
[브랜트앤리처드펀드. 다시 예전의 명성을 되찾고 싶은 뱅커는 연락하기 바람]
대부분 당장이라도 손을 털고 나가겠다고 결심이 섰지만,
“찰리, 토마스, 여기 있었구나.”
고민하는 이도 있었다.
“브라운, 너도 브랜트에게 문자 받았지?”
“받긴 했는데. 고민이야.”
“설마 일본으로 가는 거로 고민하는 거야? 그게 고민거리가 돼? 자그마치 브랜트와 리처드가 손을 잡았는데?”
“돈이 그렇잖아.”
“돈이라……. 뭐 성공보수가 30%라니 욕심나긴 해. 하지만 일본 애들 데리고 인수전에 뛰어들어서 이길 확률은 없어. 너 혼자 뛰어다니다가 뻗을 거야.”
“그래서 고민하는 거지. 너희들 세 번 이길 때 난 두 번만 이기면 되니까.”
“야, 너 못 이긴다니까.”
“한 일 년 해보고 아니다 싶으면 때려치우고 브랜트에게 가면 되지 뭐.”
“그때는 네 자리 없어.”
“아, 몰라. 그래서 고민이라니까.”
노무라도 팀장이 될만한 몇 사람에게 팀장을 제안하는 문자를 보냈다.
[시바타 본사 M&A 팀장을 제안합니다. 수수료는 유지하되 성공보수는 30%로 지급을 보장합니다]
문자를 받은 뱅커들은 30%라는 성공보수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브라운이 받은 또 하나의 문자.
[브라운, 나 브랜트야. 넌 일본에 남아서 할 일이 있어. 중요한 말이 있으니까 전화해]
***
시바타홀딩스 부사장실.
“브라운, 이게 얼마 만이야? 반갑다. 반가워.”
노무라는 브라운을 보고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일본까지 오느라 수고했어.”
“노무라도 참, 누가 보면 한 10년 헤어졌다 온 사람인 줄 알겠어요.”
“그래도 고마운 걸 어떡해. 이렇게 일본 M&A 팀을 맡아주겠다는데 10년 헤어진 친구보다 더 반갑지. 하하하.”
둘은 소파에 마주 앉았다.
“그리스는 어때?”
“가망 없어요. 거기 사업체들 정리하는 게 좋을 겁니다.”
“그래. 정리하는 게 낫겠어.”
“그리고 일본 다른 업체들도 정리하라고 하세요. 자꾸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현지에서 보면 거의 전쟁 수준이에요. 불안합니다.”
“그 정도인가?”
“그럼요. 그리스에 진출한 일본 기업 많죠. 얼마나 됩니까?”
“꽤 되지. 거의 모든 은행과 증권사가 그리스에 진출했어.”
“그럼 큰일 나겠네요. 은행이라는 게 여기 일본 현지하고도 묶여 있을 것 아닙니까.”
“그렇지.”
“안 돼요. 빨리 알리세요.”
“알았어. 일주일 안으로 알릴게.”
“일주일이요? 늦어요.”
“그렇게 다급하단 말이야?”
“다급하게 됐죠.”
“왜?”
브라운은 노무라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속삭였다.
“제가 현지에서 들은 이야기인데요. 투마로우가 사회당과 신민주당 대표를 비밀리에 만났다고 합니다.”
“투마로우가 왜 그리스 정당 대표를 만나?”
“서로 싸움을 붙였던 거죠. 시간을 벌 심산으로.”
“왜?”
“시간을 벌어 그리스 안에 있는 사라크방크 자산을 손실 없이 본국으로 가져왔잖아요. 일종의 시간 끌기였죠.”
“시간 끌기라…….”
“임재준이 부려놓은 잔재주로 그리스 상황이 더 악화됐어요.”
“더 안 좋아졌다고?”
역시 임재준, 무서운 놈이야.
그리스 국민은 죽든 말든 자기 자산을 챙기려고 싸움을 붙여?
임재준이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리스 안에 있는 시바타 자산이 떠올랐다.
그리스 시바타증권과 홀세일디비젼 그리스 사업체.
아니지, 그리스야 자기들이 게을러서 벌어진 일이잖아.
성실하지 못한 놈들 때문에 귀한 자산이 손실을 보면 안 되지.
“우리도 서둘러야겠어.”
“근데 유럽연합이 곧 2차 구제금융을 실시할 거라 하던데. 우린 괜찮겠어요?”
