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저거 세워서 압류해. 저거(6)
나쇼날파리의 지원(?)에 윌가의 공세가 주춤해지고 나쇼날파리는 한발 물러났다.
“파트리스, 헤알 200억 달러 정도만 긁어모아 두세요. 나중에 회복되면 돈 좀 될 겁니다.”
역시 재준과 함께 가면 길 가다가 자빠져도 돈을 줍는다.
브라질은 항복을 선언하고 자국 화폐의 평가절하를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월가는 공매도로 막대한 이득을 취했다.
자신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준 이가 누구인지 기억했다.
투마로우를 찬양하라.
임재준을 기억하라.
이제 남미는 아르헨티나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처참한 패전국 아르헨티나.
그런데 뜻밖에 프랑스 사라크방크에서 아르헨티나에 100억 달러의 차입을 해 주겠다는 제안을 했다.
단, 담보로 정부 소유의 원유 생산 설비를 요구했다.
이걸 받아야 하나.
프랑스와 투마로우 유착 관계를 모르는 이가 없는데 갑자기 돈을 빌려주겠다고?
원유를 차지하려는 속셈이 분명한데.
아르헨티나 정부는 지금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덥석 사라크방크의 100억 달러 차입을 받아들였다.
이거라도 먹자.
그리고 월가의 시선이 하나둘 한곳으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썩어도 너무 썩었구나.
그렇다면 우리가 망설일 이유가 없지.
탐욕에 합리화가 덧씌워지는 순간이었다.
***
프랑스 번화가의 어느 한적한 레스토랑.
재준이 저녁 시간을 통째로 예약을 해서 평소라면 북적여야 할 레스토랑은 조용하고 여유로웠다.
투마로우 팀과 사라크방크 행장, 나쇼날파리의 파트리스도 참석했다.
이들은 화려하게 차려진 프랑스 음식들과 와인을 즐겼다.
재준이 사라크방크 행장에게 감사의 잔을 들었다.
“아르헨티나 원유는 감사합니다.”
“아직 속단하기 이르지 않습니까? 100억 달러가 들어갔는데 환율 방어에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재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지.
“페렐라, 노트북으로 오늘 아르헨티나 환율 좀 띄워주겠어?”
“알겠습니다.”
페렐라가 노트북을 켜서 가운데 놓았다.
쯧쯧쯧.
재준은 혀를 차며 그래프를 손으로 가리켰다.
“요 며칠 우리와 월가는 아르헨티나 페소 공매도를 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그때에 비해 아주 약간 하락하고 마감했습니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벌써 먹고 튀었구나.
사라크방크 행장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차입금을 사용하지 않았군요.”
“네, 의지가 보이지 않습니다. 틀려먹었어요.”
“그럼, 일부러 100억 달러나 들여서 확인해 본 겁니까?”
“뭐 그런 면도 있지만 어쨌든 원유를 얻었으니 됐습니다.”
“운영하려고요?”
“아니요? 저는 사업가가 아니라니까요. 전 금융가입니다. 저런 건 줘도 운영 못 합니다.”
재준은 윌켄을 향해 잔을 들었다.
“윌켄, 저 시설을 사 줄 만한 회사를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딱 어울리는 입찰 전문인이 있습니다.”
윌켄이 핸드폰을 들어 한 군데에 전화를 하더니 ‘그레이트’를 두 번 외치고 끊었다.
“최소한 네 군데 회사에서 입찰이 들어올 겁니다. 우린 좀 더 비싼 회사에 팔면 됩니다. 최소한 200억 달러 이상은 벌 수 있을 겁니다.”
“수고했어요. 윌켄.”
파트리스는 여전히 재준의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얼굴 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진짜 돈에 대해서 너무 초연해.
어떻게 100억 달러, 200억 달러를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걸까.
파트리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이제 투마로우가 아르헨티나 공격에 직접 나서는 겁니까?”
“그렇죠. 약속받은 게 있으니 현 대통령 세력을 아르헨티나 역사상 세상에 둘도 없는 쓰레기로 만들 겁니다.”
“약속이라뇨?”
“차기 대통령이 될 사람과 딜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라면 한 번에 갚지는 못해도 400억 달러 원금 전액을 지불할 겁니다.”
“그렇군요.”
