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화 저거 세워서 압류해. 저거(2)
AAG 빌딩. 66층.
인테리어가 마무리되고 재준의 새로운 보금자리가 만들어졌다.
최고급 자재와 최고급 장비로 세팅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61층에 최고급 레스토랑 몇 개를 차렸다.
왜? 재준도 밥은 먹어야 사니까.
그렇다고 사무실에 요리사를 둘 수도 없고.
그래서 아예 나라별로 몇 개의 식당을 둔 셈이 되었다.
근데 이게 나중에 소문이 나서 문전성시를 이룬다.
탁 트인 스카이라운지에서 식사.
돈이 없어 못 먹는 월가겠는가. 장소가 없는 거지.
암튼 투자 대비 꽤 좋은 효율을 누렸다.
62층부터 65층까지 투마로우 Proprietary Trading팀이 사용했다.
총인원 200명.
즉, AAG빌딩의 최상부에서 근무한다는 것은 윌가에서 최고의 직장에 근무한다는 것이었다.
딱 두 사람만 빼고.
박민수와 강호석은 매일 이 높은 빌딩으로 출근하는 것이 시간 낭비라고 투덜거렸다.
“이사님. 엘리베이터가 빠르긴 한데 꼭 이렇게 높은 곳에 사무실을 두는 이유가 뭘까요?”
“내 말이. 전엔 3층이라 걸어 올라가면 운동도 되고 딱 좋았는데.”
“걸어가요? 그럼, 여기 정전 나면 62층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건가요?”
“뭐?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둘은 서로를 마주 보며 우울해했다.
한눈에 뉴욕 전체를 바라보는 위치에 서 있는 재준.
한 손에는 1억 원이 호가하는 위스키를 들고 음미하고 있었다.
카! 좋다.
지금까지 고생한 보람이 있었어.
똑똑.
“워서스틴, 퀴니코. 어서 와요. 위스키 한잔합시다.”
“좋은 술 있습니까?”
“있지. 여기.”
워서스틴과 퀴니코가 재준 룸에 마련한 바로 향했다.
재준이 병을 살짝 들어 보이자 퀴니코가 숨을 멈췄다.
“더 맥칼랜 1926 파인 앤 레어 아닙니까?”
“제임스에게 부탁해서 몇 병 살려니까. 한 병밖에 없다네. 입술만 적시게 생겼어.”
재준은 워서스틴과 퀴니코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소송은 잘 진행되고 있죠?”
“아르헨티나가 저희 외 채권단과 채권 스와프를 체결하고 구채권을 신채권으로 전부 바꿨답니다.”
“그래? 거, 정말 쓸데없는 짓들을 하네.”
“이번 달에 우리 외에 채권자들에게 이자를 지급한다고 합니다.”
아르헨티나 정부에게 신채권을 받은 채권자들은 이달부터 이자를 받게 되어 있었다.
투마로우만 빼고.
“이자……. 그래 이자……. 우리만 못 받는 이자. 위서스틴 그 이자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해 버려. 아주 이도 저도 못 하게.”
퀴니코는 아리송했다.
국채 이자에 대한 집행정지 가처분?
국가의 주권 행위에 대한 사법심사 면제 법리가 있는데 이게 가능한가?
퀴니코는 재준에게 물었다.
“국가를 상대로 승소할 수 있습니까?”
“승소하도록 만들어야지.”
“만들어요?”
아니, 판사라도 매수하려는 건가?
***
뉴욕연방준비은행.
재준과 윌켄이 윌리엄을 만나기 위해 연준을 찾아왔다.
윌리엄은 재준을 보자 팔까지 벌려 환영했다.
“오, 미스터 임. 어서 와요. 자, 앉읍시다.”
“윌리엄. 요즘 기분이 좋으신가 봅니다. 얼굴에 주름이 다 없어진 것 같은데.”
“왜 아닙니까? 하하하.”
크게 웃은 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스터 임이 보기 싫은 얼굴 몇을 처리했으니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이 사람 내 옆에 있는 윌켄은 보이지도 않나 보네.
“윌리엄, 저보단 진정한 윌가의 전설. 윌켄입니다. 윌켄, 윌리엄 아십니까?”
“그럼요. 뉴욕연준 총재를 모를 리가 있습니까?”
“윌켄이라고요?”
그제야 윌켄의 존재를 눈치챈 윌리엄은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죄송합니다. 사실 직접 본 적은 없어서 제가 무례를 범했군요.”
