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저거 세워서 압류해. 저거(4)
대통령의 질문에 재무장관은 바로 대답했다.
“당장 국제해양법재판소에 제소하겠습니다. 두 달 안에 마무리될 겁니다.”
“그건 좀 다행이군요. 어쨌든 서두릅시다.”
“네. 그럼 이만.”
재무장관이 나가자 대통령은 소파에 몸을 던졌다.
세상에 이런 악랄한 은행이 있다니.
가만, 지금 가나라고 했지.
미국도 모자라 아프리카까지 뒤지고 다니는 건가?
이거 골치 아프게 생겼는데.
이건 경고다.
아르헨티나 밖으로 나가면 뭐든 다 압류하겠다는.
국내도 엉망진창인데 국외까지 신경을 써야 한다니.
가장 시급한 것은 이번 달 말까지 신채권 소유자들에게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하지만 이자는 투마로우의 승소로 미국 내 은행에 묶여있다.
만약 이자를 지급하지 못하면 또 디폴트를 선언해야 한다.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야 하는데.
자의든 타의든 이자 한 번 안 주고 디폴트를 선언한다는 것은 앞으로 그 어떤 나라도 아르헨티나를 믿지 못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내가 대통령으로 있을 때는 절대 안 돼.
차기 대통령에게 미루어야 해.
아 뭐가 이리 복잡하게 꼬인 거야?
똑똑.
또 무슨 일이야. 도대체 또.
“들어와요.”
이번엔 비서실장이 끙끙대는 모양새로 들어왔다.
“왜? 왜 그렇게 고민이 잔뜩 있는 사람처럼 들어오나?”
“저, 미국 연방지방법원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뭐라고?”
“중재를 서 줄 테니. 대표단을 보내랍니다.”
“그럼, 재무장관이 가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까지 일 처리를 다 했는데. 그보다 더 많이 아는 사람이 없잖아.”
비서실장은 그건 그렇지만 그건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보다, 지금 재무장관은 좀 끌려다니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강경한 사람을 앉히고 그를 보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게 시간을 끌기에는 강경파가 낫지.
“강경한 사람? 예를 들면 누구? 혹시 생각해 둔 사람이 있나?”
“마르크스 경제학을 전공한 대학교수 출신 악셀 키칠로입니다.”
“뭐? 키칠로? 그 사람 쌈닭이잖아. 그런 사람을 재무장관에 앉히면 중앙은행 총재와 시도 때도 없이 부딪힐 텐데.”
비서실장이 은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대통령을 향해 몸을 숙였다.
“한 번 쓰고 버리시면 됩니다.”
“한 번 쓰고 버려?”
음.
괜찮은 생각이다.
투마로우의 임재준이란 놈이 보통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사실 지금 재무장관은 상대가 안 되는 건 확실하고.
보다 더 강한 놈으로 대결을 붙인다.
그리고 이번만 쓰고 버린다.
괜찮아.
그리고 또 새로운 장관을 앉히고.
누가 뭐라 그러겠어?
지금 아르헨티나가 보통 상황인가?
이런 시기에 장관이 자주 바뀐다면 이런저런 시도 중이라고 하면 되지.
국민은 이런 일에 도리어 희망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럼, 키칠로에게 은밀히 의중을 물어보고 확신이 있다면 발표해.”
“네. 알겠습니다.”
졸지에 재무장관은 경질되고 키칠로라는 42세의 젊은 교수가 재무장관에 임명되었다.
그는 장관에 임명되자마자 팀을 꾸려 미국으로 향했다.
***
연방준비은행 회의실.
투마로우 측과 아르헨티나 측 사람들이 마주 보고 앉고, 특별 중재관인 파산법 변호사 다니엘 폴락이 중앙에 앉아있었다.
사실 폴락의 역할은 없다.
그저 앉아서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일 뿐.
아르헨티나 측은 키칠로를 중심으로 하여 마치 전쟁이라도 참전한 눈빛으로 투마로우 측을 노려봤는데. 그에 반해 투마로우 사람들은 환한 얼굴로 농담을 주고받았다.
-기사 봤냐? 보스 장난 아니더라.
-그러게 기중기에는 왜 올라간 거야?
-다음엔 말려야 해. 정말 위험한 짓이야.
-퀴니코, 아직 보스를 모르지? 말리면 더 위험해져.
-하긴, 근데 보스는 언제 오는 거야?
-이제 올걸?