파트리스는 급격하게 변한 금융계를 떠올렸다.
이제 은행이 나라도 좌지우지하는 시대가 열렸구나.
***
호텔 마르티네 펜트하우스 스위트 룸.
다음 날 장이 개장되자 대량의 아르헨티나 페소 공매도가 쏟아졌다.
깜짝 놀란 아르헨티나 중앙은행은 먼저 50억 페소를 내던지며 환율 하락을 막았다.
하지만 버티는 것도 1시간을 넘기지 못하고 다시 하락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100억 페소 공매도가 시장에 떨어졌다.
그러나 이번엔 아르헨티나가 그 여파를 받아내지 못했다.
다급하게 중앙은행이 불을 끄려고 금리 카드를 꺼냈다.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총재 2% 전격 금리 인상 결정]
금리가 인상되면 돈이 은행으로 몰리고 그 돈으로 방어에 나설 계획이었다.
그러나 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외면한 아르헨티나 페소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제 아르헨티나는 아무것도 할 게 없다.
중앙은행은 페소화 하락을 막을 수 없고 금리를 올려도 돈은 들어오지 않는다.
그리고 워서스틴의 핸드폰이 울렸다.
“네. 워서스틴입니다.”
-아르헨티나 대통령입니다. 내가 졌소. 원금을 갚겠소.
워서스틴이 재준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재준은 고개를 저으며 엄지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마지막 목을 따.
“대통령님.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 저희 네트워크가 멈추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왔습니다. 건투를 빌겠습니다. 그럼 이만.”
워서스틴이 전화를 끊자 재준이 엄지를 치켜세웠다.
“자, 아직 끝난 게 아냐. 모두 아르헨티나의 채권을 사들여.”
“왜죠? 이제 쓰레기가 될 건데.”
“아르헨티나는 경기를 부양하려면 금리를 더 인하할 수밖에 없어. 그럼 채권 가격은 올라가겠지. 우린 그 마지막도 챙긴다.”
“아.”
퀴니코는 다시 재준을 향해 존경 어린 시선을 보냈다.
진짜 인정사정없어.
나는 보스에 비하면 미친개도 아니다.
어떻게 저렇게 감정이라곤 한 줌도 없는 사람처럼 상대를 몰아붙일까.
이제 아르헨티나뿐 아니라 남미 전체가 보스와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겠네.
***
이틀 후.
투마로우와 윌가의 공매도는 쉬지 않고 아르헨티나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어디서 기어 나왔는지 쏟아지는 채권을 투마로우는 쓸어 담았다.
주가가 폭락한다고, 환율이 폭등한다고 국민들 생활이 어려워질까?
아니다. 사실 국민들은 거의 체감하지 못한다.
국민들이 실제 느낄 수 있는 건 물가니까.
하지만 처음에는 ‘어차피 정치인이나 기업인이나 하는 짓이 그렇지 뭐’ 하던 국민들조차 두려움을 느낄 정도로 페소가 무너졌다.
이때 재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키칠로.
이제 당신을 만날 차례인가.
“네. 키칠로.”
-이제 저희가 마무리하겠습니다. 멈춰 주십시오.
“그러세요. 하지만 마무리가 좋지 않을 시에는 다시 시작합니다.”
-오늘 장이 끝나면 지금 대통령의 비리와 탄핵안이 발표될 겁니다.
“그렇군요. 정리되는 대로 연락하세요. 그래도 서로 얼굴을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네. 곧 만나 뵈러 가겠습니다.
“수고하세요.”
핸드폰을 끊고 모두를 바라봤다.
“윌켄, 월가에 통보하세요. 작전 끝났으니 떠나라고.”
“알겠습니다.”
재준은 어깨를 으쓱했다.
“이제 정말 끝난 것 같은데.”
하하하하하.
평소에 웃어야 할 워서스틴이 아닌 퀴니코가 박장대소를 하기 시작했다.
쟤 왜 저래?
“보스, 사랑합니다. 정말.”
너 왜 그러니.
나 그런 사람 아니다.
재준은 모두를 보며 만족스러운 듯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 이제 샴페인을 터뜨려도 될까?”
“제가 주문하겠습니다.”
“페렐라, 이름을 까먹었는데 5,000불짜리 샴페인 있지?”