“아아, 괜찮습니다. 10년을 윌가와 등을 지고 살았으니 저를 못 알아보는 건 당연합니다.”
윌리엄은 스토체인 합병 사건에서 윌켄이 뛰어들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윌켄이 재준 밑으로 들어갔는지는 몰랐다.
이런 엄청난 일을 몰랐다니.
미스터 임. 어디까지 세력을 뻗을 건가.
너무 커지면 이것도 연준에겐 곤란한데.
그나저나.
“어쩐 일로 저를 다 만나자고 한 겁니까?”
“윌리엄, 내가 프랑스 가서 은행 합병한 건 아시죠.”
“알지요. 사라크방크,”
흡. 쿡쿡쿡.
갑자기 입을 틀어막고 웃는 윌리엄과 썩은 표정의 재준.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알아요. 미스터 임 센스에 놀랄 따름입니다. 사라크방크라니요. 쿡쿡쿡. 사라크방크. 사라크 대통령 평생 고개를 뻣뻣이 들고 다니는 모습이 눈에 훤합니다.”
“어쩔 수 없었다니까요.”
“아, 죄송합니다. 그래 그 은행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는 그 은행이 가지고 있는 아르헨티나 국채를 투마로우가 인수했습니다.”
아르헨티나?
이번에 국가 부도 선언했지.
거기에 물렸구나.
“제가 풀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요.”
“아니요. 연준의 도움이 필요한 건 아닙니다. 단, 아주 못된 버릇을 가지고 있어서 소송을 걸었습니다.”
“못된 버릇이라뇨. 혹시 일부러 국가 부도라도 낸 겁니까?”
“음.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일부러 돈 왕창 땡기고 돈 못 준다고 하는 게 꼭 러시아를 보는 것 같단 말입니다.”
“그래요?”
“네. 근데 이번에 다른 채권단들은 구채권을 신채권으로 바꾸고 이자를 받겠다는 생각을 했나 봅니다.”
“그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아니요. 당연하지 않죠. 제가 가진 채권액이 400억 달러인데. 내 돈은 슬쩍 무시하고 있습니다. 400억 달러를.”
400억 달러나?
도대체 이건 또 얼마에 산 거야?
채권 하니까 옆에 윌켄이 있는 이유를 알겠네.
“그래서요.”
“뉴욕남부연방지방법원에 이자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했습니다.”
“네? 국가가 하는 일에 딴지를 걸겠단 겁니까?”
“국가든 기업이든 내 돈 안 갚는 놈들하곤 끝까지 싸울 겁니다.”
허. 참나. 이제 국가를 상대로 싸움을 거네.
“그럼 제가 해줄 일이 무엇입니까?”
“이번 담당 판사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뭐, 제가 직접 찾아가도 되지만 윌리엄 소개가 있으면 아주 큰 신뢰가 있지 않겠습니까?”
“지금 로비하러 오신 거군요.”
“네, 로비가 합법적인 나라에서 할 수 있는 걸 안 하는 것도 바보 아니겠습니까?”
“좋아요. 미스터 임한테 빚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쁠 건 없으니까. 내가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아르헨티나가 채권자를 차별하는 행위를 함으로 Pari Passu 조항을 정면으로 위배했다]
1심 판결은 신채권을 받은 채권자들에게 이자를 지급할 수 없다며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신채권을 가진 채권단에게 지급하려고 미국 은행에 예치했던 이자가 묶였다.
아르헨티나는 비상이 걸렸다.
“투마로우 미친 거 아닙니까? 당장 상고하세요.”
그러나.
[1심 판결에 법리 오해가 없다]
2심 판결도 투마로우의 승리로 끝났다.
“아니, 왜 자꾸 지는 겁니까? 다시 상고하세요.”
아르헨티나는 연방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리고,
[아르헨티나 정부는 투마로우가 보유한 채권에 대해 어떻게 배상을 할 것인지에 대한 방안을 마련해서 제시하라]
아르헨티나는 어쩔 수 없이 투마로우 관계자와 만나 합의점을 찾아야 했다.
***
투마로우 회의실.
긴 테이블 양쪽으로 두 진영이 대치하고 앉았다.
투마로우 쪽은 재준과 윌켄, 앤드류, 워서스틴, 퀴니코가 자리했고 아르헨티나 재무장관과 옆으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는 변호인단이 보였다.
앤드류가 먼저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조건을 말해 보세요.”
“저희 조건은 현금입니다. 현금을 드릴 테니 가처분을 취하해 주세요.”
