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수익률이 얼마라고요? 1,000%요?(6)
암스테르담 화이트호텔 스피노자 스위트 룸.
똑똑.
“들어오세요.”
벌컥.
“도련님. 일처리하고 왔습니다.”
“역시 실장님이 나서니까 나라가 시끌시끌합니다. 하여튼 뭐든 선수가 해야 한다니까. 하하하.”
“그럼요. 제가 그동안 얼마나 갈고닦은 솜씨인데. 이 정도는 일도 아니죠.”
“자, 다음은 말이죠.”
재준은 서형길에게 언론으로 ABC암로를 완전히 흔들 계획을 알려주었다.
거의 이야기가 끝날 즈음.
똑똑.
“들어오세요.”
벌컥.
“보스. 클레이스와 ABC암로 합병 중단시켜 달라는 가처분 신청했습니다만…….”
페렐라가 재준에게 보고하는 중에 서형길 실장을 보더니 보고를 중지했다.
누구지? 첨 보는 얼굴인데.
“아, 괜찮아. 여기 한국에서 온 언론담당 실장님이야. 일명 선수라고 부르지. 언론플레이어.”
“언론플레이어요?”
“맞아.”
언론이라면?
“설마 지금 네덜란드 언론을 움직이는 게 저 사람입니까?”
워서스틴이 페렐라 곁에 다가와 속삭였다.
“어쩐지 기사 내용이 터프하다 했더니. 보스였어, 보스.”
“그러게, 난 또 네덜란드 언론이 웬일인가 했다.”
“그나저나 저 선수 꽤 유능하네.”
영어를 전혀 못 알아듣는 서형길도 자신을 칭찬하는 느낌을 진하게 받았다.
부러워하는군.
근데 저놈들은 하는 일 없이 둘이나 짝을 지어서 몰려다니는 거야?
쯧쯧, 한심한 놈들.
일은 독고다이라고, 독고다이.
재준이 서로 어색하게 쳐다보는 사람들을 향해 가운데 모이라고 손짓했다.
“서로 말은 안 통하니까, 그냥 악수만 해. 이쪽은 서형길 실장. 실장님, 이쪽은 페렐라와 워서스틴입니다.”
어설프게 악수하는 폼 때문에 어색하던 분위기가 더 어색해졌다.
“여기 오늘 가처분 신청 서류입니다.”
“수고했어. 페렐라.”
“근데 이게 효과가 있을까요?”
“그럼, 이제 합병을 잠시 중단하겠지. ABC암로 회장 똥줄 타겠는데.”
“보스, 궁금한 게 있는데요. ABC암로 회장이 합병 은행장을 맡는다는 건 진짜입니까?”
“그래, 윌켄이 알려준 대로 잘하고 있던데.”
“윌켄이요? 윌켄이 왜 거기서 나옵니까?”
“내가 영국으로 보냈으니까?”
“언제요?”
“우리가 네덜란드로 날아올 때 윌켄은 영국으로, 앤드류는 스페인으로 갔지.”
“네? 스페인이라면 산타떼?”
“응. 맞아.”
아.
페렐라는 벌어진 입을 다물 줄 몰랐고 워서스틴은 자신의 이마를 쳤다.
지금까지 벌어진 일이 다 짜여진 각본이었어?
전부 보스 손바닥에서?
언론 조작에 선수들도 직접 출연시키고.
그래도 뭔가…….
“보스, 이해가 안 가는데 전부 보스 시나리오대로 흘러간다 해도 어차피 1,000억 달러라는 돈은 들어가야 하잖아요. 우리에게 ABC암로가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요?”
“ABC암로만 먹을 거면 이런 수고를 하겠어? 내가?”
뭐라는 겁니까?
설마 등장인물들을 전부 몰살하는 건 아니죠?
“그럼 ABC암로에 이어 한 개 더?”
“아니지. 한 개로는 부족하고.”
“그럼 두 개?”
“아니, 한 개.”
“한 개는 아니라면서요.”
“한 개 빼고 다.”
“네?”
뭐라는 거야.
지금 여기 등장인물이 몇인데.
ABC암로, 클레이스, 산타떼, 로얄, 포르티까지 다섯.
“뭘 생각하는지 알겠는데. 가장 중요한 곳은 리살은행이야. 그리고 그 열쇠는 이미 내가 돌렸고. 지금쯤 ABC암로 회장 머리에서 열 좀 나고 있을 거야.”
***
ABC암로은행.
“지금 뭐라고요? 가처분 신청을 했다고요? 투마로우가?”
“네. 주주총회에서 큰소리친 게 이거였나 봅니다.”
