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4화 수익률이 얼마라고요? 1,000%요?(4)
일주일 전.
클레이스은행.
“어서 오세요. 윌켄. 이게 얼마 만입니까?”
클레이스은행의 IB사업부문인 클레이스캐피털을 맡고 있는 밥 다이돈 사장은 투마로우에서 온 윌켄을 정말 반갑게 맞았다.
10여 년 전 윌켄이 미국 인수시장을 뜨겁게 달굴 때 수차례 자금을 지원해서 아주 큰 수익을 벌어들이며 친분을 맺었었다.
“영영 이 세계를 떠난 줄 알았는데 투마로우라니요.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게요. 어쩌면 이제 떠나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아니, 왜요? 혹시 약점이라도 잡혔습니까?”
“잡혔지요. 재미라는 아주 큰 약점을 잡혔습니다.”
“재미요? 돈도 권력도 아닌 재미?”
하하하하.
“요 몇 년 투마로우 활약이 대단했다던데 거기에 푹 빠졌나 봅니다.”
“맞아요. 임재준. 정말 못 말리는 사람입니다. 도무지 무서움이 없어요. 거기다 천재적인 두뇌를 가졌고요.”
“임재준. 저희도 그를 항상 주시하고 있습니다. 근데……. 이렇게 영국에 온 거 보면 뭔가가 있군요?”
네.
윌켄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뭡니까? 갑자기 흥분되는데요. 윌켄이 어떤 이야기를 들고 왔는지.”
“클레이스와 함께 투마로우가 할 일이 있습니다.”
“진짜요? 함께 할 일이 뭔지 굉장히 궁금합니다.”
“ABC암로 합병.”
잠시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요? ABC암로?”
잠깐만. 잠깐만.
다이돈은 손을 들어 잠시 고요 속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일어서더니 두 번 왔다 갔다 한 후 물을 한 잔 벌컥벌컥 마셨다.
윌켄이 다이돈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욕심이 나시는군요.”
당연한 말을.
다이존은 윌켄을 바라보았다.
“윌켄, ABC암로와는 진출한 국가가 겹치는 부분이 거의 없어요. 포트폴리오도 다르고요. 저희는 투자은행 중점이지만 ABC암로는 오히려 미국 외 국가에서 투자은행 행보를 자제해 왔습니다.”
“하하하. 그렇지요. 만약 두 은행이 합병한다면 90개국의 거점과 4,700만 명의 고객, 리테일뱅킹, 프라이빗뱅킹, 자산운용, 투자은행, 신용카드, 프라이빗에쿼티까지 제3의 제국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제3의 제국.
제1제국은 얼반 그룹. 제2제국은 DSBC, 그다음 제국을 건설할 수 있다.
단순한 은행 순위가 아닌 금융제국.
이때, 프라이빗에쿼티는 벤처캐피털처럼 상장 전 기업에 투자하는 것이 아닌 상장한 기업을 대상으로 지분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투자하는 개별적 투자를 말한다.
물론 경영을 정상화시켜서 지분을 되파는 형태로 이익을 취한다.
꿀꺽.
다이돈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마른 침을 삼키고 또 삼켰다.
“제가 저희 회장을 설득하겠습니다. 아니, 반드시 이번 합병은 해야 합니다.”
“그러면 저희가 적극 돕겠습니다.”
그냥 도와줄 리는 없고.
“투마로우가 원하는 걸 말해 보세요.”
“저희는 ABC암로의 미국 투자은행 리살입니다.”
전에도 말했듯이 ABC암로는 미국의 네 곳의 은행을 합병하여 순위 9위의 투자은행 리살은행을 만들어 놓았다.
방만한 경영의 일인자답게 리살은행은 독자 경영을 했다.
그런데 독자 생존을 넘어 ABC암로 매출의 1/3을 책임질 정도로 커버렸다.
클레이스로선 아주 좋은 조건이었다.
리살은행이 크든 말든 투자은행이란 분야가 자신들의 영역과 겹친다.
그리고 리살이 커봐야 감히 영국 제일의 투자은행인 클레이스에 비할까.
“투마로우가 리살은행을 가져가면 이야기는 쉽게 풀리겠는데요.”
“리살은행의 인수 조건이면 ABC암로 합병 대금의 절반을 지원하겠습니다.”
“절반이나요?”
“얼마가 됐든지 간에요.”
윌켄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재준이 한 말을 떠올렸다.