“우리가 왜?”
다시 브라운이 노무라를 향해 몸을 숙이며 속삭였다.
“이것도 제가 들은 이야긴데. 2차 구제금융을 주면서 기존 채무를 50% 삭감한다고 하더라고요.”
“뭐? 50%? 누구 맘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리스 국채가 얼만데 그걸 왜 자기들 맘대로 정해.”
“임재준은 아르헨티나 때 보니까 끝까지 다 받아내던데.”
“임재준…….”
임재준?
음.
아이디어 하나가 번뜩 떠올랐다.
“브라운, 자네 그리스의 사회당이나 신민주당에 아는 사람 있나?”
브라운이 노무라를 가만히 쳐다봤다.
“설마, 임재준처럼 하려고요? 싸움을 다시 붙이게요?”
“왜 못 할 거라 생각하지? 한쪽에 돈만 쥐여주면 될 것 같은데.”
브라운의 눈빛이 뭔가 결심한 듯 예사롭지 않게 변했다.
“노무라, 내가 그리스에서 생활해서 아는데 지금은 그 정도론 안 돼요. 그러지 말고. 내가 시리자 좌파정당 대표를 알고 있어요. 이들이 꽤 과격하거든요. 돈도 그리 많이 들지 않고.”
“그래?”
“이들이 주장하는 게 유로존 탈퇴와 디폴트 선언입니다.”
“허, 진짜 과격한 친구들이네.”
“요즘 시리자 좌파정당이 점점 그리스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럼 나도…….”
막상 임재준처럼 하려니 가슴이 벌렁거리기 시작한 노무라.
이걸 꼭 해야 하나?
아니지, 돈이 얼마가 걸렸는데.
망설이지 말자.
브라운이 슬쩍 노무라의 심기를 건드렸다.
“어렵겠죠? 일본인은 나서는 걸 좋아하지 않잖아요. 노무라 책임도 아닌데 뭐.”
“브라운, 난 영국에서 IB 뱅커를 지냈어. 일본인과 비교하지 말아. 그리고 서둘러 줘. 내가 그리스로 갈게.”
***
그리스 시리자 좌파정당.
당수인 알렉산더 치르라스는 자신을 찾아온 뱅커 두 명과 마주 앉아 있었다.
바로 노무라와 브라운.
노무라는 브라운과 함께 시리자 좌파정당에 오긴 했는데 눈앞에 비친 남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얘기만 들었을 땐 산적 두목인 줄 알았는데.
노무라 앞에 있는 치르라스는 양복이 정말 잘 어울리는 신사 중의 신사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신뢰가 느껴졌다.
치르라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시바타증권이라. 반갑기는 한데 왜 저희 당을 찾아오신 겁니까?”
치르라스의 눈에서 잠시 날카로운 빛이 번쩍이다 사라졌다.
“투자할까 해서요.”
“저희 당에?”
“치르라스 대표님에 대한 투자이기도 하고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저희 당은 지지율이 1%도 안 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투자하려는 겁니다. 다음 총선에서 이길 수 있는 당에 미리미리 투자하는 게 저희 일이니까요.”
“이길 수 있다라…… 듣기에는 좋습니다만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라도 있습니까?”
“저희가 나름대로 조사한 결과 시리자당의 공약이 국민에게 지지를 끌어낼 거란 결과가 나왔습니다.”
일단 신뢰성 있는 척해야지.
“증권사에서 그런 조사도 합니까?”
“일본 국익에 해당하는 일이니까요.”
시바타증권이라면 너무 속보이니까.
이럴 때는 애국심을 파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그렇다고 칩시다. 만약 총선에서 저희가 이기면 원하는 게 있을 것 같은데, 맞습니까?”
“일본이 그리스 채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좀 많이.”
“그래서요?”
“차후에 유럽연합에서 구제금융을 조건으로 채무를 삭감할 것입니다.”
“일본을 거기서 제외해 달라. 그겁니까?”
“사실 저희 유럽과 관계없는 나라니까요.”
“일리는 있는 말입니다만, 유럽연합에서 그걸 용인하겠습니까?”
“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른 것 아니겠습니까. 시간을 끌다 보면 해결책도 나오기 마련입니다.”
“투자 금액은 어느 정도 생각하고 오신 겁니까?”
“1억 달러입니다.”
시간만 끌어주면 1억 달러는 손해 봐도 상관없다.
노무라와 치르라스가 대화하는 동안 브라운은 차분히 듣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