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글로벌은 아무나 하는 줄 아나 보네(4)
“지금부터 차타르은행의 인수 입찰을 시작하겠습니다. 인수 가격을 적어 제출해 주십시오.”
먼저 얼반 그룹이 인수 가격을 제시하려는 찰나.
“잠시만.”
재준이 앞으로 나서며 서류 하나를 손에 쥐고 흔들었다.
“클레이스입니다. 지금 보니까 차타르은행의 자산이 몇 개 누락 된 것 같은데. 검토 부탁드립니다.”
인수를 진행하는 담당자가 서류를 받아 이사회에 전달했다.
세 명의 이사회는 서류를 살펴본 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후 한 명이 일어섰다.
“인정합니다. 차타르은행이 지배 지분을 가지고 있는 위장 계열사가 맞습니다. 이 회사들을 참고해서 가격을 다시 책정해 주십시오.”
“감사합니다.”
재준은 페렐라에게 손짓했다.
“얼반 그룹입니다. 가격 외 조건을 수정하려면 10분 정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타이핑할 시간은 주셔야 합니다.”
얼반 그룹 M&A 팀장이 재준을 노려보며 앉았다.
“DSBC입니다. 바로 가죠. 왜 10분이나 시간을 소비합니까?”
서로 시간을 끌기도 하고 벌기도 하려고 신경전을 벌였다.
이때,
“이런 법이 어딨습니까? 이런 경우는 최소 하루 정도는 시간을 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갑자기 튀어나온 요구에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떤 멍청이야?
-시바타?
시바타 M&A팀 팀장이 불합리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순간,
-뭐라는 거야?
-잽스들이네. 완전 초보잖아.
-하루를 더 달라고? 인수 합병에서 하루가 얼마나 많은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거야?
진행자는 뭐 특별한 이유가 있나 해서,
“왜 하루가 필요한지 이유를 말씀해 주십시오.”
시바타 M&A 팀장이 당당하게 가슴을 쫙 폈다.
“회사에는 보고 체계가 있잖습니까? 다들 윗선의 결재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뭐? 결재?
-이건 또 무슨 개그야?
큭큭큭. 큭큭큭.
사방에서 드러내지 못하고 웃음을 참는 소리가 회의장을 뒤덮었다.
허.
다이돈도 어이가 없는 듯 헛바람을 내뱉었다.
“보스, 지금 쟤네 장난하러 온 겁니까? 시바타는 팀장에게 인수 가격 권한도 주어지지 않아요?”
“당연하죠. 자칫 잘못하면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는데 본인도 윗선도 절대 용납하지 않겠죠. 저게 일본 회사 문홥니다.”
“나 원. 인수 입찰에 저런 초보를 팀장으로 내보내다니.”
-그냥 갑시다.
얼반 그룹 M&A 팀장이 진행자에게 그냥 진행하자고 손짓을 했다.
진행자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이유가 안 됩니다. 계속 진행하겠습니다. 하지만 얼반 그룹의 안은 받아들이겠습니다. 앞으로 10분 안에 인수 가격을 제출해 주십시오.”
진행자가 시바타를 무시하고 마무리 짓자 시바타 M&A 팀장이 다시 일어섰다.
“왜 그냥 진행합니까? 자산이 늘었으면 인수 가격이 달라질 텐데. 10분이라뇨?”
진행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쳐다보자 주변에서 시바타를 향해 비난이 쏟아졌다.
-뭐 하는 겁니까?
-당신들은 퀀트 없어요?
퀀트(quant)는 금융공학자로 외환, 주식, 신용, 원자재 분야 등 투자은행 각 부분에 한두 명씩 배치가 되어있다.
여기저기서 시바타를 향해 큰소리가 튀어나왔다.
-나가. 이런 식으로 시간을 끌지 말고.
-지금 이러는 의도가 뭡니까?
노무라는 아뿔사, 표정을 구긴 채 M&A 팀장에게 다가가선 으르렁거리며 속삭였다.
“뭐 하는 거야? 전부 뒤로 빠져.”
시바타 M&A팀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노무라의 뒤를 따랐다.
회의실 뒤쪽으로 모이자,
“야, 기시다. 너 미쳤냐? 네가 뭔데 인수 도중에 그만두고……. 참나. 말을 말자. 안 가르쳐 준 내 잘못이지.”
“부사장님, 당연히 조건이 바뀌었으면 입찰도 미루어져야 하는 거 아닙니까? 10분이라뇨. 그 시간으로 뭘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건 저들이 우리를 따돌리려는 거 아닙니까?”
