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글로벌은 아무나 하는 줄 아나 보네(3)
“월가가 글로벌금융회사로 변신하기 위해 한 것은 합병과 인수 그리고 상품 개발 아닙니까?”
질문한 페렐라에게 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합병과 인수. 그리고 그 뒤에는 사정없는 구조조정이 따라오는 거야. 근데 일본의 기업 문화는 뭔지 알아?”
“평생직장?”
“맞아. 그래서 일본은 합병과 인수를 그리 달가워하지 않아. 그런데 이런 일본적인 마인드로 해외확장을 한다면 그게 무슨 글로벌이야. 해외로 여행 가는 거지.”
페렐라는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그리고…….”
재준의 시선이 펠그리니에게 향했다.
“펠그리니, 그리스 재정 운용을 파고들어 줘. 진짜 그놈들이 적자 폭이 5%인지 의심이 든단 말이지. 그리고 혹시 디폴트 가능성도 계산해 주고.”
“오케이. 보스. 아주 놈들의 팬티까지 들여다보죠.”
펠그리니, 너 원래 그런 말투 안 쓰잖아.
돈을 벌더니 사람이 변한 건가 아니면 원래 성격이 저런 건가?
재준은 모두에게 시선을 주며 말했다.
“그리스가 시바타를 흔들기 시작할 거야.”
“그리스가 왜?”
아직 사태가 터지지 않아서 모르지 아마 지옥이 따로 없을 거다.
“만약에 말이야.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면 어떻게 될까?”
하하하.
다들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왜 합니까’라는 말을 웃음으로 대신했다.
“웃지 말고 심각하게 말해 봐. 만약에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면.”
“유로존에 있는 나라들이 도와주겠죠.”
“왜 도와주는 거지?”
“그리스 국채를 다 같이 나누어 가지고 있잖아요. 그리스가 못 갚겠다고 배째라고 나오면 유로존에 있는 나라의 은행들이 전부 부실해집니다. 이건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보다 더 심각한 일이 될 거예요.”
“그렇지. 그럼 유로존의 금융 시장은 어떻게 될까?”
“심하게 요동치겠죠?”
“그럼, 트레이딩 수는?”
“감소하겠죠?”
“그럼 시바타는?”
아…….
모두 그 부분에서 입을 벌렸다.
“워서스틴, 저렇게 시장이 죽으면 우리라면 어떻게 하지?”
“간단하죠. 프랍트레이딩(고유계정거래)를 하면 되죠? 우린 자기자본이 넘쳐나는데. 오히려 기회 아닌가요? 마구 쓸어 담아야죠.”
프랍트레이딩은 자기 돈으로 매매를 하는 것이다.
내 돈으로 내 맘대로.
그럼, 반대는 고객계정거래겠지.
고객의 돈이니까 고객 마음대로.
그래서 정부는 프랍트레이딩을 싫어한다.
자기 돈으로 정부 눈치 안 보고 막 질러대니까.
“여기서 일본의 금융의 문제가 드러나겠지? 일본은 프랍트레이딩을 절대 하지 않거든. 고객들 요청이 줄어들면 시바타는 돈 벌 방법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할 거야.”
“하지만 이건 다 그리스가 디폴트 되면 발생하는 일…….”
워서스틴의 말이 늘어지며 재준의 올라간 입꼬리에 모두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그만!
윌켄이 앞으로 나섰다.
“보스, 이건 안 됩니다. 그리스를 디폴트시키면 정말 큰일 납니다.”
“네? 내가 왜?”
윌켄 무슨 소리야?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나면 다 내가 만든다고 생각하는 거야?
“지금 그리스를 공격하려는 거 아닙니까?”
“아니, 내가 무슨 수로 그리스를 공격해요? 아르헨티나처럼 채권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리고 여긴 유럽이 아니고 미국이에요. 미국에 앉아서 뭘 공격해요?”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죠. 하지만 그리스가 디폴트를 선언하는 건 맞아요.”
음.
“보스 말에도 일리가 있어요. 하루가 멀다 하고 과격 시위에 올해 13.6억 유로의 재정적자를 냈어요. 정부 채무 비율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고요.”
“그때를 대비해서 내가 시바타에게 또 다른 선물을 준비했지.”
“그게 뭔데요?”
“나중에 보여줄게. 지금 보여주면 재미가 없잖아.”
다들 설마하는 맘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지금까지 재준이 말해서 이루어지지 않은 사건이 없었던 만큼 불안함과 조급함이 밀려들었다.
“그리고 유럽 채권이 불안정하면 미국 채권을 사려고 몰려들 거야. 프라이머리마켓을 단단히 거머쥐어야 해.”