가운데 자리가 비어있는 걸 보니 재준이 아직 도착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
익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 다들 일찍 왔네요. 죄송합니다. 좀 늦었습니다. 아이, 참, 비가 오고 지랄이야.”
쾅! 쾅!
재준이 구두에 묻은 물방울을 털어내려고 바닥을 두 번 내리쳤다.
상대의 심정을 일부러 긁는 신경전으로 시작했다.
“보스, 밖에 비 와요?”
페렐라가 맞장구를 쳐 줬다.
“그러네.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어. 가만, 갈 때 우산 필요하잖아. 우산. 우산. 저 사람들도 우산은 없을 테고.”
재준은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아, 난데. 비가 오네. 여기 아르헨티나 사람들 집에 갈 때 우산을 선물해야 하니까 비닐우산 열댓 개만 사와. 응. 그래.”
재준의 선전포고에 키칠로가 인상을 구겼다.
비닐우산?
가만있을 키칠로가 아니었다.
“필요 없습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키칠로가 크게 소리 질렀다.
재준은 키칠로를 빤히 쳐다봤다.
아니, 왜 소리는 지르고 그래?
음, 네가 키칠로구나.
젊어서 장관이 되니 뭐 꿀리긴 싫다 이거지?
“그럼 비 맞고 가든가. 비싼 양복 다 젖게 생겼네.”
좀 있으면 디폴트 맞을 인간들이 양복은 왜 이렇게 좋은 거야?
다 들으라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재준이 가운데 자리에 앉았다.
그런 뒤 쭉 한번 돌아보고는,
“뭐 중재라고 해서 오긴 왔는데. 전처럼 헛소리할 거면 그냥 일어나죠. 돈은 준비가 됐어요? 표정 보니 안 된 거 같은데.”
재준의 말을 흘린 키칠로가 서류 하나를 들이밀었다.
[760만 달러 손해배상 청구 소송]
가나에 정박하고 있는 아르헨티나 훈련함이 가나 항구를 점거하고 있어서 가나 정부가 손해를 봤다는 소송이었다.
근데 문제는 이 소송을 건 사람이.
“이 소송을 왜 투마로우가 거는 겁니까?”
재준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했다.
“왜? 소송을 대신 해주면 안 되는 건가요? 가나 정부로서는 얼마나 억울하겠어요? 어떤 한심한 선장이 배를 항구에 대고 갈 생각을 안 하고 있는데.”
“그건 당신들이 몰수해서 그렇게 된 거 아닙니까?”
“그래? 그럼 몰수는 왜 당한 건데요?”
“그건…….”
“거봐, 당신들이 잘못한 거잖아. 따지려면 돈이나 갚고 따져야지. 아무 데나 들이밀려고 그래요? 돈 가져왔어요?”
말끝마다 돈 돈 돈.
키칠로는 자료를 뒤적이며 재준의 말을 흘렸다.
“돈 가져왔냐고요?”
“우리는 채무에 대해 성실히 임할 겁니다. 걱정 마세요.”
“그래요? 어떤 성실을 말하는 건가요?”
“지금 이렇게 나온 것도 그 증거입니다.”
음.
재준이 참 한심한 놈이란 표정으로 키칠로를 바라보았다.
“이봐요. 자꾸 시간을 끄는 것 같은데. 아르헨티나는 도망갈 궁리 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는 게 좋을 텐데. 또 디폴트 선언하면 나라가 어떻게 되는지 알죠?”
“당신이 걱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요? 설마 디폴트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모르는 건 아니죠? 혹시 모르니 내가 말해줄게요. 그나마 버티던 경기는 더욱 악화되고 실업률은 높아지고 인플레이션은 급증하고 국민은 기본 생활비도 모자라게 될 겁니다. 그런데 그래도 괜찮다? 하긴 자기 주머닛돈은 마르지 않을 테니. 누가 굶어 죽든 말든 무슨 상관이겠어. 안 그래요? 윌켄.”
재준의 말을 이어받은 윌켄이 빈정거리는 투로 받았다.
“개발 도상 국가의 국민들이 가난한 이유는 그들 정치와 경제 제도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니까요.”
뭐라고?
키칠로가 벌떡 일어섰다.
“당신 같은 사람들하고 절대 타협을 할 수 없어.”
“타협?”
재준이 의자 뒤로 몸을 기대며 말했다.
“요즘은 빚쟁이들이 돈 갚는 걸 타협이라 부르나? 참 이상한 나라에서 살고 계시네.”