“따돌리긴 뭘 따돌려!”
아유, 머리야.
“다들, 잘 들어. 세계적인 투자은행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수준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는 거지? 그야말로 전 세계에서 머리 좋다는 말 좀 듣는 사람 중에서도 가리고 가려서 뽑는 곳이 투자은행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즉각적인 임기응변과 계산이 컴퓨터보다 빠른 인간들이 저 안에 있다고. 10분? 10분이면 많이 준 거야. 그 자리에서 바로 계산이 나와야 하는 곳이라고.”
“그렇지만 보고는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노무라는 분을 삭이려고 하늘을 보며 눈을 감았다.
“제발, 일본식 사고방식 좀 버려. 1분 1초를 다투는 상황에 뭔 보고를 해.”
답답한 노무라가 큰소리를 질렀다.
노무라는 영국에서 IB 뱅크 생활을 해서 익숙했지만, 일본 내에서만 은행 생활을 하던 팀원들은 전혀 달랐다.
노무라는 이들에게 미처 하나하나 가르치지 못했다.
아니, 당연한 걸 왜 가르쳐야 해.
“다들 됐고, 빨리 계열사 가격 추산해서 인수 가격에 포함시켜.”
“부사장님. 회사 이름만 보고 어떻게 추산하죠? 최소한 재무제표라도 있어야 합니다.”
“스톡체인은 뒀다 뭐해, 거기 들어가면 모든 회사의 재무제표 다 나오잖아. 그것도 내가 일일이 알려 줘야 하는 거야?”
“네,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대답은 했지만 속으로 불만은 있었다.
미국에서 주식 할 일이 없는데, 스톡체인을 어떻게 알아.
심드렁한 표정의 시바타 M&A 팀원들은 노트북을 켜고 스톡체인에 들어가서 차타르은행의 재무제표를 호출했다.
그러나,
“인수 가격 제출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미 10분이 거의 다 지나갔다.
마누케(얼간이).
노무라는 한마디 던지고는 뒤돌아 멀어졌다.
아직 차타르은행의 재무제표 제목도 읽지 못한 시바타 M&A 팀장은 수정 없이 인수 가격을 제출할 수밖에 없었다.
***
월가 재준의 아지트.
재준은 오늘 차타르은행 인수를 축하하기 위해 팀원들과 바에서 조촐한 저녁을 즐기고 있었다.
이 자리엔 브랜트와 리처드도 참석했다.
저기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재준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구석에서 위스키를 마시는 게 바로 그들이다.
재준이 다이돈에게 잔을 들었다.
“너무 싱거운 싸움이었어요.”
“원래 인수전이 그렇잖아요. 다른 쪽에서 숨겨진 자산을 못 찾은 거지.”
“근데 원래 숨겨진 자산은 밝히지 않고 나중에 처분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그게 훨씬 이익일 텐데.”
“원래는 그렇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잖아요. 시바타에게 아주 좋은 교훈을 주고 싶었어요. 뭐랄까, 글로벌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뭐 이 정도?”
“시바타를 어쩌실 겁니까?”
“시바타라기보단 일본이죠.”
“일본을 노리고 있다고요?”
“당분간 돈줄을 막아 놓으려고요.”
“쉽지 않습니다. 워낙 전 세계에 뿌려 놓은 곳이 많아서 힘들 겁니다.”
“알아요. 아르헨티나처럼 항복을 받을 수는 없지만, 경고 정도는 될 거예요.”
말이 경고지 머리를 숙이게 될 것이다.
좀 치사한 방법을 쓸 거지만.
“다이돈, 저기 우중충한 얼굴을 하고 있는 브랜트에게 갑시다. 같이 할 얘기가 있어요.”
“무슨 이야깁니까?”
“가서 들어 보면 알아요.”
재준은 다이돈과 함께 브랜트와 리처드가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브랜트.”
“아, 보스.”
“뭔 표정이 초상집에 온 사람처럼 우중충해?”
“아, 아닙니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어.”
엉거주춤 일어선 브랜트와 리처드는 재준이 앉기를 기다렸다 재준이 앉자 다시 앉았다.
“할 이야기라는 게 뭡니까?”
“내가 열심히 하면 보상을 준다고 했잖아.”
“네, 2년 동안.”
“그렇지. 하지만 당장 영국으로 가서 헤지펀드 하나 운영해 보면 어떨까 해서.”
“네? 그게 무슨 소립니까?”
“펀드 이름은 헨리스미스브라더스.”
