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저거 세워서 압류해. 저거(3)
투마로우 금융지주회사.
연방대법원이 투마로우의 손을 들어준 판결 이후 핵심 멤버가 한자리에 모였다.
재판에서 승소하면 뭐해?
아르헨티나 국가가 돈을 못 주겠다고 버티면 그만인데.
그렇다고 나라에 강제 집행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투마로우가 아르헨티나 재무장관을 움직여 원금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현실적으로 하나도 없었다.
재준은 찜찜한 얼굴로 모두를 둘러 보았다.
“소송에서 이기긴 했지만, 우리 수중엔 아무것도 없네요. 이럴 땐 강제 집행밖에 없는데. 강제 집행할 뭐 좋은 물건이 없을까요?”
저돌적인 워서스틴이 대뜸 나섰다.
“아르헨티나 정부 자산을 압류하는 건 어떻습니까?”
“안 돼. 정부 자산은 주권 면제법으로 보호를 받고 있어.”
페렐라가 워서스틴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재준은 다르게 생각했다.
“아니야. 그것도 괜찮은 방법이야.”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안 될 게 뻔할 텐데요.”
“면제법의 보호를 받는 것이지 압류를 못 하는 건 아니잖아. 우리가 팔아먹는 것도 아니고 돈 줄 때까지 압류하겠다는 건데. 어딘가 하나는 주권 면제법이 적용되는 않는 곳이 있을 거야. 그리고 우리가 압류 소송을 걸면 아르헨티나도 변호사를 선임하여 대응해야 할 거고. 그게 한두 개가 아니라면 얼마나 지겹겠어? 어디서 뭐가 날아올지 걱정이 태산이 되겠지. 우린 느긋하게 소송을 남발하면 돼.”
윌켄이 가능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1차는 시간을 정해서 한꺼번에 공격해야 합니다.”
“언제가 좋을까요?”
“가능하면 빠른 게 좋겠지요.”
“그럼, 한 달 뒤로 합시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강제 집행할 물건은 어디가 좋을까요?”
워서스틴이 손을 살짝 들고 말했다.
“우선 아르헨티나 중앙은행 준비금에 압류를 걸겠습니다.”
“좋아. 아주 좋은 생각이야. 깜짝 놀라겠는데.”
페렐라가 다음을 이어받았다.
“그럼, 난 아르헨티나 연기금 자산.”
“아주 좋아. 친구 둘이 아르헨티나로 날아가 폭탄을 안겨주라고.”
퀴니코가 웃으며 말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아르헨티나 인공위성 발사대가 있습니다. 전 거길 맡겠습니다.”
“이거, 이거. 좋은 먹이가 가까운 데 있었네. 자기들 인공위성 발사대는 아르헨티나에 세우지 왜 미국에 세운 거야? 아주 압류하라고 미래를 내다보셨구만. 좋아, 좋아. 보이는 대로 다 걸어 버려.”
재준은 마지막으로 박민수를 봤다.
헉!
박민수는 왠지 모를 서늘한 기운이 자신을 감싸는 걸 느꼈다.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다.
“저 바쁩니다.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있습니다.”
재준은 박민수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박 실장님, 우린 윌켄과 함께 아프리카로 가야 하니 준비합시다.”
“내 말을 안 들은 겁니까? 저 바쁘다니까요.”
“알아요. 그러니까 가야지. 한적하게 아프리카를 여행할 텐데.”
“아프리카라뇨? 거길 왜 갑니까?”
“왜 가다뇨? 아르헨티나 자산을 찾으러 슬슬 한 바퀴 돌아 보려고요.”
“아니 방금 말한 중앙은행 준비금이나 연기금 자산, 인공위성 발사대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요.”
“충분하지 않아요. 400억 달러를 다 받으려면 아주 정신이 하나도 없게 만들어야 한다니까.”
재준의 기억으로는 위에 나열한 시도들도 좋았지만, 성공적이고 매력적인 공격은 바로 아프리카에서 일어난다.
“자, 한 달 후 일제히 공격에 들어갑니다.”
***
가나의 테마항.
재준은 길이가 100미터도 넘는 배를 올려다보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프라가타 리베르타드’란 이름을 가진 아르헨티나 훈련함이 사관생도 100명과 아르헨티나 해군 69명, 승조원 222명을 태우고 막 정박한 순간이었다.