쿵!
재준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이봐, 애송이 장관님. 당신은 자기 눈에 죽어가는 나라가 보이지 않죠? 재무장관이라고 자리 하나 주니까 힘 한번 써보고 싶고 막 뭔가 하고 싶고. 그러니까 이런 자리도 나오고. 근데 지금 무슨 일로 나온 건지는 알고 있나? 당신 여기 빛 갚으러 나왔다는 걸 제대로 알고 있어요? 당신은 채무자고 내가 채권자인데. 그런 고자세는 채무자의 자세가 아니에요. 돈 앞에선 나라도 망하게 할 수 있단 걸 보여줄까?”
“뭐라고?”
“어디서 건방지게 400억 달러나 빚지고 큰소리를 치는 거야? 400억 달러면 당신 나라 일 년 예산보다 많은 돈이야. 알아? 그 많은 돈 빌려다가 다 어디다 쓴 거냐고. 당신 주머니에 집어넣은 거잖아. 그래,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그런데 왜 안 갚아?”
“난 모르는 일이야.”
“그럼 알게 하든가? 뭐 보아하니 마르크스 경제학을 배웠다는데 마르크스한테서 성질만 배우고 지식은 안 배운 건가? 하여튼 재무장관들이 왜 다들 이 모양인지. 가서 데모라도 하세요. 대통령 이하 각료들 기업들 사재 털면 이깟 400억 갚고도 남아.”
“당신과 말을 섞지 않겠어.”
재준은 한심하다는 신문 한 부를 꺼내 탁자에 올렸다.
[아르헨티나 대통령 일가 유럽 쇼핑]
[아르헨티나 대표단 하루 수천 만 원하는 고급 호텔에서 묵어]
“말은 섞지 않아도 돼요. 눈은 있겠지. 어째 디폴트를 시도하는 나라 같지 않죠. 내가 이러니 빚을 깎아 줄 수가 없어. 안 그래요? 앞에선 돈이 없다고 비굴한 표정은 다 지으면서 뒤에서 돈을 펑펑 써대고 있잖아요.”
키칠로는 옆에 있는 비서를 노려봤다.
우리가 묵은 호텔이 그렇게 비싼 곳이었나?
비서는 고개를 푹 숙이고 키칠로의 시선을 외면했다.
“우리를 괴롭히려고 준비를 많이 하고 계시군요.”
“말귀를 못 알아먹네요.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 돈을 갚으라는 거예요.”
“정말 말끝마다 돈 돈 돈 돈 얘기 좀 그만합시다.”
“아, 그래요? 그럼 빚 갚으세요. 빚 빚 빚.”
“갚을 겁니다.”
“언제?”
“…….”
“에이 그만합시다. 재미도 없는데. 이런 대화를 할 때마다 제자리네요.”
재준이 일어나자 키칠로가 한마디 했다.
“좋아요. 채무 전액 상환하겠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렵습니다. 방법이 있는데 도와주시겠습니까?”
뭐지? 이 어색함은?
“말해 보세요.”
“단둘이.”
“괜찮아요. 제 팀은 모든 정보를 공유합니다.”
“저기.”
키칠로의 시선이 중재관에게 향했다.
중재관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키칠로는 문이 닫히는 걸 확인하고 나직이 말했다.
“이제 대통령 선거가 얼마 안 남았습니다. 지금 대통령은 투마로우와 절대 협상하지 않을 겁니다. 자신이 책임지기 싫으니까요.”
재준이 의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자 키칠로가 표정을 굳혔다.
적의도 없고 의심도 없다.
“그래서 내가 도울 일이 무언가요?”
음.
“디폴트를 선언하게 만들어 주십시오.”
와, 이놈도 같은 놈인가.
“저희 쪽에서 대통령으로 미는 분은 국민을 위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까요?”
“투마로우 전액 배상을 약속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지금 대통령과 각료들의 재산을 몰수해서.”
그래? 네 돈은 안 내놓고?
“그냥은 안 되고 각서라도 있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키칠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녹음기를 하나 꺼내 재준에게 건넸다.
“여기.”
이 정도 각오는 돼 있다?
약속을 안 지키면 녹음을 언론에 뿌려도 된다?
그럼 원하는 대로 지금 대통령을 거칠게 다루어야겠네.
“퀴니코, 페소(아르헨티나 화폐) 공매도 좀 쳐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