-어차피 얼마라고 못을 박으면 클레이스가 합병 금액을 부풀리기 힘듭니다. 그냥 무조건 절반을 지원한다고 하세요. 앞뒤 안 가리고 덤벼들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뒤로 숨어야 합니다.
“너무 화끈한데요?”
“대신 한 가지, 저희 이름은 드러나지 않게 해 주십시오.”
“원한다면요. 저희에게 더 좋은 일입니다.”
“감사합니다.”
다이돈은 윌켄에게 미소를 지었다.
돈만 대겠다는데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컨소시엄을 구성했다가 나중에 수익을 가지고 티격태격 싸우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좋습니다. 시기는 언제가 좋을까요?”
“아마 조만간 저희 보스가 네덜란드를 뒤흔들어 놓을 겁니다. 그때, 가장 먼저 ABC암로에게 전화를 거십시오.”
“알겠습니다.”
임재준이 과연 어떻게 네덜란드를 흔들지 모르겠지만, 정말 기대되는데.
ABC암로라니. ABC암로라니.
***
일주일 후.
ABC암로.
경영진이 각자 한마디씩 내뱉는 통에 머리가 지끈거린 그 시간.
“다이돈 사장. 어쩐 일이십니까? 급하지 않은 전화면 제가 다시 하겠습니다. 지금 저희 사정이 좋지 않습니다.”
-하하하. 흐닝크 회장님. 그 고민 제가 해결해 드리려고 합니다.
“무슨 말씀이 십니까?”
-클레이스와 합병하시죠.
“네?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은 자세한 이야기를 나눌 수 없으니 일단 주주총회에 안건으로 올리고 한숨 돌리십시오. 후에 자문사들과 함께 합병에 대해 논의하는 건 어떠십니까?
흐닝크 사장은 다이돈이 부드럽게 말하고 있지만, 자신이 점점 벽으로 몰리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싫지만은 않았다.
당장 주주총회에서 합병안을 내밀면 지금 언론과 주주들은 한발 물러나 지켜볼 것이다.
이것도 괜찮은 것 같은데.
그러나 뭐든 의심하고 보는 금융인 본능이 말했다.
뭔가 찜찜하단 말이지.
“하지만 지금 경영진들에게 의견을 물어야 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말씀드리겠습니다. 합병 후 3년은 회장님이 CEO에 오르십시오. 다음 3년은 저희가 하겠습니다. 어떠십니까?
“저에게 먼저 CEO 자리를 양보하시는 겁니까?”
-어차피 저희는 투자은행 경영만 할 거니 크게 상관은 없습니다. ABC암로와 클레이스가 합병을 한다면 제3의 금융제국이 탄생하는 겁니다. 그 자리에 먼저 앉으시지요.
“금융제국!”
의심이 사라진다.
흐닝크가 지금까지 수백 건의 크고 작은 합병을 지휘한 이유가 무얼까.
바로 자신도 얼반 그룹이나 DSBC 같은 금융제국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흐흐.
임재준으로 촉발된 분할 논의가 이런 식으로 발전할 줄이야.
분할이든 합병이든 주주들에게 이익이 된다면 모두가 환영할 것이다.
기회다.
다시없는 기회.
내가 먼저 3년 동안 CEO에 앉는다면 클레이스를 몰아낼 수도 있다.
흐닝크.
네덜란드인.
저 가슴 밑바닥 근본에 제국주의가 자리 잡고 있는 인간.
뉴 암스테르담, 현재 세계 금융 중심인 뉴욕을 건설한 이가 누구인가?
바로 더치, 우리 네덜란드인이다.
뉴욕을 지배하는 건 네덜란드여야 한다.
움켜잡아야 한다.
“알겠습니다. 이번 주주총회에 안건으로 올리고 통과되면 만납시다. 만나서 얘기해 봅시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만.
주주총회는 당연히 통과될 거고.
좀 더 우리한테 유리한 쪽으로 합병을 이끌어야 한다.
주주총회까지 아직 시간은 있다.
흐닝크는 대충 통화 내용을 알아차리고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경영진들을 향했다.
“대충 무슨 이야긴지 알아들은 모양이군요. 우린 영국 제일의 투자은행 클레이스와 합병을 추진합니다. 주총 후에 본격적인 논의에 들어갈 겁니다. 이 합병을 유리하게 이끌 자문단을 꾸리세요. 시간이 없습니다. 움직이세요.”
이게 뭔 자다가 날벼락인가.
경영진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각 스페인.
산타떼은행.