“네? 헨리……. 뭐요?”
“아니다. 헨리랑 스미스가 다 이 바닥을 떴으니 브랜트앤리처드 어때?”
켁켁.
리처드가 마시던 술이 목에 걸려 거친 소리를 냈다.
“보스.”
“그래, 2년은 안 됐지만 고생했어.”
“정말입니까?”
재준은 다이돈을 향했다.
“다이돈, 계열사 하나 만들어서 이들을 도와주세요.”
“도와주는 거야 어렵지 않지만.”
다이돈은 브랜트와 리처드를 바라봤다.
둘의 눈에 간절함이 절절하게 흐르는 게 보였다.
“알겠습니다. 그런데 보스, 펀드야 클레이스 안에 만들면 그만인데 굳이 계열사로 따로 분리해서 만드는 이유를 말해줄 수 있나요?”
재준이 브랜트와 리처드의 간절함과 다이돈의 의문을 살폈다.
“브랜트, 예전의 명성을 찾고 싶겠지.”
“당연합니다.”
“자신은 있고?”
“있습니다.”
“그럼, 유로존에서 살아남아 봐. 지금 그리스 상황이 어떤지 잘 알 것이고. 무얼 해야 하는지도 알 거야. 그렇지?”
브랜트가 재준의 말을 가만히 생각했다.
투마로우가 유럽에 진출하지 않으면서 유럽을 장악하려는 건가?
일리 있다. 지금 미국 상황을 정리하는 데도 정신이 없을 테니까.
지금 할 일 없이 거의 놀고 있는 건 나와 리처드.
“유럽에서 기회가 생기는군요.”
“맞아. 조만간 우리도 건너갈 거지만, 그 전에 정리했으면 좋겠어.”
“알겠습니다. PIIGS를 정리하겠습니다.”
“말귀는 잘 알아먹네. 그리고 인력은 스카우트해.”
“네? 그건 무슨 의미입니까? 미국에 있는 뱅커들을 데리고 가는 거 아닙니까?”
“그건 안 돼. 유럽에서 조달해야지.”
“그건 좀 어려운데요.”
“어려울 거 없어. 브랜트를 따르는 사람들이 유럽 전역에 깔렸잖아.”
“제가 아는 사람들이요?”
설마.
“맞아. 시바타 유럽 지부에 있는 사람들을 전부 스카우트해 버려.”
“시바타라면.”
유럽이 목적이 아니었구나.
시바타증권의 홀세일디비젼이었어.
그럼, 이 그림을 한참 전부터 그린 거라고?
헨리스미스브라더스 뱅커들을 전부 유럽으로 이전시키더니.
시바타가 한참 잘나갈 때 인재들을 다 빼 온다?
브랜드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지자 재준이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뭘 하려는지 알겠지.”
“시바타를 무너뜨리려는 거군요.”
“거기서 끝내면 안 되고 좀 더 진도를 빼면 좋겠는데.”
“진도라고 하면.”
재준은 위스키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 빙글 웃었다.
“역시 맛있어. 브랜트, 리차드, 그리스가 디폴트 선언하고 유로존을 탈퇴하게 만들어야 하거든.”
“네? 유로존을 탈퇴하게 하라고요?”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미친 짓을.
브랜트는 재준을 멀뚱히 바라봤다.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하면 어떻게 될까?
꼭 그리스가 아니라도 유로존(EU)에 있는 국가가 탈퇴하면 난리 난다.
탈퇴한 나라는 바로 파산이다.
유로화를 포기했으니 돈이 돌지 않는다.
유럽 국가와 거래가 끊기며 은행들이 전부 부도가 난다.
기업들은 신용에 대한 리스크가 크다는 이유로 거래 시 프리미엄을 지급해야 한다.
초인플레이션으로 물가가 급등하고 식료품 품귀 현상이 벌어진다.
근데 왜 탈퇴를 하는데?
그건 빚 청산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에 가입되어 있으면 독자적인 환율정책을 펼 수가 없다.
환율을 상승시켜 경상수지를 개선해야 빚 청산이 가능한데 유럽연합에 가입되어 있으니 환율을 상승시킬 수가 없다.
환율 상승을 유도하려고 유로존에서 뛰쳐나가는 초강수를 두려는 것이다.
“그리스가 유로존을 탈퇴할까요?”
“내가 만나라는 사람들을 시바타에게 소개해주면 돼. 나머지는 그 사람들이 알아서 할 거니까.”
“시바타를요?”
그럼, 시바타가 얼마나 일을 야비하게 잘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