“지금 최상위 등급 채권 발행은 저희 외에는 몇 없고 규모 면에서 저희를 따라올 수가 없어요.”
“그렇지. 이제 시바타가 채권 프라이머리마켓에 고개를 들이밀 거야. 자신들의 등급이 어떤지 인지시켜 줘야 하는데…….”
주식이든 채권이든 발행하는 시장(프라이머리마켓)이 있고 유통하는 시장(세컨더리마켓)이 있다.
세컨더리마켓은 뉴욕 증시나 나스닥, 코스피, 코스닥 같은 시장이 이미 존재하니 여기서 주식이든 채권이든 유통되므로 신경 쓸 일이 없는데.
프라이머리마켓은 채권에 투자등급이 매겨져서 금리가 다르다.
안정성이 최상위 AAA부터 최하위 C까지 총 9단계.
최소한 3단계인 A는 받아야 상위등급이고 BBB, BB는 정 없으면 사는 채권, 그 이하는 투자부적격으로 분리된다.
왕년의 윌켄이 이 투자부적격 채권인 정크 본드로 떼돈을 벌었던 전설.
“보스, 시바타 채권은 팔리지 않을 겁니다.”
윌켄이 핸드폰을 톡톡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내 전화 한 통이면 쳐다도 안 볼 겁니다.”
“오케이. 아주 맘에 들어.”
IT 버블과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를 겪으며 모든 은행과 기관은 발행된 채권을 무조건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던 시기였다.
***
시바타홀딩스.
“노무라, 어서 와. 자, 앉게.”
와다나베는 노무라 어깨를 꽉 쥐었다 놓았다.
“역시 이번 딜도 대단한 성과였어. 시바타 이름이 유럽 금융가에서 이렇게 자주 오르내리는 게 기적 같아.”
“내가 그랬잖아. 이건 기회라고. 우린 그 기회를 잘 잡은 거야. 다 와다나베 사장, 자네 덕이야.”
“내가 뭐 한 게 있다고. 미국까지 날아가 임재준한테서 알맹이만 쏙 빼 오고 유로존 합병 자문단을 이끌고 동분서주한 자네 공이지.”
“그런가?”
하하하하.
이게 얼마 만에 기분 좋게 웃는 건지.
와다나베는 노무라의 다음 행보가 궁금했다.
이렇게 매번 웃을 수 있다면.
“노무라, 이제 앞으로 뭘 할 건가?”
“이제 기업 자문 역할은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투자은행이라면 프라이머리마켓에 진출해야지. 그래야 진정한 투자은행이라고 할 수 있어.”
“주식과 채권 발행하려면 신뢰가 필요한 거 아닌가?”
“신뢰만으론 안 돼. 아직 우리 투자 등급이 높은 편이 아니라서 등급을 올리는 데 집중해야지.”
“등급만 올리면 되나?”
“또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 이후로 각국의 규제 당국 규제 조치들이 빡빡하거든. 우린 그 규제에 맞게 채권을 발행해야 하는데. 좀 어려워.”
“이럴 땐 어딘가를 롤 모델로 삼으면 쉽지 않을까?”
“그렇긴 하지. 지금 최상위 등급은 얼반 그룹이나 DSBC, 그리고 빌어먹을 투마로우가 위치해 있긴 한데. 단시간에 성과를 보려면 싫어도 투마로우를 따라 할 수밖에 없어.”
투마로우만큼 공격적 투자를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와다나베, 지금 유로존에서 쓸 만한 은행을 인수하는 건 어때?”
“이번에 합병에서 덩치를 키운 클레이스는 어떤가?”
훗.
노무라가 피식 웃었다.
“클레이스는 이미 투마로우 계열사네.”
“뭐? 언제부터?”
“자네 너무 국내리테일만 신경 쓰다 보니 해외 소식은 잘 모르는 것 같아.”
“당연하지. 국내 기업들 신경만 써도 머리털이 다 빠질 것 같은데. 하하.”
“프랑스의 사라크방크도 완전히 넘어갔고. 스페인의 산타떼도 투마로우에 한 방 먹어서 고전 중이고, 네덜란드의 ABC암로도 조만간 투마로우에 합병될 거야. 그렇게 되면 브라질과 이탈리아 최고 은행도 자연히 넘어갈 거고.”
“미치겠네. 여기저기 투마로우 얘기뿐이군. 돈은 있는데 살 물건이 마땅치가 않다니. 쿠소(제기랄).”
노무라는 무언가 생각난 듯 와다나베를 바라봤다.
임재준처럼?
“이럴 게 아니라 나도 투자 전문 팀을 하나 만들어야겠어.”