“현금 얼마입니까?”
“100억 달러 드리겠습니다.”
“100억 달러요? 그건 채권단이 받은 신채권보다 낮은 금액 아닙니까? 그들은 30%를 받았다고 들었는데. 왜 우린 25%를 제시하는 겁니까?”
“현금 아닙니까. 그리고 당신들은 채권을 7%에 산 거 다 압니다. 세 배가 넘는 금액인데 이 정도면 된 거 아닙니까?”
“거절합니다. 더는 이야기 들을 필요가 없을 것 같네요.”
앤드류가 일어서려 하자 재무장관이 매섭게 눈을 부라렸다.
“정말 욕심이 많군요. 얼마를 원하십니까?”
와! 욕심쟁이래.
재준이 앤드류에게 앉으라고 손짓을 하고 재무장관에게 말했다.
“이봐! 사기꾼 아저씨. 지금 누구한테 욕심쟁이라는 거야? 당신들 이거 완전히 꾼이야. 꾼. 돈 빌려 갈 때랑 갚을 때랑 너무 다르잖아요. 안 그렇게 생각해요?”
“무슨 소립니까? 국가가 어려워졌으니까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럼 유전이라도 팔아요. 아르헨티나는 돈 빌려 가고 안 갚아도 되는 나라인가? 나도 거기 은행에서 돈 좀 빌리고 안 갚아도 되는 거 맞지요?”
“유전은 국유자산입니다. 맘대로 사고팔고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럼 땅이라도 팔든가요. 뭔 노력도 하지 않고. 아니구나, 노력하는구나. 안 갚는 노력.”
“됐습니다. 저희도 할 만큼 했습니다. 이만 이야기 마무리하죠.”
재무장관이 일어서려는데,
큭큭큭.
재준이 웃으며 말했다.
“지금 당신들 법정모독죄에 해당하는 거 알죠?”
“뭐라고? 거기서 법정모독죄가 왜 나옵니까?”
“당신 말고. 거, 옆에 있는 변호사 아저씨. 제 말이 맞죠?”
변호사 하나가 나섰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럼 우리가 법원에 신청할게. 법원가서 물어보든가.”
다른 변호사가 나섰다.
“1심과 2심의 판결 취지를 문제 삼는 겁니까?”
“오, 맞아요. 다행히 똑똑한 사람도 있네. 분명 판결은 우리가 이겼어요. 그러니까 당신들은 우리에게 100% 원금을 가져와야 한다 이 말이지. 근데 왜 자꾸 딜을 하려고 하지?”
재무장관이 인상을 쓰며 말했다.
“얼마를 원하는 겁니까?”
재준이 빙글거리며 웃었다.
“100%라니까.”
“40% 드리겠습니다.”
“진짜?”
“그렇소.”
“RUFO(Rights On Future Offers)라고 들어 봤어요? 나한테 40%를 줘도 큰일 날 텐데.”
“RUFO?”
재무장관이 이 생소한 용어를 몰라 옆에 있는 변호사를 쳐다봤다.
변호사가 재무장관에게 속닥이며 설명하자 재무장관의 얼굴이 허옇게 변했다.
채권 계약시 Paris Passu 조항과 함께 통상적으로 들어있는 조항.
간단하게 설명하면 모든 채권자는 계약 선후와 관계없이 같은 조건을 받을 수 있는 권리이다.
“나한테 40%를 주면 다른 채권자들에게도 40%를 줘야 한다는 거 알고 있죠?”
“그런 조항이 있었다고요?”
“정말 정치인들은 공부를 안 해. 재무장관이란 사람이 채권에 어떤 조항이 있는지도 모르고. 한심하다, 한심해. 하긴 선진국이라는 어떤 나라 재무장관도 그러더니 여기 하나 또 있네.”
“그걸 말이라고.”
“자, 이제 어쩔래요? 우린 원금 100% 아니면 당신들을 상대하기 싫은데. 그리고 100% 가져오지 않으면 오늘 법정모독죄를 법원에 요청할 거예요.”
“…….”
진퇴양난.
재무장관은 위로 올라갈 수도 없고 아래로 내려갈 수도 없는 절벽 중간에 매달려 있는 기분이 들었다.
100%를 안 주면 법정모독죄에 해당하며 100%를 주면 다른 채권자들까지 모두 원금을 다 돌려줘야 한다.
한 나라가 일개 은행의 손에서 놀아나는 꼴이 되었다.