유로존 시가총액으론 최대 은행.
재준이 합병한 프랑스의 사라크방크나 ABX지수를 이끈 도이츠방크, 제2의 금융제국 DSBC보다 시가총액은 크다.
이 산타떼은행에 앤드류가 방문했다.
물론 자의가 아닌 재준이 밀어 넣은 거지만.
그래도 할 수 없지, 보스가 까라면 까야지.
“어서 오세요. 투마로우에서 이런 누추한 곳까지 오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아, 뭐, 영광까지. 제가 영광이지요. 유럽 최고의 은행은 산타떼은행 아닙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자, 차 한잔하시죠.”
스페인 특유의 활기가 넘치는 에밀리아노 보틴은 꿀 국화차를 앤드류에게 내밀며 권했다.
앤드류는 입안 가득 퍼지는 국화 향을 느끼며 생각을 차분히 정리했다.
“보틴. 한 가지 제안을 하려고 왔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투마로우와 함께라면 절대 손해는 보지 않는다고 하던데 기대가 큽니다.”
“그렇게까지는 아닌데. 뭐, 요즘 ABC암로가 시끄러운 거 뉴스 들어서 아시죠?”
“알다마다요. 우리도 이런저런 경우의 수를 생각 중입니다. 유럽에서 ABC암로의 위치는 특별하니까요.”
“그럼, ABC암로와 합병도 생각해 보셨나요?”
“그럼요. 하지만 산타떼은행과 겹치는 부분이 대부분이라 큰 흥미는 없습니다.”
앤드류는 역시라고 생각했다.
보스, 과연 당신의 제안이 먹힐까요?
전혀 관심이 없는 것 같은데.
어디 찔러볼까?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필요한 부분만 가져갈 수 있는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겁니다.”
“필요한 부분이요?”
“네.”
앤드류는 재준의 말을 다시 떠올렸다.
-영국의 로얄뱅크는 투자은행. 베네룩스의 포르티네은행은 네덜란드의 국내사업부분 자산운용사업부분, 그리고 프라이빗뱅킹부분, 산타떼는 브라질과 이탈리아 은행을 권해 보면 답이 나올 거예요.
진짜일까?
“영국의 로얄뱅크와 베네룩스의 포르티네은행, 그리고 산타떼은행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필요한 것을 분할해 가져가는 겁니다.”
“컨소시엄이요?”
“산타떼는 브라질 은행과 이탈리아 은행에 관심이 있지 않습니까?”
“브라질과 이탈리아!”
에밀리아노는 앤드류의 제안에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당연히 관심 있지.
특히 브라질.
산타떼 에밀리아노는 산타떼 이름에 애착이 컸다.
산타떼 UK, 산타떼 USA, 산타떼 브라질, 산타떼 이탈리아를 붙여 전 세계를 지배하고 싶어 했다.
스페인도 무적함대라 불리는 시절이 있었던 제국주의가 뿌리 깊게 박혀있는 나라.
그리고 지금 스페인 금융을 통합하고 보니 돈이 넘쳐났다.
이대로 기업에 대출해 주는 것보다는 은행 인수나 합병으로 글로벌 은행이 되고 싶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든 첫 번째는 미국.
미국은 한창 인수와 합병을 거치더니 초대형 은행이 탄생했다.
탄생에 그치지 않고 세계 각국으로 진출해 금융 사슬을 구축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임재준.
그가 프랑스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두 개의 거대은행을 탄생시킴으로써 프랑스가 유럽에 떵떵거리며 큰소리를 치게 되었다.
곧바로 작업에 나선 에밀리아노는 스페인 대형 은행과 합병하며 유럽에서 가장 많은 여신을 가진 은행으로 거듭났다.
“브라질은 탐이 나긴 합니다.”
“투마로우가 자금을 대겠습니다.”
“정말입니까?”
“합병 금액의 절반을 대죠. 대신 합병 전 산타떼가 보유하는 로얄뱅크와 포르티은행 주식을 넘겨주십시오. 프리미엄을 얹어 드리겠습니다.”
“로얄뱅크와 포르티은행 주식?”
합병 후 두 은행의 가치를 가져가겠다?
전혀 상관없다.
“좋습니다.”
“다행이군요. 이미 로얄뱅크와 포르티은행이 이쪽으로 오고 있습니다.”
“정말입니까? 과연 투마로우는 다르군요.”
투마로우가 아니라 제 보스가 다른 겁니다.
무서운 인간 같으니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