흐닝크 회장 머리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물이라도 부으면 김이라도 날 것 같았다.
“법원에 줄 좀 대세요. 직접 가야겠습니다.”
“저 그게…….”
불안하다.
왜 말을 더듬어.
“왜요?”
“법원 근처에 언론들이 쫙 깔려서 직접 가시는 건 어렵습니다.”
“그럼 전화를 걸어서 담당 판사와 식사 자리라도 만들어 보세요.”
“그것도 어려운 게, 담당 판사 주위를 24시간 쫓아다니는 찰거머리 기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저희도 만나려는 걸 포기했습니다.”
이미 우리가 접촉할 거라고 예상했다고?
“답답하네요.”
“하지만 염려 놓으십시오. 저희 법무팀이 저희의 승리를 장담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지면요? 가처분 신청이 받아들여지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건 법무팀이…….”
똑똑.
“들어와요.”
“회장님. 법원 판결이 났습니다. 지금 판결문을 들고 온답니다.”
“뭐요? 아니 어제 들어간 가처분 신청이 벌써 났다고요?”
아뿔싸.
이거 뭔가 이상하게 돌아가는데.
“그리고…….”
“뭡니까? 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산타떼 컨소시엄이 만약 리살은행을 팔 거면 자신들이 245억 달러를 낼 수 있다고 지금 발표했습니다.”
이것들이 정말.
임재준과 짜고 치는 거 아냐?
왜 이렇게 일들이 맞물려서 벌어지는 거지?
그럴 리가, 임재준에게 그럴 시간은 없었을 텐데.
클레이스와 합병만 되면 전부 인수해서 이름을 지워버리겠어.
“회장님. 저희도 기자회견을 열어야 하지 않을까요?”
경영진 한 명이 나섰다.
“그럴 필요 없어요. 이런 일에 일일이 대응하다간 원래 우리가 하려던 일도 못 해요. 그냥 언론에서 물어보면 거절했다고 하세요. 우리는 하나씩 나눠서 팔지 않을 거라고 덧붙이고.”
“네, 알겠습니다.”
이때, 갑자기 밖이 시끌시끌한 소리가 들렸다.
최소한 십여 명이 몰려오는 듯 북적거렸다.
소리만 들어도 경호 인원과 그들이 서로 몸싸움을 하는 게 훤하게 보였다.
-저희 왔습니다. 회장님 좀 나와 보세요.
-이런 식으로 나오면 곤란합니다.
-무조건 안 된다고만 하지 말고 말씀을 해 보세요.
-임시주총을 열어 회장 탄핵을 진행할 겁니다.
흐닝크 회장은 시끄러운 소리를 밖으로 흘리기 위해 창가로 가서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나,
창밖의 풍경도 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백 명의 주주들이 건물로 몰려들어 소리 지르고 있었다.
도대체 왜?
산타떼가 무슨 발표를 했길래 이 난리가 난거지?
“TV 좀 켜 봐요.”
흐닝크 회장의 말에 경영진 중 하나가 쪼르르 달려가 TV를 켰다.
[산타떼 960억 달러 제안. 더 놀라운 건 인수대금으로 현금 93% 지급 가능]
흐닝크 회장도 회장이지만 경영진은 놀라다 못해 허탈한 심정이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890억 달러를 현금으로 지급하겠다니.
은행에 그 많은 현금을 쌓아 놓고 있었다고?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아, 흐닝크 회장의 말을 오해하면 안 된다.
돈을 쌓아 놓고 있다고 진짜 현금을 금고에 쌓아 놓은 건 아니다.
은행은 전부 숫자로 왔다 갔다 하는 건데 현금이 있을 리 없지.
지금 말은 대출해 주지 않은 숫자상의 금액이 있다는 의미다.
“이거 또 언론이 나서서 저흴 때리겠는데요.”
아이고 머리야.
순간 흐닝크 회장의 머리에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이게 다 임재준 그놈 때문이야.
***
암스테르담 폰델 공원.
머리 식힐 겸 재준은 튤립이 활짝 피어 있는 공원을 거닐었다.
서형길은 쉴 새 없이 김 기자에게 정보를 제공했고 페렐라와 워서스틴은 법원을 들락날락하며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했다.
“이제 소식이 들려올 때가 됐는데.”
역시나 재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응, 펠그리니, 무슨 일이지?”
-보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리파이낸싱 추세선이 꺾였어?”
-네. 리파이낸싱 추세선이 꺾였고 주택가격 상승이 멈췄습니다. 이제 폭락만 남았습니다.
“좋아. 좋아. 퀴니코와 블록에게 CDS 매입 스톱하라고 해.”