“지금도 자문단을 이끌고 있지 않은가?”
“아니야. 전에 임재준을 봤는데 각 분야의 뛰어난 사람들과 팀을 이루어서 뭐든 닥치는 데로 공격하는 것 같았거든. 그러니까 나도 각 분야의 뛰어난 인재들로 팀을 구성해야 해.”
이게 맞아.
일본에 있는 인재들로 나만의 팀을 만든다.
***
스톡체인 대회의실.
오랜만에 미국 중견급 은행 인수에 대한 경쟁 입찰이 진행되어서 주관사로 스톡체인이 선정되었다.
투마로우 CDS의 덫에 걸려들지 않았던(?) 차타르은행이 매물로 나오자 얼반 그룹과 DSBC, 클레이스, 시바타까지 경쟁에 뛰어들었다.
재준과 팀원들은 오랜만에 클레이스의 다이돈 사장을 만났다.
“보스, 솔직히 저를 보러 온 거죠?”
“다이돈, 당연한 걸 왜 물어봐요? 이제 합병이 다 마무리되었다는데. 내부 세력은 잘 정리했나요?”
“내부 세력이 존재할 리가 없잖습니까. 이미 투마로우에서 지분을 다 가지고 있는데 저희끼리 지지고 볶고 싸울 이유가 있을까요?”
“그렇게 되나?”
하하하하.
“근데, 다이돈.”
재준이 DSBC 쪽을 보며 다이돈에게 속삭였다.
“어느 정도 차이가 납니까?”
“이제 70% 정도 따라왔습니다. 그래서 이번 인수에도 참여했습니다. 보스 덕에 미국이 빠르게 회복되고 있으니까 지금 놓치면 비싸게 주고 사야 합니다.”
“칭찬인지 원망인지 헷갈리네.”
“원망으로 하시죠. 천천히 해도 될 일인데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겁니다.”
“그게 그렇게 되나. 암튼 이번에 반드시 인수해야겠네요.”
“네.”
“그럼, 우리도 작업 좀 쳐 줄게요.”
“보스가 직접요?”
“네. 빨리 따라잡아야 맘이 편할 것 같아서.”
그리스 디폴트 선언하면 엄청 바빠지거든.
다이돈은 주변을 둘러보며 경쟁자들을 살펴보는데 좀 생경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보스, 재네들 뭐 하는 겁니까?”
“뭐요?”
“저 잽스들.”
“사바타요?”
재준이 사바타 쪽을 보니 모두 작은 책자를 열심히 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쟤네 뭐하니?
“참 나. 이런 상황도 매뉴얼을 만드셨어요?”
“메뉴얼이요?”
“일본인들 특징이잖아요. 모든 상황을 저렇게 작은 책자로 만들어 숙지해요.”
“별 멍청한 짓을 다 보겠네요. 은행 인수를 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무슨 매뉴얼입니까? 일본인은 사랑도 메뉴얼로 배우나요?”
“글쎄, 아니라고 말 못 하겠네.”
자신들을 보고 있는 걸 눈치챈 노무라가 와다나베와 함께 재준에게 다가왔다.
“잘 지내셨습니까. 임 상.”
“아, 뭐 그럭저럭.”
노무라가 와다나베에게 ‘이 사람이 임재준’이라고 속삭이자 화들짝 놀란 그가 품속에서 명함 지갑을 꺼내 두 손으로 공손하게 내밀었다.
“사바타홀딩스 대표 와다나베입니다.”
“아, 네.”
재준이 명함을 한 손으로 받아 살펴보고는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어떡하지, 난 명함이 없는데.”
“아, 그러십니까. 그럴 수 있죠.”
말은 이해한다고 하면서 표정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이었다.
명함 없이 사업을 한다고?
그러고 보니 CEO라든가 회장이라든가 직책을 들은 적이 없긴 해.
뭐 하는 놈이지?
“그럼, 우린 일이 있어서. 나중에 봅시다.”
그대로 재준과 다이돈이 자리를 뜨자 와다나베 얼굴이 꽉 구겨졌다.
“노무라, 저게 임재준 맞아?”
“그래, 우리와 많이 다르지?”
“건방지기가 하늘을 찌르는구만. 조센징 새끼.”
“그래도 참아. 투마로우는 그저 그런 은행이 아니야. 차라리 이번 입찰에서 코를 납작하게 만들자고.”
“근데 이번에 유럽 애들 안 써도 되나?”
“사바타 그룹 전체에서 내놓으라 하는 천재들로 구성된 팀이야. 걱정하지 말라고. 입찰 금액을 정확히 뽑아낼 테니까.”
“그래, 코를 납작하게 해 줬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