“아, 크루그 끌로 드 당보네 말하는 거군요.”
“가능하면 그걸로 열 병만 주문해줘.”
“열 병이나? 아니, 알겠습니다.”
모자라느니 넘치는 게 낫지.
페렐라가 주문을 마치고 30분 만에 벨이 울렸다.
30분이나 걸리다니, 파리에 있는 크루드 끌로 드 당보네를 다 긁어모았나 보다.
띵.
룸서비스로 샴페인이 도착했다는 벨이 울렸다.
다들 죽었어.
제일 먼저 총알처럼 튀어 나간 건 저돌적 인간 워서스틴이 아니라 미친개 퀴니코였다.
문을 열자마자 샴페인을 낚아채더니 힘차게 흔들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퀴니코, 뭐 하자는 거지.
하하하, 선공은 나의 것.
“저놈 잡아. 저거 빼앗아.”
“그럴 시간에 다른 샴페인을 들어야지.”
이번엔 워서스틴이 샴페인을 향해 돌진.
하지만 퀴니코의 샴페인이 터지면서 워서스틴의 얼굴에 정확히 명중했다.
샴페인 세례를 맞은 워서스틴은 흠뻑 젖은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소매를 따라 샴페인이 뚝뚝 떨어졌다.
“흐흐흐, 이런 퀴니코. 너 죽고 싶어?”
“어디 샴페인에 맞아 죽어 볼까. 그전에 내 거 한방 더.”
슬금슬금.
워서스틴과 퀴니코의 샴페인 혈전을 지켜보던 윌켄이 뒤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허, 그럼 안되지.”
재준이 어느새 한 손에 샴페인 철사를 풀고 있었다.
“보스, 난 이런 거 익숙지 않아요. 신사. 신사답게 굽시다.”
“신사는 얼어 죽을. 일단 맞고 시작합시다.”
재준의 샴페인 분수가 윌켄의 안면에 적중했다.
푸악.
재준이 샴페인 세례를 윌켄에게 퍼붓고 있을 때 페렐라가 재준의 뒤에서 음흉한 웃음을 흘렸다.
흐흐흐.
보스?
안 돼.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아직 문 앞에 서서 이 끔찍한 광경을 지켜보던 호텔 직원 둘은 아연실색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저거 크루그 끌로 드 당보네 프레스티지급 아니냐?”
“맞지. 한 병에 5,000달러 하는 건데.”
“지금 저걸 서로한테 뿌리고 있는 거지? 마시지 않고.”
그렇게 보이네.
“재벌들이란…….”
한동안 이어지던 광란의 샴페인 싸움이 끝나고.
다들 샤워를 한 후 다른 스위트 룸으로 옮겼다.
잠시 방 청소를 하는 관계로.
이번엔 5,000달러짜리 샴페인을 맛과 향을 음미하며 마셨다.
알싸한 청량감이 목구멍을 넘어가며 상큼한 향이 온몸에 퍼졌다.
“기분이 좋아지게 하는 술이네.”
“그만큼 비싸기도 하죠.”
페렐라가 절반 남은 잔을 단숨에 넘기며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재준에게 물었다.
“참, 보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어제 연준 회장이 한 말 기억해요?”
“왜 갑자기 일 얘기야?”
“연방 공개 시장 위원회(FOMC)는 충분한 경제적 성장을 촉진할 필요가 있는 이상, 매우 조절적인 정책을 고수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조절적인? 이 말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헷갈려서요.”
재준은 페렐라의 말에서 연준 회장의 굳은 의지를 느꼈다.
왜 모르겠는가?
저 말로 인해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가 촉발된 건데.
이 말을 반대로 해석해 보면.
‘경제적 성장이 충분치가 않으니 시장을 조절하겠다’는 의미이다.
조절.
2001년에 연준 회장이 한 말이다.
IT 버블이 꺼지면서 연준이 금리를 6번이나 인상했다.
은행 돈이 국채로 몰리며 국채로 전부 짭짤한 이득을 봤다.
즉, 시장을 안정시키려 했는데 엄한 놈들이 돈을 벌었다는 뜻이다.
재준은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헷갈리긴 뭐가 헷갈려. 지금까지 잘 해 먹었으니 그만 꺼지라는 거지.”
“그게 그렇게 해석이 되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