-이미 시장에 나온 물량도 없습니다. 전부 이상 징후를 눈치채고 있습니다. 오히려 저희에게 CDS 매도할 의향이 없냐는 문의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단 문 걸어 잠그고 전화선 뽑아 버려.”
-하하하. 알겠습니다.
핸드폰을 끊고 잠시 핸드폰을 바라봤다.
많이 밝아졌는데.
처음엔 우울 모드더니.
띠리리링.
앤드류?
“그쪽도 심상치 않나 보네.”
-역시 알고 있군요.
“방금 펠그리니와 통화를 했거든.”
-로얄뱅크가 2분기 투자은행부분이 대규모 채권 평가손실을 입었다고 공시했습니다. 로얄뱅크 주가가 15%나 빠졌고요. 다른 은행들도 부외거래기구들이 청산되고 있습니다.
“산타떼 컨소시엄이 붕괴되면 안 돼. 적당히 당근을 주고 끌고 가도록 부추겨야 해. ABC암로는 산타떼가 먹어야 하는 건 알지?”
-알고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이번 ABC암로만 인수하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현금을 투입하며 주식과 맞바꾸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지금 포르티는 160억 달러, 로얄뱅크는 186억 달러 증자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드디어 독이 든 잔인 줄 알면서도 마시게 됐구나.
증자를 하면 당연히 주가는 하락하기 마련이다.
일상적인 시장이라면 2~3개월이면 주가가 회복되지만, 이제 곧 서브프라임 모기지가 터진다.
헤어나올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좋아. 나중에 정부로부터 다 받아 낼 거니까. 계속 매입해. 이제 곧 CDS 청산하며 수십조 달러가 들어올 거야.”
-윌켄은 어떻게 한대요?
“이제 전화 걸어 봐야지. 계속 수고.”
-네. 보스.
서서히 침몰하는데 자신들만 모른다.
서양인들의 특징이 그렇다.
한 번 시작하면 갈 데까지 달려야 직성이 풀리는 놈들.
이어서 재준은 윌켄에게 전화를 했다.
왠지 이런 배팅을 즐기고 있을 것 같은데.
-네. 보스.
“어때요. 클레이스는 버틸 만합니까?”
-위태롭지만 견디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려울 때 주식을 담보로 자금을 대주고 있습니다. 계획대로 외부에 작은 헤지펀드 하나 만들어서 클레이스 주식도 매집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 주고 몰아쳐야죠.”
-걱정 마십시오. 이쪽은 우리가 내미는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핸드폰을 닫고 기지개를 쭉 폈다.
“도련님.”
서형길 실장이 캔맥주를 한 아름 안고 달려왔다.
“아니, 마트를 털어왔습니까?”
“제가 언제 네덜란드를 또 와 보겠습니까? 유럽 맥주가 제 입맛에 딱 맞는데, 갈 때까지 죽도록 먹을 겁니다.”
하하하하.
푸슉.
공원 한가운데 호수 앞 벤치에 앉아 캔맥주를 하나씩 따서 마셨다.
카!
좋다.
“실장님. 해외에 나오니까 어떠십니까?”
재준의 질문에 피식하고 서형길 실장이 웃었다.
“처음 도착하고는 좋았는데 시간이 지나니까 한국이 더 좋네요. 말도 안 통하고 죽겠습니다.”
후후.
항상 이랬다.
죽겠다. 미치겠다. 못 해 먹겠다.
이러면서도 버티고 버티면서 내 옆에 있던 사람이다.
“실장님. 그 예전에 저 망나니였을 때 기억나십니까?”
“그럼요. 다 기억하죠.”
한 대 때릴까?
갑자기 욱하고 올라오네.
“사람은 자신을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땠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그때 실장님 눈에 전 어땠습니까?”
“그때는…….”
서형길은 예전의 재준을 기억해 봤다.
“백발로 물든 머리에 가죽 재킷. 싸움도 잘하셨고. 룸 몇 곳은 몇 달 문 닫기도 했죠, 아마. 다 때려 부숴서.”
“아니, 그런 거 말고요.”
“아, 좋은 추억도 있습니다.”
“정말요?”
“네. 길거리에서 현재증권 욕하는 놈들을 아주 곤죽이 되도록 패셨습니다. 그때 어찌나 통쾌하던지.”
“아, 그게 좋은 추억.”
그런 거 말고.
이놈은 매일 쌈만 하고 돌아다닌 거야?
“근데 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게 다 오늘을 위한 예행연습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연 그때 그 시절이 없었으면 오늘의 도련님이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ABC암로은행 아주 줘패버리세요.”
그래, 이제 슬슬 마무리를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