그렇지, 그렇지. 아주 제때 딱 맞춰 들어왔네.
어디 보자, 크긴 크네. 이거 팔면 얼마나 하려나.
재준은 핸드폰을 꺼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윌켄, 지금 시작하라고 모두에게 알리세요.”
-알겠습니다.
재준이 빙글 웃으며 통화를 마치자.
헐레벌떡.
박민수가 멀리서 무언가 손에 들고 흔들며 재준을 향해 뛰어왔다.
“여기, 받았어요. 받았어.”
“빨리, 빨리. 애들 내리려고 해요. 빨리.”
거친 숨을 몰아쉰 박민수가 거의 초죽음이 다 된 모습으로 손에 든 무언가를 재준에게 내밀었다.
선박 압수 명령서.
잠시 후.
가나 경찰이 모습을 드러내고 재준에게 다가왔다.
“이 군함입니까?”
“음. 서류를 보니 딱 이 배가 맞습니다.”
경찰서장쯤 돼 보이는 사람이 뒤에 있는 부하들에게 앞으로 전진하라는 손짓을 보냈다.
“배 위에 있는 사람은 다 끌어 내려.”
옛썰.
경찰이 군함으로 진격하려는 순간 뭔가 잘못됐단 것을 눈치챈 아르헨티나 해군이 후다닥 입구를 막아섰다.
“무슨 일입니까? 우린 아르헨티나 해군입니다.”
“그래서요. 우린 가나 경찰입니다. 이 배는 압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모두 내리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들이야말로 뒤로 물러나세요.”
서로 몸싸움 직전의 상황에서 옥신각신 말로만 간을 보고 있을 때.
“어, 거, 이봐. 군인 아저씨들. 이 배 압류당했다고. 나가라고. 왜 남의 배에서 허락도 없이 물러나라 말라야? 바쁘니까 어서 내려요.”
재준이 선박 압수 명령서를 해군 장교 눈앞에 들이밀며 말했다.
명령서를 본 해군 장교 안면이 심하게 일그러지며 휙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전원 전투 준비.”
뭐? 전투 준비?
재준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앞으로 나가려는데 경찰서장이 잡고 뒤로 물러났다.
“안 됩니다. 일단 물러나서 상황을 지켜봅시다.”
“와! 역시 무식한 놈들. 진짜 BJ의 대가들이다. 다들 자신에게 불리하면 무조건 우기고 보네. 이제 아예 총을 들어?”
“대폰데요.”
“네?”
재준이 고개를 들자 해군 함정의 포가 서서히 움직이고 있었다.
오호, 아주 막 나가겠다 이거지.
재준은 경찰서장을 향해 돌아서며 말했다.
“기중기 한 대 동원해 주세요.”
“기중기요?”
“네.”
“그걸로 뭐하시게요?”
“빨간 딱지 붙이게.”
“네? 빨간 딱지?”
아, 빨간 딱지를 모르려나.
“암튼 국제적 압류 표시를 붙여 놓을 겁니다.”
“네. 수소문해 드리겠습니다.”
고개를 갸우뚱거린 경찰서장은 부하직원에게 명령을 내렸다.
걱정 많은 박민수가 재준에게 다가왔다.
“그게, 하라고 해서 하긴 했는데 어떻게 압수 명령이 떨어질 걸 알았어요? 아니, 그보다 저 배가 여길 들어오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거참, 역사책에 다 나와 있다니까.
“여긴 아프리카잖아요.”
“그렇죠.”
“유럽의 관할 지역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어디에 대형 은행이 있는지 아시죠?”
“아, 프랑스.”
“맞아요. 프랑스 정부의 대외안보총국의 힘을 빌렸죠.”
“아, 역시. 정보는 힘이군요.”
박민수가 이해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을 때.
기이이이이잉.
기중기 한 대가 다가왔다.
“박 팀장님. 여기서 사진 잘 찍으세요. 나중에 증거 자료로 제출하게.”
“뭐하시게요?”
“기중기 타고 저 군함 꼭대기에 이거 붙이려고.”
재준이 선박 압수 명령서를 들어 보였다.
“네?”
미친 거 아냐?
저기 지금 대포로 무장하고 있는데?
“다시 한 번 생각하시죠?”
경찰서장도 다가와 재준을 말렸다.
“잠시 물러나 계세요. 저런 놈들한테는 좋게좋게 대하면 안 됩니다. 우리도 물러나지 않는다는 걸 보여줘야 해요. 기다리세요.”
재준이 기중기 기사에게 이야기하자 기중기 끝에 발판이 장착되었다.
그 위에 올라서 신호를 내리자 함선 꼭대기를 향해 기중기 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 어, 어.
기중기 붐이 움직일 때마다 지켜보던 사람들도 일제히 몸을 같이 움직였다.
해군 장교가 메가폰을 잡고 소리쳤다.
“위험합니다. 당장 내려가세요. 안 그러면 발포합니다.”
재준도 메가폰을 집어 들었다.
“지금 당신들이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 거 몰라? 빨리 배에서 내려.”
“저희 군인입니다. 군인이 어떻게 배를 버립니까?”
“군인은 법을 안 지켜도 되나? 이거 안 보여? 이거. 저기 보이지?”
재준이 박민수를 가리켰다.
“이거 다 촬영되고 있어. 허튼짓하면 당신들은 전부 영창 가게 될 거야.”
해군 장교는 재준을 노려보더니.
으차!
재준이 드디어 함선 꼭대기에 선박 압수 명령서를 붙이려는 순간.
함선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어어어어어어.
재준이 비틀거리며 흔들리자 사람들도 따라 움직였다.
다시 붙이려 하자.
다시 흔들.
어어어어어어.
“거, 일부러 배 움직이는 거 아닙니까?”
“바람이 불어서 그런 겁니다.”
“바람은 개뿔.”
재준이 손가락에 침을 묻혀 들어 올렸다.
“하나도 안 불잖아. 한 번만 더 허튼짓했다간 봐.”
으차!
드디어 선박 압수 명령서를 함선 꼭대기에 붙였다.
“이거 떼는 순간 범죄자로 취급할 테니 그리 알아요.”
재준이 기중기 위에 올라 해군 함정을 바라보는 순간.
팟팟팟팟팟.
어느새 몰려온 기자들의 플래시 세례가 이어졌다.
***
아르헨티나 카사 로사다 궁.
대통령은 방금 재무장관으로부터 짜증스러운 보고를 받아서 입에서 쌍욕을 내뱉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미친 거 아닙니까? 중앙은행 준비금과 연기금 자산에 압류 소송을 진행한다고요?”
“네. 저희도 변호사를 선임해서 최선을 다해 방어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냥은 안 돼요. 선례를 남기지 말고. 아예 아르헨티나 최고의 변호사를 선임하세요. 당장.”
“알겠습니다.”
똑똑.
“들어와요.”
비서 한 명이 들어와서 재무장관에게 뭐라고 속삭였다.
비서가 나가자 대통령이 다짜고짜 물었다.
“뭡니까?”
“대통령님. 켈리포니아 인공위성 발사대에도 압류를 걸었답니다. 급히 사람을 미국으로 보내 변호사를 선임해야겠습니다.”
“뭐? 이 작자들이 정말.”
아이고 머리야.
대통령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전혀 예상을 못 했다.
소송에선 졌지만 배 째라고 나오면 지들이 어쩌겠는가.
국제파산법원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데.
기껏해야 세계은행 산하 국제조정기구 국제투자분쟁해결센터가 있기는 하지만 중재 기간은 최소 10년은 봐야 한다.
오히려 걸어주면 고마울 따름이다.
근데 압류라니.
이건 전혀 예상 밖의 일이었다.
국가 채무에 아르헨티나와 미국 동시에 압류 진행은 처음 겪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니었다.
똑똑.
“들어와요.”
비서가 들어오자 재무장관에게 다가가 뭐라고 속닥이며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뭐라고요?”
재무장관이 서류를 빼앗듯 낚아채서 본 후 지금까지 그런대로 남아있던 일말의 희망이 싹 날아가는 표정을 지었다.
대통령은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오는 걸 직감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프리카 가나에서 투마로우가 저희 해군 훈련함을 몰수했답니다.”
“뭐요? 이거 전쟁이라도 하겠다는 겁니까?”
“그게……. 가나 법원이 보석금 2,000만 달러를 즉시 입금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뭐라고요?”
후.
대통령은 재무장관을 쳐다봤다.
“이건 또 어떻게 처리해야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